투병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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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에 대한 혼란
고정혁기자2009년 01월 15일 20:06 분입력   총 881164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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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담 이승섭(74)_식도암과 갑상선 아래 림프절 전이. 투병 중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2008년 2월 20일 별세하셨습니다.

회의, 방황, 암울
2008년 2월 4일(월)
시스플라틴을 맞은 지 5일이 되었다. 젤로다 복용은 4일이 되고. 오늘 아침부터 식도 졸림 현상이 많이 완화된 것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 녹즙 마시는 데 겁겁하기는 해도 걸리지는 않고 넘어간다. 밥도 껄끄럽고 겁겁스러웠지만 엊그제보다는 넘기기가 수월해져 이대로라면 스탠드 삽입 공포에서 벗어나질 것 같다.
지금의 심정은 암으로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식도 협착이 심해져 음식을 연하(沿河)못하니까 스탠드를 삽입한다든가 위에 직접 호스를 연결하는 관급 현상이 두려운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모습이며 비참의 극인 말기 현상이다.
내 나이 찰만큼 찼으니 언제고 어느 때고 담담한 심정으로 죽음을 수용할 마음가짐은 되어있다. 다만, 죽을 때 죽더라도 관급으로 명줄 이어가는 비참한 과정은 안 거치고 죽고 싶은 생각뿐인 것이다. 지난 2주일 동안 내색은 안했지만 나의 머릿속을 꽉 채웠던 자욱한 안개가 협착 진행의 공포였다. 그 공포의 안개가 이젠 서서히 걷히려하고 있는 것이다. 벌써부터 마음이 행복해진다. 아니, 벌써 행복하다. 지속되던 공포에서 벗어나는 이 행복감!

젤로다 정제(500mg 3tab)를 복용하는데 오늘 처음으로 깩깩거리지 않고 넘겼다. 물론 겁겁함이 심해 무척 긴장되는 연하였지만 그래도 그 과정을 통해 식도 졸림의 힘이 약해져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힘의 약화란 배수 증식으로 자각될 만큼 급격히 커지던 암덩어리들의 증식력이 주춤거리고 있다는 증거일거다. 음식의 주춤거림이란 항암약제에 대하여 반응이 있기 시작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반가운 현상이다. 이대로 잘 밀고 나가고 잘 관리해 나간다면 암을 잠재울 수는 없더라도 더 이상의 증식은 일단 저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암 조직에게 증식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이다. 그런데 바로 이 문제가 암 치료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고 가장 어려운 문제이고 정답이 따로 없는 문제다.
지난 2년 반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한숨이 앞서 절로 나온다. 딴에는 열심히 치료 받아왔고 열심히 관리도 잘 하려고 마음 써 왔었다. 그런데 그게 마음뿐이었고 철저하지는 못했었다. 투병기를 들여다보면 누구 못지않게 모범적인 요양생활을 해온 것 같이 보이는데 실생활은 그렇지도 안 했었다. 철저한 관리만 이루어져 왔었던들 지금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거늘….

다만, 현 시점에서 나를 당혹스럽게 하며 과거의 요양 방법에 회의를 느끼게 하는 요소는 너무도 많아 아직도 현재와 앞으로 요양방침을 정할 수 없어 마음의 방황은 어디쯤에서 그쳐질 것일까, 암울한 생각이 앞을 가린다. 과거에 굳은 신념으로 믿었던 나의 맞춤형 요양방법이 빗나갔다는 현실 앞에서 과거의 요양 방법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요양 방침을 세워야 하는데 과거의 무엇이 잘못된 것이며 무엇이 잘했던 것인가를 가늠하지 못하고 있으니 앞으로의 방침을 세워 볼 엄두가 안 난다. 그저 그냥 답답하고 암울한 상태인 것이다.

