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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 이야기] ⑴ 사구체신염에서 위암까지, 47번째 생일을 감사하며
고정혁기자2009년 07월 09일 13:26 분입력   총 883497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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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숙 | 위암

◆ 마흔일곱 번째 생일을 맞는 나의 마음

마당 가득 쏟아지는 따스한 봄볕을 맞으며 매어놓은 줄 가득 빨래를 넙니다. 가족들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담장을 둘러친 개나리와 진분홍 철쭉, 대문을 지날 때마다 은은한 향기로 인사하는 라일락을 볼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수업이 끝나고 야구나 축구를 하고 땀에 흠뻑 젖어 발갛게 상기된 볼로 씩씩하게 현관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아들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이제 곧 미국에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전화로 쉴 새 없이 조잘대는 딸의 명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감사합니다.
봄볕이 따뜻하니 도시락 싸들고 남한산성으로 나물 캐러 가자는 친구들의 웃음 가득한 초대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올해 5월이 되면 위암 수술 후 5년을 지나 47번째의 생일을 맞이하는 것이 꿈만 같습니다. 5년 전 오늘처럼 봄볕 가득한 어느 날,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어린아이들을 남기고 떠나기가 너무도 미안해서 조금만 더 엄마로 머물게 해달라고 가슴이 저리도록 간절히 눈물의 기도를 드렸던 것이 기억납니다. 부족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새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이렇게 글을 쓰며 찬찬히 생각해 보니 나의 지난 삶은 건강했던 날보다 질병들과 씨름했던 날들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하여 47살이 된 지금까지 늘 병들어 힘들어하는 딸을 위해 노심초사 안타까이 지켜보시며 눈물의 기도와 물심양면으로 살펴주신 친정어머니의 사랑이 있었음을 기억하며 감사합니다.
결혼하여 20년을 늘 병들어 도움은커녕 근심거리가 되는 아내를 원망하거나 귀찮아하지 않고 오히려 바다 같은 넓은 마음과 태산 같은 우직함으로 늘 곁에서 희망과 용기를 주며 사랑으로 감싸준, 말로 다 할 수 없는 남편의 사랑이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어릴 적부터 병약한 언니이자 누나를 늘 배려하고 염려해 주며 위로해주고 힘이 되어준 형제의 우애에 감사합니다.

엄마가 건강하지 못해 충분히 돌보지 못하고 함께 해주지 못했어도 불평하거나 엇나가지 않고 엄마를 위해 기도하며 병마와 싸워 이길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곁에서 응원해주고 용기를 주며 삶의 이유가 되어준, 사랑한다고 말로 하기에는 부족한 딸과 아들에게 감사합니다.
나의 건강회복을 위해 늘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주고 지지를 보내준 모든 가족과 친구들, 교회의 교우들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그래서 47번째 생일은 아무래도 모든 분들께 인사를 드리는 감사 파티를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투병은 오랫동안 이어져 오던 병과의 사투, 그 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힘든 투병의 나날이 시작된 것은 첫째가 채 첫 돌이 되기 전에 찾아온 사구체신염으로부터입니다. 이때부터 병든 아내, 병든 엄마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사구체신염은 암처럼 걸리면 곧바로 죽음을 떠올리는 병은 아니지만 만만치 않게 어렵고 힘든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손과 발, 얼굴 등이 퉁퉁 부어 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약을 먹고 주사를 맞으면 곧 괜찮아지려니 하는 마음으로 아산 병원을 갔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입원해 조직검사까지 하고 단백뇨 수치가 정상 범위보다 너무 많이 나오는 사구체신염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나의 삶은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구체신염을 치료하기 위해 부신피질 호르몬제를 처음에 13알씩 하루에 3번을 먹었는데, 약이 너무 많아 음식이 아닌 약으로 배가 불렀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약 부작용으로 부은 것인지, 살이 찐 것인지 모르지만 47kg이었던 체중이 60kg을 지나 68kg~70kg에 육박하는 거구가 되었고 얼굴과 목 등에는 팥알만큼이나 큰 여드름이 가득 차서 점점 흉물스런 괴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여드름으로 가득 찬 얼굴만으로도 보기가 흉한데 부은 얼굴은 누웠던 쪽으로 일그러져 그야말로 항상 비뚤어져 있었고 때로는 안구까지 부울 때면 눈의 망막까지 떨어져 찌글찌글 구겨질 정도가 되어 갓 돌을 지난 딸아이는 엄마인 나를 보기만 하면 무섭다고 울고 피하여 외할머니댁에서 이모가 엄마인 줄 알고 컸을 정도입니다. 스스로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무섭고 좌절감이 느껴지고 부끄러워져서 거울을 보지 않고 살았었습니다.

