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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서지숙님이 2008년 06월 25일 00:43 분에 작성했습니다. 총 873745명이 이 글을 읽었습니다.

사랑을 잠글 수 있다면야

남산을 올랐습니다.
지금은 불타 버리고 없는, 황당하게 스러져 가버린 숭례문이 붙박이처럼 늘 거기 있을 줄만 알았었던 것처럼, 서울의 동서남북 어디서고 눈 들어 올려다보면 정물인 냥 늘 그렇게 거기 우뚝 하늘 쳐 받치고 있는 남산타워가 있는 곳. 남산을 올랐습니다.

가는 길이 쉽기도 하더군요.
충무로 대한극장 앞에서 노란색 남산순환버스를 타니 구불구불 남산외곽의 차도를 돌아 10여분도 채 안되어 금세 전망대 아래 우리를 부려 놓았습니다.
“소나무가 참 많기도 하네! 남산에 소나무가 이렇게 많았었나~” 새삼스레 발견한 사실에 짐짓 놀라며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애국가의 가사를 떠올려도 보았습니다.

언제런가 가만있자~ 딸애가 지금 만으로 스물하고도 두 살이 넘었으니 남산을 이렇게 찾은 지가 이십년이 훨썩 넘었네요. 그려, 결혼하기 전 화려한 데이트도 변변히 갖지 못하던 시절, 남산을 찾아 계단을 올랐었지. 어디서 봤는지 손에 아카시아 잎을 그러지고 나풀거리며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진 사람이 아카시아 잎을 하나하나 떼어내는 내기를 하며 하하 호호 웃었던 추억이 영화필름처럼 지나가더이다…….

남산타워 아래서의 저녁은 초여름도 가을 같더이다. 공중에 띄워놓은 설치작품은 마치도 부유하는 투명인간처럼 거칠 것 없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고단한 삶에 좆기고, 욕심에 눌리고, 분요한 일상에 치여 낭만과 여유를 저당 잡힌 채 참 재미없게도 살았네요. 우리.
뜻밖의 암초, 암이라는 고약한 친구에게 발목 잡혀 언뜻 뒤돌아보니 그렇게 그렇게 그 세월을 멋없이 가엾게 지나왔네요.(당신, 아시나요. 이말? 가엾게 지나왔다는 이 말!)
하여 기회가 주어지면 힘내어 미루지 않고 꼭꼭 챙기려 합니다. 일부러 피하지 않고 애써 외면하지 않고 맛난거 먹을 일 있으면 먹고, 좋은 거 볼 일 있으면 또 보러 가고 그렇게 오늘을 힘을 다해 참여하며 내 삶의 진짜 주인으로 살려고 무진 애를 쓰며 차박차박 갑니다.

초여름저녁, 가을바람이 귀밑머리를 매만지며 속삭입니다.
시와 음악과 좋은사람들과의 대화가 흐르는 황송한 자리에 이 저녁 저는 시간이동이라도 한 듯 고즈넉한 멋이 여인의 살풋한 향수처럼 매혹적인 이곳에 와있습니다.
절인 내 나는 속세와는 문풍지 한 장 차이 나는 듯 한데 이 곳, 지금 이 마음은 하냥 낙원인것만 같습니다.

남산타워아래 전망대의 철망에는 참 기이한 것들이 주렁주렁 셀 수 없이 많이 달려 있습디다. 자/물/쇠! 웬? 자. 물. 쇠?
하 하 하! 알고 난즉슨 연인들이 남산에 올라와 자신들의 사랑이 영원히 풀려지지 않기를 바라며 철망에 자물쇠를 잠그고는 그 열쇠를 전망대 아래로 알지 못할 곳, 찾지 못할 곳으로 휘익~ 던져 버린답니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 입만한 놈부터 코끼리 발만한 놈까지 크기도 모양도 가지각색이더이다.

당신, 음~ 사랑을 잠글 수 있든가요? 자물쇠로 잠가서 잠가지는 사랑이라면 어디 누구라서 아리랑고개를 넘어가겠는지요!
변하는 사랑에 믿을 수 없는 마음에 도장을 찍고 각서를 쓰듯 자물쇠를 거는 이 의례를 목격하니 시나브로 가슴 한 쪽이 싸아하니 허망해 지더이다.
남산전망대 철망에 기대어 아스라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들을 보며 지금은 가고 없는 노시인의 시를 읊조려 보았습니다.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_금아 피천득님의 시 ”이순간“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당신과 밤하늘의 별을 함께 올려다보는 이 순간.
잠든 아이의 착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가만히 이마를 쓸어 올리는 그 순간.
삶의 한 점 한 점을 쌓아 가는 이 순간이 생각해 보면 우주도 감당 못할 만큼 화려한 사실이라는 거_ 삶의 죽을 고비를 지나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투병생활로 몸도 맘도 괴로워질 때, 이제는 그냥 그만 애쓰고 싶어질 때, 당신은 무엇으로 다시 기운을 추스르고 다시 또 마음을 다잡으시나요?
내가 싫다고 밀어내는 내 삶의 이 자리가 바로 꽃자리라지요? 내게만 주어지는 금자리라지요! 허허.
사랑을 잠글 수 있다면야, 생명을 자물쇠로 꼬옥 잠글 수 있다면야, 그래서 사랑도 생명도 움직이지 않고 스러지지 않고 매양 그렇게 한 길로 흐를 수 있다면.
그럴 수 없는 삶이기에 남산을 오르는 행복한 연인들은 안타까운 소원을 담아 오늘도 자물쇠를 걸겠지요!

당신, 우리도 언제 하루 날 잡아 남산전망대 철망에 희망을 잠그러 가야겠지요. 튼실한 자물쇠 하나 철망에 걸고 꼬옥꼭 손잡아 맹세할까요!
회복하기, 우울해 하지 않기,약 잘먹기, 운동하기, 많이 웃기, 잠 잘자기, 자물쇠 잠그고 잘 지킬 수 있다면. 잘 살 수 있다면.


* 사진은 파일첨부한 이번것으로 해주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