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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한 암환자입니다.
고정혁기자2011년 04월 26일 12:04 분입력   총 888581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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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정(56세) | 유방암

간에 5cm 크기의 혈관종 진단받다

2005년 8월. 오른쪽 유방암 2기. 2센티도 안 되는 작은 크기의 암이었다. 처음에는 가슴이 찌릿찌릿했다. 암은 잘 몰랐지만 두 아이 모두 모유로 키워 유방암 확률이 낮다고 했고 살이 찌거나 한 적이 없어서 건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다른 건 몰라도 유방암 걱정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만져보니 작은 콩알 크기의 뭔가가 손에 잡혔다. 부분 절제술을 하고 항암 6차, 방사선 34회를 받았다. 두 치료는 2006년 4월에 끝이 났다. 6개월 치료를 받았다.

이후로는 정기검진만 다녔다. 외과에도 가야하고, 내과에도 가야하니 거의 한 달에 한번 꼴로 다녀야 했다. 암에 대한 아무런 상식도 없었다. 가족, 친척에도 암환자가 없었고, 친구들에도 암환자가 없었다. TV에서 나오면 그런가 보다 하고 관심조차 없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암에 걸렸다고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처음 암이라는 걸 들었을 때는 마찬가지로 많이 놀랐지만 그 이후로는 거짓말처럼 나는 행복하고 만족스러웠다. 내 생에 다시 없을 만큼.

남편은 당시 자영업을 했었는데 암이라는 소리에 놀라 일을 그만두고 뒷바라지를 해줬다. 나는 행복한 암환자였고 무엇보다 행복한 여자였다. 단 한 번도 혼자 병원을 다닌 적이 없었다. 방사선 치료 받는 것 정도는 따라오지 않아도 되건만 남편은 지하철 공기가 좋지 않다고 꼭 차를 태워 데려다주고 손을 잡아줬다. 암에 걸렸는데도 너무 행복했다. 유방암 수술을 했으니 손을 쓰면 안 된다는 얘기를 듣고는 집안일도 일절 못하게 했고 목욕까지도 힘들다며 해주고는 했다. 시어머니까지 내 걱정에 집으로 오셔서 집안일과 음식을 맡아주셨다.
결혼하고 한 번도 쉬지 않고 직장일을 해야 했다. 직장생활에, 아이들에, 집안일에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바빴고 항상 주변을 돌보며 살아야했다. 그런데, 암에 걸리니 직장을 안 다녀도 괜찮았다. 시간도 많았고 남편과 가족 모두 나를 위해주고 걱정하고 돌봐줘서 암에 걸리기를 참 잘했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행복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참으로 짧았다. 2006년 4월 항암과 방사선 치료가 끝나고 6월 남편이 갑자기 다리가 몹시 아프다고 하여 검사를 해보니 담관암 말기. 치료 중이었던 3월 경에 남편도 암 검사를 받았는데 그때는 이상이 없었다. 찾기 힘든 암이라고 했다. 담관암에서 전이가 되어 전신으로 퍼져 발견된 것이었다. 평생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건강했는데 그래서 몸이 약한 나를 늘 애기처럼 보살펴줬는데, 말기암이라니…. 한 집안에 한 사람만 암환자가 있어도 하늘이 무너질 노릇인데…. 부랴부랴 수술을 하고는 서울대병원 입원실에 누웠는데 남편과 나, 모두 암환자였다. 누워있던 아내는 바로 치료가 끝나고 간병인이 되었고 너무도 열심히 간병하던 건강한 남편은 순식간에 말기암환자가 되어 내가 눕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었다.

주위에서는 몸도 생각해야 하니 간병인을 쓰라고 했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죽어도 같이 죽고 싶었다. 또 남편은 다른 사람의 손은 간호사라해도 질색을 하고 화장실만 가도 나를 찾았다. 그런 남편 곁을 떠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도 남편은 내가 간이침대에서 쭈그리고 자는 것이 힘들다며 좁아도 같이 있자고 하여 입원 침대에 같이 자곤 했다.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언제나 남편은 그렇게 다정했다. 하지만 남편의 암은 그렇지 못했다. 남편은 손을 써보지도 못한 채 그해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입원한 뒤로는 집으로 한 번도 돌아오지 못하고 병원에서 호스피스 병동까지 가서 너무도 허망하게 가버렸다. 다 할 수 없는 말들은 그저 가슴에 묻고 나의 고통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텅 빈 집에 홀로 남았다. 남편과 두 아이, 단란하고 행복하고 따뜻했었는데 너무도 춥고 외롭고 어두웠다. 암환자가 둘에 한 명은 떠났고, 첫째는 결혼을 해서 떠났고 둘째는 직장이 멀어 방을 구해 나갔다. 순식간에 혼자가 되었다. 자녀가 성장해서 결혼을 하고 직장을 갖고 분가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기쁜 일이어야 했다. 엄마가 되어 하나씩 챙겨주고 만져주고 기특해하고 그래야 할 일이었는데 내게는 암투병과 남편의 사별과 뒤섞여 정리되지도 않고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났을 때, 혼자였다. 네 식구가 직장을 다녀 아침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낮에는 각자 직장에서 보내고 저녁이면 네 식구가 모여 TV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욕실이며, 거실이며, 방마다 늘 들려오던 말소리, 부스럭거리는 소리, 씻는 소리가 어느 날 모두 사라져버렸다. 더 이상 여보, 엄마 나를 찾는 소리도 없어졌다. 고요하고 적막했다.