어느 날은 약이 도저히 넘어가지도 않고 흉한 내 모습도 싫어서 약을 버리려 하다가도 어린 딸의 얼굴이 떠올라 울며 눈물로 약을 삼켰던 날도 많았었습니다. 이렇게 13알로 시작한 약이 1/4로 줄기까지 회복과 재발을 5년이나 반복했습니다. 사구체신염과 씨름하는 사이 자가면역결핍으로 갑상선까지 부어 갑상선기능항진으로 몸은 점점 더 지치고 힘든 생활이 지속되었습니다. 때로는 그만 쉬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투병을 계속할 수 있었던 내가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그곳에 언제나 가족들이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고마운 것은 변함없는 남편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망가지고 쓸모없어져 짐만 되는데도 남편은 한 번도 귀찮아하거나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오히려 살아있어서 고맙고 병을 잘 이기고 있어서 장하다고 칭찬하며 용기를 주었습니다. 내 망가진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모든 사람 앞에서 당당히 ‘저희 집사람입니다’라고 소개하며 모든 모임에 동반하기를 꺼리지 않았습니다. 소금기 있는 음식을 제한해야 하는 식이요법 때문에 맛없는 음식을 언제나 맛있게 먹고 오히려 입맛 없는 나를 위해 새로운 요리로 식탁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아픈 엄마로 아이들의 성격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늘 재미있고 즐거운 일들을 만들어 아이들과 놀아 주며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엄마의 몫까지 애쓴 우리 남편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그 5년 동안 병원 진료를 받는 날이면 어김없이 만사를 제치고 병원을 동행했고. 아프고 힘들 때면 언제나 그곳엔 남편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때 남편의 지극한 희생과 사랑이 없었다면 나는 병원 진료를 포기했을 것이고 아마도 이렇게 건강하게 회복된 모습의 47번째 생일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런 남편을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 나의 한 가지 기도

이렇게 5년간 사구체신염과 갑상선 항진으로 투병하면서 나는 결혼해서 남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근심거리에 짐이 된 것 같아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차에 뭐라도 한 가지 선물을 주고 싶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남편이 행복해 할 좋은 선물을 해주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하던 차에 만약 아들이 있으면 남편이 사업하는데 더욱 힘도 나고 행복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신장이 안 좋아 아이 낳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매일 ‘하나님! 아들을 낳아서 남편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요’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이렇게 7년을 기도하던 중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셔서 5년간의 투병을 마치고 약을 끊은 지 2년 후 놀랍게도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임신하게 된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재발이 염려되어 다시 신장내과 담당 의사 선생님을 찾았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깊은 한숨과 함께 아기가 없으면 모르지만 딸이 있지 않으냐. 아무래도 임신하면 재발이 염려되니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아기를 포기하도록 권유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 소중하기도 하고 그동안 기도해 온대로 마지막으로 한 가지 선물이라도 남편에게 주고 싶다는 무모한 욕심에 저는 아기를 포기하지 않고 낳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부터 남편은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일주일이 무사히 지나는 것을 감사하여 매주 하나님께 감사 예물을 드리며 건강하게 건강한 아이를 낳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고 주변의 많은 분들도 함께 기도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의사선생님과 주변사람들의 염려가 무색할 정도로 아주 건강하게 아들을 순산했고 지금 이 아들은 씩씩하게 잘 자라 6학년이 되었고 딸은 이번 6월이면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 위암으로 인한 새로운 투병생활

