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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관종으로 오진 받은 간암
고정혁기자2011년 04월 20일 18:34 분입력   총 891020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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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범호(54세) 간암 3기

내가 살던 곳은 부산이었다. 가족들은 부산에서 지냈지만 나는 직업이 건축계통이어서 외지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2008년 초에 배가 자꾸 아파서 병원을 찾을 당시에는 진주에 머물러 있었다.

진주 ㅇㅇ내과를 찾아 검사를 했는데 의사가 말하기를 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간에 5Cm 크기의 혹이 있다며, 하지만 혈관종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영 아프면 수술하면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암이 아니라지만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암, 암 해대니 혹시나 싶은 마음에 제대로 확인을 하고 싶다고 하니 의사는 순순히 정맥CT인지 뭔지를 찍어보자고 했다. 의학상식이 없으니 의사가 말하는 검사결과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마찬가지로 두 번째 검사에서도 5Cm내지 6Cm크기의 혈관종이라고 판독을 했다. 절대로 신경 쓰지 말라. 혈관종이니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세 차례에 걸쳐 확답을 내려 주었다.

그 때의 말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나는 안심했다. 예전처럼 일을 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일이 힘에 부쳤다. 기운이 영 나질 않고 술을 먹으면 다음날 일어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그 이외에는 딱히 다른 증상은 느끼질 못하고 생활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파서 병원을 찾은 후로 거의 일 년이 되어가는 때였다. 갑자기 오른쪽 배에 통증이 오기 시작하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숨 쉬는 것도 크게 쉴 수가 없었고 기침도 할 수가 없었다. 급히 부산의 병원을 찾아 의사에게 혈관종 판정까지의 경과를 얘기해주니 의사는 다시 CT를 찍어보자고 했다. 결과를 기다리는데 간호사가 오더니 보호자분 계시냐며 환자인 나를 두고 보호자를 찾았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가까이 사는 여동생에게 연락을 하여 정작 환자인 나를 체쳐두고 의사와 면담을 가졌다. 한참을 기다리니 여동생이 입원실로 오는데 얼굴 표정이 아주 어두웠다. 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정확하게 말해달라고 했다. 마음 단단히 먹으라며 의사의 말이 암이 9Cm나 된다고 했다. 등 뒤로 식은 땀이 주욱 흘렀다. 실제로는 이보다 더 큰 11Cm, 서울로 올라와 정밀 검사를 받은 최종 결과물이었다.

서울의 의사는 이렇게 되도록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전의 혈관종 진단 내린 서류를 보여줬다. 두 차례의 검사와 모두 혈관장 5Cm 로 판정내린 진단서와 CD였다. 분명한 오진이었지만 의사는 훑어보기만 할 뿐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행히 수술은 가능하니 일단 수술을 하자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간암 환자 중 수술이 가능한 사람이 백분의 20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수술을 위해 입원한 11층은 모두 절제술 하는 간암 환자였다. 그 곳에서 간 75%절제 수술하고 한달 정도 머물면서 처음 암을 접하고 많이 배웠다. 3개월에 한 번씩 검사를 받으러 오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지내는데 교회에 교인 한 분이 러시아로 일을 하러 다니는데 한 번 먹어보라며 액체로 된 차가버섯 엑기스 러시아산을 사다주셨다. 그게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차가버섯을 꾸준히 복용하고 있다.

서울로 올라와 정밀 검사를 받기 전, 처음 부산 병원에서 암이라는 걸 알고는 처음 혈관종 진단을 내린 진주의 병원에 확인차 전화를 했다. 여기서는 암이라고 하고, 거기서는 혈관종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으니 의사는 몹시 황당해하며 부산의 병원 이름과 의사 이름을 묻더니 그 의사와 통화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작은 크기도 아니고 5Cm 나 되는 크기를 엉뚱한 진단을 내려 일 년 동안 암을 키우도록 오진을 했으면서도 그 의사는 미안하다는 단 한 마디의 말이 없었다. 내게는 하나 뿐인 생명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다 싶었다. 수술하고 집으로 와서 요양하는 중에도 자꾸만 생각나고 화가 나서 진주로 찾아 갔다. 서울 병원의 차트와 의료기록을 모두 들고 가서 보여주니 의사는 자신은 잘못이 없다면서 오히려 환자인 당신도 잘못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어이가 없고 화가 치밀어 올라 소송을 걸겠다고 하니 마음대로 하라는 퉁명스런 대답이 돌아 왔다.

나는 혼자 진주법원으로 가서 고소장을 작성했다. 배상금으로는 삼천만원을 적었다. 혈관종이 아니라 암이었다는 것을 알고부터 수술대에 오르기 전날 밤에도 암에 대한 어떤 대책보다는 혈관종이 확실하고 전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단언한 의사의 목소리가 떠올랐고, 일 년 사이에 두 배 정도 커버린 암을 생각하면 속에서부터 뭐라 말 수 없이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대체 왜 그랬을까 궁금하기 한 복잡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사실 고소는 찾아가면서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내가 원한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한 마디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오진이었노라고, 당신에게는 정말 소중한 생명인데 의사로서 제대로 못 살펴줘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면 시시때때로 나를 괴롭히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앞으로 투병생활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환자의  잘못 운운하는 소리를 듣고 돌아서며 결심했다. 무엇이든 나로서는 매듭을 지어야 했다. 그래야 다음으로 넘어 갈 수 있었다.

법원으로 나온 그 병원 원무과장과 최종으로 합의를 보았다. 천이백만원이었다. 법원을 오가는 것도 힘들고 오진이네 아니네를 붙잡고 계속 있기보다는 몸을 보살펴야 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는 "혈관종"이라는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나로서는 노력했고 결과를 얻는 것이 중요했다. 마음이 편안한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다. 서울까지 병원을 다니기가 너무 힘들었다.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가 서울에서 일을 다니며 내 뒷바라지를 해주고 있다. 아내에게 그저 고맙고 미안할 뿐이다. 올해까지만 서울에서 살고 몸관리를 잘 해서 다시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갈 참이다. 암에 걸리고 나서야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다. 아무런 불평도 내색도 없이 늘 나를 지켜주는 아내,시간이 돌이킬 수는 없으니 앞으로 부족하나마 아내에게 보답하고 싶다. 아내여, 사랑합니다.

뒤로월간암 201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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