종교적 신앙심에 견줄 만큼 신념으로 해온 녹즙 마시기, 쌀밥을 거부하고 15잡곡밥으로 일관해온 주식, 혈액 정화를 위하여 항산화 약제들을 꾸준히 복용해 온 그 노력, 해독 작용과 자연치유력에 보탬이 된다고 한약재를 정성껏 직접 조제하여 시간 맞춰 복용해오던 그 굳은 의지, 300보만 걸으면 통증이 일어나 더는 못 걷겠다는 다리를 쉬며 달래며 마구 걷게 했던 그 아픔의 시간들…. 그래도 남보다는 조금은 초인적 모습의 나였다고 자부해왔는데 오늘의 이 허탈한 현상 앞에서 으스러져버린 나의 처량함이 한없이 불쌍히 여겨진다.
무엇이 잘못이었을까?
무엇이 정말 잘못된 것이냔 말이다.

먹거리에 관한 혼란
2008년 2월 5일(화)
이상한 일이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2년 반 동안 끈질기게 지속되던 목 부위, 오른쪽 가슴 부위, 오른쪽 겨드랑이 통증들이 조용해진 것이다. 항암 약제에 반응을 보이고 있는 암 조직들이 새로 혈관 생성을 못하니 그만큼 정상 조직의 신경말초를 건드려 오던 일들을 못하게 되었다는 현상으로 풀이된다. 아주 미약한 통증이 겨드랑이에 간간히 남아 비치긴 하지만 통증에서 완전히 해방된 상태 같다. 지긋지긋했던 그놈의 통증들, 이제 다신 찾아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제발! Please, Please!

아직 항암제 부작용 증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일주일에서 열흘쯤 지나야 나타나나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몸이 전체적으로 조금 나른한 느낌이다. 특별히 식욕을 잃은 것 같지는 않아도 줄고 있다. 아침 식사로는 녹차국수 몇 가닥이 전부였다. 구운 마늘, 데친 브로콜리, 생다시마잎, 김치 등등 몇 가지 반찬이 있었으나 손도 안댔다. 별로 생각이 안 나고, 또 넘길 때의 그 곤욕이 싫어서였다.

점심은 인사동 두부마을 집에서 청국장 정식을 들었다. 식도암으로 먼저 떠나버린 단짝 친구 고 김석균 학형의 부인과 요즘 부쩍 나를 보살펴주고 있는 죽마고우 한용식 학형과 셋이서 어울렸다. 부인은 20여 년 전 유방암으로 절제 수술하였다. 본인의 관리 능력도 뛰어나서 예후가 아주 좋았고 단 한 번의 말썽도 없이 현재까지 잘 지내오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협착증이 오락가락하나보다. 아침에 젤로다 복용 시에는 겁겁하긴 했어도 넘길 때의 아픔은 없었는데 하필이면 점심 식사 때 아픔이 왔다. 밥을 대 여섯 숟갈 뜨고 청국장 몇 번 뜨고는 더는 못 먹었다. 손님을 청해 놓고 그 앞에서 내가 이렇게 아파합니다라고 데모라도 한 꼴이 돼버렸다. 민망한지고.
항암 중에는 체력이 떨어지니까 무엇이든 잘 먹어야하며 육류도 꺼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정설같이 되어 있는데 왠지 그대로 따르고 싶지 않다. 항암 중에도 하루 빨리 나의 맞춤형 식이요법들을 짜서 실행에 옮길 생각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나의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해버린 일이 발생했다.
한의원 K박사가 짚어준 나의 체질이 마음에 걸린다. 8체질 진단법으로 나의 체질은 토양이란다. 토양에 좋고 해롭고 한 식품 재료들을 보면 평생을 몸에 좋다고 생각하며 먹어온 여러 품목들이 나에게는 해롭다 쪽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다. 평생의 식사만이 아니고 암 요양과정에서 암에 좋다는, 그래서 꾸준히 먹어온 음식들이 해롭다로 자리바꿈을 하였으니….
먹거리에 관한 한 난 지금 패닉 상태다.

뒤로월간암 200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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