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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vron_right그 때 위기의 바다를 건너던 때를 지나
이 글은 서지숙님이 2008년 03월 11일 12:14 분에 작성했습니다. 총 875369명이 이 글을 읽었습니다.

그 때 위기의 바다를 건너던 때를 지나

이 슬 기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직 후, 중간고사 기간이었을거다. 처음 그것이 손끝에 닿던, 커다란 위기감이 만져지던 그 날이 말이다. 여승은 죽을 때도 외로운 것인지 아니면 속세를 떠난 사람의 생이란게 원래 외로운 것인지 할머니가 두번째 중풍을 맞고 평생 자주 보지도 않은 아들집에 얹혀 꼼짝없이 식물인간 상태이셨던 그때였는데, 엄마의 가슴에 뭔가 아주 불쾌한 것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그 후 상황이, 뭐가 뭔지 잘 기억도 안날정도로 나는 얼이 빠져서 그냥 돌아다녔고, 아빠는 마음에 준비를 하라했고, 두분은 병원에서, 나는 혼자.

항상 할머니 곁에서 할머니를 주시하고 할머니 목에서 수시로 걸걸 소리를 내는 가래를 제 때 빼내드려야 했기에, 아빠의 중차대한 임무를 물려받아 작은아버지가 우리집에서 출퇴근하시고, 작은어머니가 가끔 들러 식사를 해결해 주시고 나는 수학학원에서 밤샘공부를 하고 집에 늦게 돌아가는 그런 날들의 반복이었다. 문득 생각나는 것은, 그 때 나는 술을 못마셨는데 꿀꿀한 기분이 들어서 전에 딸기맛 웰치스를 마시면 좀 취한다는 말도 안되는 아이들의 말을 기억해내고 밤길을 걸어오며 그 음료를 잔뜩 마셨던 기억. ‘뭐 하나도 안 취하네’ 하고 씁씁해 했던 기억. 언제나처럼 작은아버지에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나는 작은아버지가 입을 여는 순간마다 긴장했다. 행여나 나를 위로하려는 시도라도 하실까 겁이났다.- 내 방으로 아무 말 없이 쑥 들어갔던 기억. 그러고는 잠도 못자고 새벽 늦게까지 계속 영화를 봤던 기억. 그무렵 나의 창은 항상 불빛과 불안한 상념들로 어지럽게 일렁였다.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이었지만, 퇴원하고 집에 돌아 온 엄마는 엄청나게 피곤해져서는 약물치료나 화학치료를 병행하기 거부했다. 아팠으니 망정이지 아빠랑 밤낮 싸웠어야 맞는데 아빠는 엄마를 달래다 욱박지르다 지쳐 그냥 포기를 했고, 나는 뭐가 뭔지 몰랐으므로 만류하질 못했던 것 같다. 그저 엄마가 내 곁에 있는 것이 기뻤다. 환자가 많은 집의 당연한 식순처럼 할머니의 상태는 급격하게 악화됐다. 마지막에는 오늘, 내일 하셔서- 아빠 말에 의하면 할머니가 의식은 있으셔서 집에 뭔가 심상찮은 일이 있다는 생각에. 미안함으로 이제 그만 일찍 가시려고 했던거라 하셨다- 친척들이 다 집에 와있게 됐었다. 철모르는 사촌동생은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화학치료 후유증 때문에 벌게진 수술자국을 드러내놓고 맘껏 소리 높여 울지도 못하고 끙끙대는 우리 엄마를 구경이라도 난양 들여다보곤 했다. 그때는 나도 어렸었기에 그런 동생들의 호기심이 참을 수가 없어져 엄마가 몸을 뉘인 방문이 열고 닫힐때 마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니들은 저리가라고, 소리를 꽥꽥 질러댔다.

할머니는 결국 얼마 안되어 돌아가시고 우리집은 다시 단촐한 세식구만으로 고요해졌다. 다행이다. 그때 자칫 달랑 두식구가 될 뻔했다. 내가 살던 석촌호수 옆, 5층짜리 아담한 주공아파트가 재개발에 들어가기 직전에 아파트건물 중앙공터를 빙 둘러 심겨있던 벚꽃에는 유난스레 녹음이 풍성했다. 진물이 흐르고 얼기설기 꼬매놓은 것 같아 보기 괴롭던 엄마의 오른쪽 가슴은 느리지만 조금씩 아물어서 빨간 수술흉터만 선명했는데 그 모양이 왼 위쪽을 향해 머리를 틀고 비상하는 새 같아서 나무 잎새가 살랑거리는 창을 열어둔 채로 나란히 누워 그 뜨거운 상처를 어루만지곤 했다. 그렇게 엄마의 가슴에 난 상처를 만지고 있노라면, 문득 엄마로부터, 엄마에 대한 의존으로 부터 조금씩 떠나라고 하는 누군가로부터의 표식같기도 해서 참 맘이 싸해져왔다.

지금 그 창이, 그 산들바람이, 그 집이 다 무너지고, 그 아름답고 웅장했던 고목들도 뿌리 뽑혀 다 어딘가로 옮겨가거나 태워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새삼 다시하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가끔 암은 내 생애 가장 큰 축복이라 (말도 안되는!)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두 번째 절제수술 후 엄마랑 아빠의 모습을 지켜보면서는 그 말이 일리가 있구나. 싶었다. 두분의 닭살행각(?)은 도를 지나쳤고, 덕분에 수시로 구토증을 유발하는 말과 행위들을 피해 귀를 막고 눈을 감아야하는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행복에 겨운 투정임을...

엄마는 어느새 한예슬보다 예쁜 여인이 되어있고, 그녀의 발아래는 순종하고 복종하는
-머리가 하얗게 센-늙은 기사가 넙죽 엎드러져있다. 사실 지금도 어렵기가 한이 없고 지나 온 길이 험난했기에, 항상 가시덤불로 피투성이가 된 이미지로, 가족이란 단어가 내게 다가온다 해도 고비고비를 넘어 온 두 분의 관계에 대한 확신만큼은 이제 딸인 내게는 너무도 굳건하다. 무슨일이 있어도 항상 곁에서 보듬어줄 동반자가 있다는건 행복한 일인 것 같다.
함께한 모든 시간들로 다져진 두 분의 끈끈함과 다정함이 가끔 눈에서 불을 뿜을 만큼 부럽다.

확신하건대 인생의 문앞에 버티고 섰는 치명적인 그 어떤 일이라해도 받는 마음의 여하에 따라서는 그 장애물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건너가야 할 삶의 신비라고 조용한 소리로 들려주는 엄마의 삶을 바라보며 그 때 그 위기의 강을 함께 건너며 덩달아 훌쩍 커진 내 정신의 키를 가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