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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한 달, 가장 큰 힘은 의지!
고정혁기자2011년 04월 13일 09:36 분입력   총 886192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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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옥희 51세. 유방상피내암(0기) 이후 전이

2004년 8월. 유방암상피내암 진단 후 부분절제.
방사선 33회.
2005년 8월 간으로 전이.
항암 탁솔 6차.
2006년 8월 머리, 간, 뼈로 전이.

처음 유방암을 진단받고는 상피내암으로 가벼운지라 부분절제를 했다. 상피내암은 다른 장기로 이전이 되지 않는다, 암이긴 하지만 생명에는 직접적인 영향이 없는 암이라고 했다. 전이확률도 거의 없어 항암 없이 방사선만 33회를 하고는 암임에도 가벼운 마음으로 치료를 끝냈다.
그리고 3개월 후의 정기검진을 받았고 이후 만 1년 만에 간으로 전이가 되었다. 남편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펄펄 뛰었다. 상피내암인데 어떻게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느냐면서. 쫓아가 다그쳤더니 병원 과장은 나의 경우를 천분의 일이라고 했다. 오진 아니였냐고 해봐도 결국 환자나 보호자는 어쩔 도리가 없다. 제아무리 화를 내봐야 뛰어봐야 별수 없었다. 탁솔로 항암을 시작했다. 첫 항암이었다. 그런데 그 첫 항암으로 내 목숨은 날아갈 뻔 했다. 죽다 살아날 뻔 했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기본, 평균으로 하는 항암을 내 몸은 감당해 내지 못했다. 첫 항암주사를 맞고는 바로 백혈구가 20으로 떨어져 중환자실로 실려 갔다.
누구나 다 항암 표준량을 맞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후로도 암은 전이·재발을 계속해서 항암제를 여덟 차례 바꿨지만 내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양은 표준량의 70% 정도로 시작해야 쓰러지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다. 항암을 처음 맞는 분들에게 이 부분을 꼭 얘기해주고 싶었다. 나처럼 항암제를 감당하기 힘든 사람들도 많이 봤었기 때문이다.

이후 5년이 넘게 항암이 진행되었다. 탁솔 6차 하고는 내성이 생겨 허셉틴으로 바꿨다. 허셉틴은 9주 하니까 또 내성이 생겨 1년 사이에 항암 중에도 뇌, 뼈, 간, 유방까지 전이와 재발이 되었다. 동시다발성으로 암이 퍼져버렸다. 어깨뼈, 갈비뼈, 척추, 골반, 무릎뼈까지 모래를 뿌린 듯이 암은 퍼져나갔다. 그 이후 젤로다로 바꿔서 8개월을 하니 또다시 내성이 생겨 젬자로 7개월, 다시 내성이 생겨서 이번에는 항암을 좀 쉬고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두 달을 쉬니 암 표지자 수치가 21에서 750까지 무섭게 뛰어올라갔다. 그래서 다음으로는 1년 동안 임상실험과 탁솔을 같이 해서 상태가 호전되어 임상을 제외하고 1년 7개월째 탁솔로만 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지막 탁솔만을 남길 때 담당의는 임상을 포함해 항암을 너무 많이 그리고 여러 가지를 해온 터라 결과에 의아했었는데 예상 외로 상태가 너무도 호전되었다며 함께 기뻐해주셨다. 지금도 암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2006년 사방으로 암이 퍼져나갔을 당시, 치료를 받았지만 예상 수명은 한 달이었다. 머리로 퍼진 암 때문에 신경외과나 종양외과 선생님이 날 보러 와서는 손으로 보호자인 남편을 복도로 불러내곤 했다. 복도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나는 으레 나 얼마나 사냐고 묻곤 했고 그때마다 남편은 펄쩍 뛰며 무슨 소리냐고 절대 그런 말은 하지도 않았다며 당신 의지가 중요한 거지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없다고 말해주곤 했다. 내 짧고 짧은 시한부 인생은 직접 전해지진 않았지만 가족들은 알고 있었다.

2년인가 지나 살만해 보였을 때 시어머님이 털어놓으셨다. 너 한 달밖에 못산다고 해서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른다고. 시부모님이 말도 없이 병원을 찾아오신 적이 있었다. 당시 내 행색은 형편없었고 남편은 속 시원히 털어놓지 않으니 오죽 답답하셨는지 새벽 6시에 올라오셔서는 네 담당 선생님을 좀 만나야겠다는 말씀뿐이셨다. 그리고는 그해 종갓집 종손 며느리인 내 생일을 크게 차려주셨다. 집안 식구와 아는 친구들을 있는 대로 다 불러 모았다. 시댁과 친정 사람들, 심지어 조카사위까지 와서 나를 보고 갔다. 아버님은 내 묘자리까지 봐두셨다고 했다.