아들을 낳고 7년을 부기도 있고 갑상선 항진증도 있어 조금 힘들긴 했지만 정기검진을 받으며 그런대로 큰 무리 없이 평온한 날이 이어졌습니다. 그리던 5년 전 어느 따스한 봄날, 시내에 있는 쇼핑몰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연히 결혼해서 멀리 살던 친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서로 갈 길이 바빠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 헤어지고 나니 병원에 왔다는 이야기가 마음에 걸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친구는 말끝에 얼마 전 종합검진 중 위암이 발견되어 삼성 병원에서 수술하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당황하고 아무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제대로 위로도 못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며칠을 복잡한 마음으로 지내다가 손잡고 기도라도 하고 싶어 병실을 찾았습니다. 돌아오며 머리를 스치는 많은 생각 가운데 잊고 있었던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몇 년 전 위내시경 검사를 할 때 역류성 위염이 있으니 위암이 생길 확률이 높다며 일 년에 한 번씩은 내시경 검사를 받아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날 저녁을 준비하며 내시경 검사를 해볼까 했더니 남편은 말 나온 김에 오늘 저녁부터 금식하고 당장 내일 검사해 보자며 밀어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얼떨결에 다음날 남편과 함께 나의 병력을 잘 알고 계신 작은 내과에 가서 내시경 검사를 했습니다. 결과로는 위궤양은 있으나 조직검사를 못하니 원하면 아산병원으로 의뢰를 해주시겠다며 의견을 물으셨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의뢰를 했고 아산 병원에서 조직검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소화에도 크게 문제가 없고 통증도 없고 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검사받고 결과가 나오는 날까지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 주듯 몸속에 암세포가 자라는 것도 모르고 천 년 만 년 이라도 살 것처럼 벽지를 바꾸고 바닥재를 바꾸고 새로 칠하느라 분주하기 그지없었고 게다가 상담공부까지 하러 다닌다고 정말 수선스럽게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 또한 결과가 나오는 일주일간 일본 출장을 떠났습니다.

검사 후 며칠이 지났을까, 상담 공부하러 서둘러 학교에 가고 있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 내시경 검사 나왔으니 병원으로 오세요. 나는 별생각 없이 오늘은 학교에 가고 있으니 내일 가면 안 되느냐고 물으니 “학교가 문제가 아니에요. 빨리 병원으로 오세요.” 하며 버럭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아차,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구나 하는 마음에 가슴은 벌써 뛰기 시작했습니다. 남편 없이 혼자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겨 의사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의사선생님께는 염려스런 표정으로 위암이라며 아산병원에 예약해 놨으니 월요일에 가보세요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진행됐는지, 수술이라도 가능한지 묻자 지금은 알 수 없고 정밀검사를 받아야 한다고만 할 뿐 더는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날 병원에서 나온 후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날 하루의 일이 내 기억 속에 없습니다. 아마 이런 염려스런 상황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조용히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혼자의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그저 희미한 기억 속에 만일 위암이 많이 진행되어 곧 아이들 곁을 떠난다면 어찌하나,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며 저리도록 아픔 심장을 부여잡으며 하나님, 이 아이들이 아직 너무 어리니 조금만 더 아이들 곁에 있게 해달라고 밤새 기도했던 것밖에는 기억이 없습니다. 그때 교수대 앞에 선 사형수가 된 심정이었습니다. 도망갈 수도 없고 다시 시작할 수도 없는…. 그저 목에 밧줄만 걸면 모든 것이 끝나는 죽음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느낌이랄까?
하지만 막상 죽음 앞에 서니 죽는다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 문을 열고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고 그동안 수없이 듣고 고백했던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천국이 준비되어 있다는 말씀이 확실히 믿어지며 내가 죽으면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갈 것이 믿어지니 그렇게 위로가 되고 마음이 안정될 수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살아온 삶이 너무 부끄럽고, 무엇을 하며 살다 왔느냐고 물으시면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하는 생각에 지난날들이 후회스럽고 안타까웠습니다.

죽음 앞에 서보니 이제까지 내가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고 가치를 두었던 것들이 실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내가 죽는 마당에 집을 가져갈 것인가, 돈을 가져갈 것인가, 화려한 보석과 액세서리, 지식 등 아무것도 죽어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없었고 그저 이제까지 살아온 나의 삶 자체, 그것만이 죽음 이후까지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며 긴긴 사흘을 지내고 아산 병원에 동생과 함께 결과를 보러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불행 중 다행이라 말씀하시며 초기이니 수술하면 괜찮을 것이라며 수술 날짜를 잡아 주셨습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이 종결된 후에 남편은 일본 출장에서 돌아왔고 나는 남편에게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매우 당황하며 함께 있어주지 못한 것을 너무도 미안해했지만 나는 지금도 생각하기를 그 사흘 동안 홀로 기도하며 생각할 시간이 많았던 것이 나를 더 강하게 하고 소중한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잠시의 평화를 깨고 우리는 또다시 위암이라는 놈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다음날 서점에서 위암에 관계된 책을 다섯 권이나 사들고 와서는 밤을 새워가며 읽고 인터넷을 뒤지며 정보를 수집하는 등 공부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위암뿐만 아니라 아직 해결되지 않은 사구체신염과 갑상선 항진 등 자가면역결핍으로 면역력에 체력까지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더 신경이 쓰였을 것입니다.

어느새 수술날짜가 다가와 입원하고 정밀검사를 받고 위 절제 수술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기도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수술도 잘되고 회복도 잘 되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뒤로월간암 2009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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