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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암에서 기적 같은 희망을 바라보며
임정예(krish@naver.com)기자2020년 03월 13일 10:47 분입력   총 11672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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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임 |64세 자궁암

나는 서울 창신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냈다. 제주도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제주도 사람이 되었다. 단칸방 하나에서 시작한 결혼 생활은 어느새 40년이 다 되어간다. 그 시절, 가진 것 없는 우리는 너무나 가난했기에 억척스럽게 일했다. 남편은 성실했고 나는 식당을 운영하면서 제주도에서 나름대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그 사이 아들 둘은 잘 자라서 대학을 졸업하여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결혼시켰다. 우리 가족은 바쁘지만 행복했고 식당은 노력을 배신하지 않고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단란한 우리 가족과 많은 단골이 찾아주는 식당은 고단한 삶에 대한 보상이자 내 자존감의 근원이었다. 힘들어도 뿌듯하고 일이 고되어도 견딜 수 있었다. 암을 진단받기 전까지는.

자궁암을 진단받고 불과 2년이 흘렀을 뿐인데 그동안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죽음의 목전까지 몇 차례 다녀오기도 했다. 아직도 자궁암 말기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다시금 삶을 향한 희망을 불태우고 있다.

발병과 투병

2018년 여름이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주방에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20년 넘게 운영하던 식당은 언제나 손님들이 북적였기 때문에 아침에 눈을 떠서 밤까지 쉴 틈이 없었지만 주방은 나의 일터이고 내 일부분이었고 즐거움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아침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전부터 자궁에 염증이 있었고 몇 차례 치료를 받았는데 이상하게 불길한 느낌이 가시지를 않았다. 결국 식당에서 일을 하다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담당 의사는 자궁암이 의심된다며 큰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라는 것이다. 나는 순간 심장이 쿵쾅거렸고 눈앞이 아득해졌지만 큰 병원으로 가서 다시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자궁암 초기로 바로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의 말은 뒤통수를 망치로 강타한 듯한 충격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어떻게 해야할지 남편과 상의했다. 우리는 아무래도 육지로 가서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아무래도 육지의 경험 많은 의사가 수술을 더 잘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싶지만 당시에는 너무 마음이 급박하고 초조하여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의료진을 찾아 수술을 받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우리는 인천성모병원을 선택했고 수술이 끝나고 경과를 말해주었는데 좋은 내용이 아니었고 마음은 더 나락으로 떨어졌다. 초기로 알고 수술을 했는데 막상 열고 보니 병기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고 암세포가 매우 활동적이라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나에게 초기였으니 수술을 받으면 자궁암은 사라진다, 그리고 나면 이제까지 못했던 몸 관리를 잘해보자, 그러면 머지않아 건강을 되찾고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다독여줬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허황된 꿈이었다. 길고 긴 수술 후의 항암과 방사선 치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섯 번의 항암치료와 총 스물 네 번의 방사선 치료가 끝나고 나니 계절은 옷을 바꿔 겨울옷을 입고 있었다. 아, 이제야 암과 작별이구나 하며 행복에 잠긴 것도 잠시뿐이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나의 기나긴 고통의 나날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 겨울, 치료 후 내 몸의 암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너무도 행복했던 석달 후 정기 검진에서 암은 온 몸 여기저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짧았던 기간 사이 치료기간 억눌렸던 것이 폭발이라도 하듯 온 장기마다 퍼져 자리를 잡았다. 목숨이 바로 백척간두에 아슬아슬하게 서있었다. 병원에서는 이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항암 밖에 없다고 통보하듯 전했다. 망연자실한 채로 나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다시 입원하여 항암을 시작했다.

두 번째 사이클, 횟수로는 일곱 번째 항암이 시작되었다. 당시 입원실에 누워 항암제를 맞던 나는 병에 담겨 한 방울씩 떨어져 내 몸 속으로 들어가는 항암제를 바라보다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 나는 이제 살아서는 이 병원을 나갈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몸은 고통스러웠고 그보다 더 깊이 나는 좌절했다. 하루하루 죽음이 가까워오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항암이 거듭될수록 숨이 점점 가빠지고 기력은 쇠약해져만 갔다. 헛구역질이 쉬지도 않고 계속되어 식사는커녕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채로 병원 침대에만 누워있었다. 그렇게 여덟 번째 항암을 시작하면서 나는 비로소 죽음과 마주했다. 단지 내 몸뚱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티끌만큼 남아 있던 삶에 대한 갈구, 희망을 버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마지막 흔들리던 불꽃의 심지가 꺼져버린 어느 밤이었다.

나는 이제 죽는다. 살아서는 병원을 나갈 수 없다. 담담히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고 나니 항암 치료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만 두고 집으로 내려가자. 한편으로는 시원한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나는 집으로 내려왔지만 다 망가진 몸 때문에 여러 장치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음식과 물조차 먹지 못했기 때문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호스가 달려 있었고, 아랫배에는 뱃속에서 생기는 이물질을 밖으로 빼내기 위해 양쪽으로 호스 두 개를 외부 통로로 연결해 놓았다.