시한부 한 달 인생이 지금까지니 잘해왔다고 이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솔직한 심정으로 먹고 싶은 것 아무거나 먹고, 자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자고, 먹기 싫을 때 안 먹고 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 라면도 먹고 싶고 빵도 먹고 싶고 좋아하는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투병생활을 해야 하니까. 나는 결코 죽을 수가 없으니까. 아이들이 가장 중요했던 시기에 암에 걸려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첫애 고3에 암이 발병했고 둘째 고3이 되니 재발되어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었으니 무슨 뒷바라지를 해줄 수 있었을까.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은 이루 표현할 길이 없다.

내겐 대단한 목표는 없다. 단지 이 길고도 긴 투병생활이 빨리 세월이 지나길 바랄뿐이다. 얼른 우리 딸들 시집가서 엄마, 미역국은 어떻게 끓여, 김치 담아야 하는데 이건 어떻게 해 하며 물어보면 직접 달려가 해 줄만큼 건강하진 못해도 전화로 알려줄 수 있게 살아있어야 한다는 일념뿐이다. 하나 더 있다면 우리 딸들 아기 낳았을 때 꼭 산후조리를 해줄 것이다. 친정 엄마가 가장 그립고 손이 필요한 그때 아이들 옆에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지금은 죽을 수 없다. 내 생명의 끈이다.

그 일념으로 먹고 싶어도 손을 대지 않고, 자고 싶어도 몸을 일으켜 산을 오른다. 힘들게 등반하지 않고 혼자 가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남들은 외롭다고 하는데 사람들과 같이 다니면 남 쫓아가느라 정신없어 싫다. 내 페이스대로, 내가 버겁지 않을 만큼만 한다. 혼자 외길로 걸으며 박자가 맞는지 가사가 맞는지도 모르고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 제끼거나 관세음보살을 찾으며 기도를 내내 한다. 이상한 듯 쳐다보지만 내가 즐거운 걸! 남 보란 듯이 멋지게 태극권도 하고 산을 내려오면 네 시간 정도 걸린다.
태극권을 배운 것은 남편으로부터인데 15년 정도 전부터였지만 꾸준히 하지 않다가 투병하면서 다시 제대로 시작했다. 한 동작마다 12분 정도 걸리는데 단전호흡과 함께 기혈순환에 큰 도움이 된다.

나는 항암이나 약에 기대고 의존하지 않는다. 항암으로 효과를 보는 정도는 잘 들어야 15~20%라고 한다. 안 받으면 5%. 남편은 지금의 상황에 죽고 살기는 종잇장 한 장 차이이다. 다만 1%라도 있을 때는 해야 한다. 죽음의 기로에 15%는 큰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1%의 마음으로 항암을 하고 있지만 내 경험으로는 의지가 80% 이상이었다.

투병은 내 나름대로 원칙을 정해서 철저하게 한다. 매일 운동은 최하 3시간. 병원에서 치료는 받되 약은 먹지 않는다. 식사 이외의 식품은 만들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직접 채취해서 만들어 먹는다. 무엇을 먹든지 일단 시작하면 반드시 8개월은 복용하고 2개월은 쉰다. 누가 알려준 적은 없지만 항암을 수없이 하면서 내성이 생기는 것을 경험으로 터득한 내 나름의 방법이다. 꼭 먹는 것 세 가지는 옻물, 비타민 C 10,000ml, 소태환(소태나무열매로 만든 환). 청국장환, 생강·율무·율금가루 등.

투병생활 6년에 내린 결론은 제철 음식과 과일을 골고루 먹는다. 공기 좋은 환경에서 잘 먹고 물 먹고 운동 잘 하고 잘 빼내면 그게 보약이다. 직접 농사를 지어서 먹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여건을 갖춘 사람은 쉽지 않으니 할 수 있는 한 직접 채취하고 만들어 먹으며 같은 암환자들하고 요양생활을 하면서 지낸다. 다른 건 없다. 이 중 자기 의지가 가장 크다. ‘하면 산다. 누우면 죽는다.’

아침 5시 반 기상/ 프로폴리스 한잔/ 단전호흡 30분/ 옻물 한잔/태극권 체조와 몸떨기 40분/ 칡물 한잔/ 사과 한 개/ 태극권 2회 25분/40분 걷기 /

아침식사 고구마나 생야채/ 청국장환/ 율피 생강 율금가루 1티스푼씩
직접 채취해서 만든 분말 2스푼(뽕나무 민들레 익모초 취나물 질경이 쑥 씀다귀 도라지 다시마(시중)를 삶거나 말려 빻은 가루) / 직접 끓인 야채스프와 현미차
산행 4시간 정도.
점심식사 아침식사 후와 같음.
쑥뜸 후 휴식
산행 1~2시간 정도.
춤추기/ 뽕짝을 틀어놓고 모두 웃으면서 신나게.
족욕과 커피관장 일주일 3회
저녁식사 아침식사 후와 같음.
취침 10시.

뒤로월간암 201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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