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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과 같은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임정예(krish@naver.com)기자2016년 01월 29일 18:16 분입력   총 12280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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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법은 한 마디의 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당신은 암입니다.’

그 말을 듣기 전에는 지루하기까지 한 일상을 보내왔습니다. 직업인으로, 가장으로, 주부로 특별하지는 않지만 가끔씩은 소소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요즘처럼 연말과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들뜬 기분에 식구들이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소주 한잔을 기울이며 무난하게 지냅니다. 뉴스에서 나오는 온갖 불행은 모두 한 치 떨어진 남의 일로 나와는 무관한 소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암 진단의 한마디는 아픈 마법의 소용돌이 속으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나와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마법에 홀려서 모든 정신과 마음을 암이라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그 마법은 아주 지독해서 웬만한 정신력을 가지고서는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변에는 점점 마법의 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바로 암을 낫게 해주겠다는 사람들입니다. 병원이 아닌 곳에서도 많은 마법사들이 존재합니다. 법의 테두리에서 작용하기보다는 법 테두리의 밖에서 암을 치료합니다. 얼마 전에 뉴스에서 보도되었던 소금관장 목사의 이야기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유명인들을 동원하여 그들은 마법을 팔고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암환자들이 다시 건강을 찾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러가면 몸과 마음은 점점 더 초조해지고 절망스러워진다는 점입니다. 운이 좋아 다시 건강을 회복한다면 이제 다시 암과 친해지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시간이 지나면서 몸의 상태가 점점 회복하기 어려워진다면 우리는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그때 마음속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단어는 바로 ‘기적’입니다. 아주 깊은 수렁에 빠졌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기적을 원하게 됩니다.

처음 마법과 같은 암진단을 받고서는 충격에 휩싸였지만 시간은 모든 감정을 무디게 만들고 적응시키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그 시간의 길이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어떤 사람은 몇 달 만에, 어떤 사람은 일 년 만에, 또 어떤 사람은 몇 년 만에 정신을 차리고 기적을 갈구하는 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최악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마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는데 그분들은 너무도 안타까운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무엇 하나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남에게 의존합니다. 심지어 “밥과 함께 김치를 먹어도 됩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다시 되물어 봅니다. “진짜 몰라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참으로 간단하지만 암과 함께 투병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행여 김치가 암투병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봐 겁이 나서 그런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질문의 핵심은 모든 마음과 정신이 암에게 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잠을 자다가 가위에 눌린 것처럼 암이라는 밧줄에 꽁꽁 묶여 꼼짝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위에 눌려도 언제나 우리는 깨어나서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잠자리에 듭니다.

마찬가지로 암과의 투병도 언젠가는 끝이 날것이라는 희망과 의지를 갖게 될 때 기적은 서서히 찾아옵니다. 오늘 하루를 살았고 또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으니 기적의 시간은 계속해서 지나고 있습니다. 마법은 최면과 같아서 언제나 남이 나에게 말과 행동으로 마법을 겁니다. 애초에 마법에 안 걸리면 좋겠지만 암 진단으로 시작된 마법에서 헤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스스로의 능력뿐입니다. 나의 의지력으로 온몸의 기운을 손끝에 모아 꼼지락거려 가위에서 벗어나듯이 마법도 그렇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기적은 나의 내면에서 시작되고, 마법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거는 최면일 뿐입니다.

월간암을 발행하고 10년이 지나고 이제 내년이면 11년째가 되어갑니다. 1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암환자들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에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바로 마법에서 빨리 빠져나온다는 것입니다.

암환자에게 시간은 그 자체로 기적입니다. 하루, 한 달, 일 년의 시간은 일반인의 시간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더구나 마법에서 벗어난 맑은 정신의 시간은 꿀처럼 달콤합니다. 치료에 대하여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하고 인생에 있어서 주도권을 획득했습니다. 주변에는 아직도 많은 마법사들이 현혹하고 있지만 하루를 기적과 같은 시간 속에서 스스로의 주도권과 그에 대한 영역을 확장시켜 나갑니다. 올 한해가 그런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기적은 평범함 속에서 서서히 나타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적이야말로 오랫동안 우리에게 머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올 한해도 무탈하게 지난 것이 바로 기적이 아닐까요?
뒤로월간암 2015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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