일 년을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빈 집에서 혼자 날마다 울기만 했다. 우울증이 극심하게 와서 병원에서 우울증 치료를 권했는데 보다 못한 친구들이 나를 밖으로 끌어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친구 손에 이끌려 그렇게 노래를 부르러 다니고, 산을 다니고, 웃음을 배우러 다녔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밖을 나오니 이제는 새벽같이 나왔다가 잠자기 전에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집에 있기가 싫었다. 요가든, 등산이든, 친구들과 놀든 낮에는 재미있게 지내다가도 저녁에 집에 들어가기만 하면 우울해졌다. 그래서 더 밖으로 돌아다녔다. 등산을 두 시간을 하고 적당히 피곤하면 그만해야 하는데 네 시간씩 숨이 턱에 닿도록 하고 일주일에 하루쯤은 집에서 쉬어야 하는데 쉬도록 내버려두지를 않았다. 그렇게 무리한 것이 암이 전이된 원인이었지 싶다. 암환자분나 가족들 보세요. 치료 끝나고 잘 먹고 몸이 좋아진다 싶으면 산이며 뭐며 다니는 건 좋은데 절대 저처럼 무리하지 마세요. 적당히, 늘 적당히. 조금 부족하다 싶은 게 과한 것보다 더 낫습니다.

4년 6개월 만에 뼈로 전이되었다. 정기검진을 다니고 작년 6월 뼈 스캔했을 때도 아무 이상이 보이지 않았는데 8월에 엉치뼈가 살살 아파왔다. 요가를 잘못해서 어디 삐끗했나 싶어 동네 정형외과를 찾기도 했지만 그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검사 결과, 골반과 간으로 암이 전이되었다. 작년부터 다시 7회 항암을 맞았고, 너무 힘들어서 먹는 약으로 바꿔서 올해 5, 6, 7월 3개월 먹고 있다. 덕분에 머리가 조금씩 자라고 있다.

전이 되고 다시 병원을 자주 다니게 되는데 갈 때마다 교수님이 이상하게 빈혈 수치가 안 좋다고 하셨다. 항암 할 때는 항암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약으로 먹는데도 수치가 더 안 좋아진다고 혹시 위에서 피가 새지나 않는지 확인해야 하니 내시경을 하자고 하셨다. 7월 19일 검사 보러 갔더니 교수님이 결과가 안 좋게 나왔어요, 위에서 암이 나왔어요 하셨다. 위암만 이었다면 절제술을 하겠지만 유방암이었으니 간단하게 그 부분만 떼어냈다. 그래도 생기면 고치고 또 조금 만져서 육 개월이든, 일 년이든 살 수 있으면 또 감사한 노릇이다. 위암을 떼어내고 나오니 기분이 참 좋고 날아갈 듯 하고 감사했다. 손 쓸 수 없을 지경에 발견된 것이 아니라 감사하고, 치료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감사할 뿐이다.

파란만장한 투병생활입니다. 지금도 내 몸에는 여기저기 암이 있어요. 어디서 또 생겨날지도 모르죠.. 내가 좋다고 이리 찾아오니 어쩝니까. 그냥 저냥 달래고 데리고 살아야지요. 지금은 지난 일도, 앞일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걱정을 한들 후회를 한들 달라질 게 없습디다. 아들에게 유언도 남겼고 집안 살림살이도 정리해뒀습니다. 내가 죽으면 사망보험금이 나오니 그걸로 정리하고 남편이 있는 납골당 2층이 싸니까 싼 곳에다가 해달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좋은 자리에 있어요. 아들은 무슨 소리를 하냐고 펄쩍 뛰지만 암환자든 아니든 피할 수 없는 길이잖아요. 잘나든 못나든 똑똑하든 아니든 누구나 다 갈 길인걸요. 두려워 할 일이 아닙니다.

누구도 미워하지 마세요.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해주세요. 암도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내가 내 관리를 못해서 몸을 망가트린 것이니 몸에게는 너무도 미안해서 기도하며 늘 미안하다고 말하며 만져줍니다. 암아, 너도 내가 죽으면 죽어야 하니 그러지 말고 조용히 거기 있어라 하고 말해줍니다. 노여워 마세요. 화내지 마세요. 그 사람이 아프거나 먼저 떠날 수도 있습니다. 암환자여도, 여기 저기 암이 있어도 사는 날까지 행복하게 웃으면서 살렵니다.

뒤로월간암 2010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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