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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방법
고정혁기자2009년 02월 06일 14:31 분입력   총 879774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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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찬들(가명)|45세. 직장암 3년째.

후배 녀석에게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형! 죽었나 살았나 전화했어.”
“아직 살아있다. 잡놈아.”
“학원 다녀? 살만한가 보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끊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양반이다. 어떤 놈은
“야! 니 마누라 엄청 좋아하지.”
“왜?”
“니 마누라 시집 두 번 가잖아. 니 딸내미도 새 아빠 생기니까 좋아할걸?”
“그려 임마. 하하하하.”
웃으면서 전화를 끊지만 바로 욕이 나온다.
“이, XX야. 너도 꼭 나같이 직장암 걸려서 뒈지게 고생해봐라.”

난 2005년 7월 29일. 직장암 판정을 받았다. 항문에 너무 가까이 있다는 까닭에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먼저하고, 12월 1일 수술을 했다. 비몽사몽간에 눈을 떠보니 오른쪽 배에는 인공항문이 생겼다. 그 뒤 2차 항암치료를 하면서 아내의 손에 이끌려 세 번에 걸쳐 응급실에 입원을 했고, 6개월간 잠시 인공항문을 했다.
그 이듬해 2006년 5월 23일, 인공항문 복원수술이 끝나고 입원실에 누워있는데 의사가 왔다.
“수술 잘되었습니다. 참, 맹장도 잘라냈습니다.”
“우와! 수술 두 번하니까, 덤으로 맹장까지. 이 병원 참 좋네요.”
하고 웃었다. 의사가 간 뒤에 아내에게 물어봤다. 맹장 떼어 낸다는 말이 있었냐고. 전혀 그런 말이 없었다고 한다. 적어도 보호자한테는 동의를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직장암. 장난이 아니다. 처음에는 20~30번씩 화장실을 다녀야한다. 말이 20~30번이다. 항문이 헐고 아파 걷지도 못하고 울면서 변기에 앉아 있어봐라. 딱 ‘고만……’하는 심정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다가도 똥이 나와서 아내한테도 말을 못하고 속이 상해 울면서 팬티를 빨아야 한다.
운동하러 나갔다가 옷에 묻어 다시 되돌아오고 방귀인지 똥인지 구분이 안가고….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아무튼 허벌나게 드러운(?) 병이다.

가끔 직장동료(같은 직장암환자)가 전화가 온다. 난 직장이 전혀 없고 그 동료는 직장이 5cm정도 남아 있는 동료다. 나보고 집에만 있지 말고 귀저기차고 걸어보라고 한다. 항문이 헐어서 움직일 때마다 쓰라리고 아파서 걷지도 못하는데, 자꾸 운동을 나가라고 하면 나중에는 짜증까지 난다. 같은 직장암환자라도 위치에 따라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 말. 역사학자이신 어느 선생님이 나에게 해주신 말씀이 생각이 났다. 그 선생님은 간암이셨는데, 나무 조각에 푹 빠져 살다보니 딴 생각도 안 들고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다면서 나보고 뭐든지 해보라고 한다. 그 때는 정말 9층 아파트 우리 집에서 슈퍼맨 망토를 걸치고 얼마나 날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바로 집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부동산중개인 학원에 등록을 했다. 물론 아내가 부동산을 하고 있는 까닭도 있지만, 가장 좋은 것은 집에서 가깝다는 것이 좋았다. 걷지도 못하면서 무슨 학원에 다니느냐고 주위에서 말렸다. 하지만 날마다 혼자서 집에 있는 것이 두려웠고, 사람이 그리워서 무작정 일 년 등록을 했다. 재미있다.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도 재미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더욱 좋다.

사실 집에서 7~8분 거리에 있는 학원까지 걸어가는 것도 힘들지만, 더 힘든 것은 화장실이 문제다.
늘 그렇듯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화장실과 누르기 조이기 붙잡고 사정하기 한판을 한다. 그리고 10분 전에 집을 나선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화장실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제발 학원까지만 참아줘라. 부탁이다’ 하지만 뜻대로 되질 않는다.

집에서 학원까지 가는데 공원이 두 군데나 있다. 그런데 겨울이라 동파된다고 문을 닫아 놓는다. 급할 때는 정말로 문짝이라도 부셔버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어제도 학원가는 도중에 변이 나왔다. 하루 이틀 한두 번도 아닌데, 너무 짜증이 나고 속이 상해서 눈물이 나온다. 신호등만 건너면 대형할인마트가 화장실이 있고, 몇 발자국만 가면 학원 화장실이 있는데 그사이를 못 참고 나온다. 정말 성질 같아서는 배를 확 잡아 뜯어버리고 싶다.

옷을 갈아입으러 집으로 다시 간다.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는 항문이 쓰라리고 찝찝해서 오만가지 인상을 쓰면서 어기적어기적 걷는다. 그러다가 누군가 보이면 씩씩하게 어깨를 쫙 펴고 살짝 웃으면서 집으로 간다. 그 심정 당해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모른다.

속옷을 빨고 샤워하고 옷을 입고 학원에 가면 40여분이 지난다. 강의도 중간에 들어서 무슨 말인지 모르고 멍청하게 앉아 있으면, 바로 방귀가 괴롭힌다. 온 힘으로 항문을 막고 엉덩이를 비틀고 난리 부르스를 춘다.

강의 중간에 10여 분의 쉬는 시간. 함부로 일어설 수도 없다. 힘주어 막았던 방귀가 나도 모르게 나오기 때문이다. 먼저 살짝 엉덩이를 들어 본다. 문제가 없겠다 싶으면 그때 일어서서 나온다. 조심조심 화장실로 간다. 그리고 힘을 줘본다. 그렇게 나오려고 하던 방귀가 나오지 않는다. 계단을 오르내린다. 아무리 방귀를 내보내려고 애를 써도 나오지 않는다. 환장한다.

그 사이에 강의는 벌써 시작되었다. 쉬는 시간에 내보내려고 하던 방귀가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나오려고 한다. 정말 돌아 버리고 싶다. 너무 화가 나서 배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온 힘을 줘서 방귀를 막는다.
하루는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가는데 “아저씨는 양반 출신인가 봐요?” 웃으면서 아줌마가 말을 걸어온다. “네” 하면서 그냥 빙그레 웃으면서 속으로는 ‘나요? 똥구멍이 헐고 아파서 이렇게 걷습니다요’ 한다.

주변의 학원 사람들은 아무도 내가 암환자라는 걸 모른다. 내가 암환자라는 걸 알면 사람들이 피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전염이 되는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피한다는 암동기생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가방을 둘러메고 학원에 간다. 배우러 간다는 것보다는 ‘살기위해 갑니다.’

뒤로월간암 2008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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