그렇게 지내던 중 배 양 쪽에 연결한 호스 중에서 오른쪽 호스가 빠져버렸다. 담당의료진에게 말하니 괜찮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로 두었더니 며칠 지나 그 호스를 연결했던 부위에 혹 같은 것이 생기더니 순식간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커졌다. 몸 밖에서 자라난 혹은 자궁 내막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고 그 모습에 나는 큰 충격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전에는 마음속에서 죽음을 인지했다면 이제는 내 육신이 죽음에 이르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말할 수 없는 충격과 절망이 엄습해왔다. 앞은 캄캄했고 통증은 시도 때도 없이 덮쳐와 나를 삼켰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프고 온몸 구석구석 저미듯이 아팠다. 특히 등 뒤 척추는 잘 드는 날카로운 칼로 긁어대는 듯 했다. 누울 수도 없고 앉아만 있을 수도 없었고 잠도 잘 수가 없었다. 해일처럼 통증이 덮쳐버리고 나면 나는 반죽음 상태가 되곤 했다. 그래도 마약진통제를 쓰면 세 시간 정도는 통증이 멈췄다.

그렇다고 병원에 다시 입원하고 싶지는 않았다. 들어가면 다시는 살아나올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전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고, 거듭된 항암 등의 치료로 몸이 나빠져서 결국 죽음의 문턱에 서 있었다.

무현 스님과의 만남

무작정 무기력하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암에 좋다는 민간요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소문에 의지할 수밖에는 없었지만 그래도 많은 암환자를 돌보고 있다는 어떤 사람을 찾게 되었다. 그곳을 방문해서 어떤 약을 주어서 먹고 있었다. 몇 번인가 방문했을 때 한 스님이 그곳에 와 있었다. 그 스님도 소문을 듣고 그곳에서 지어주는 약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려고 온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무작정 나는 그 스님을 본 순간 다가가서 살려달라고 사정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예의는 아니었지만 왠지 그 스님에게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애원하며 붙잡았다.

오랫동안 음식과 물을 먹지 못하고 살았다. 입으로 무엇이든 들어가기만 하면 계속 구역질이 나고 조금 먹는다고 해도 몸에서 받아들이지를 못했는데 스님이 그때 등과 배를 계속 문질러 주셨다. 한 시간 정도 마사지를 받는 동안에 헛구역질이 멈추고 통증도 점차 줄어들었다. 스님이 말씀하시길 이 정도만으로도 몸이 반응하니 아직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엉뚱한 곳에서 희망을 찾았다. 나는 스님에게 간절히 매달려 제주도 집 근처로 모셔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고 조금 더 지나서는 음식을 삼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배에 있는 암의 크기가 너무 커져서 생활하기가 너무 힘들어졌다. 병원을 찾다가 성남에 있는 한 병원을 알게 되었다. 의사선생님은 갖고 간 진료 기록과 검사 결과지를 보고 지금 내 모습을 살펴보며 상담을 하고는 눈물을 흘리셨다. 지금의 현대의학으로는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셔서 마지막 남은 시간을 가족들과 지냈으면 한다고 눈물지으며 말씀하시는데 그 목소리에 담긴 진솔함이 가슴 깊이 와 닿았다. 그리고 어떤 치료도 받지 못했지만 나는 너무도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어떤 의사선생님도 이분처럼 진실하게 상황을 말해주지도 않았고, 공감해주며 상담을 해주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의사선생님에게 존경심이 생겼고 감동과 위로를 받았다. 하지만 남편은 죽음을 기다리라는 말에 큰 충격을 받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일도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내 곁을 지켰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떤 치료도 할 수 없었고 받을 수 없는 처지였지만 스님의 돌봄을 받으면서 몸속의 암 성장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음식을 정말 조금씩이지만 삼킬 수 있게 되면서 기력도 되찾을 수 있었다. 스님을 만날 당시 자궁에서 시작된 암은 간과 폐, 뼈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암을 떠나 당시 내 모습은 누가 보아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고 알 수 있는 상태였다. 처음에는 암의 성장이 너무 빨라서 스님의 치유가 담긴 손길도 역부족이라고 느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암은 속도가 줄었고 몸은 점차 회복이 되어갔다. 어떤 의료 행위도 없이 스님의 마사지와 뜸, 그리고 건강 관련 음식이 전부였다. 칼로 긁는 듯한 통증은 거의 사라졌고 간혹 찾아와 공포를 선사한 호흡 곤란 증세도 멎었다. 고통 없이 숨을 쉴 수 있고 먹을 수 있게 되니 다 꺼진 줄로만 알았던 희망이라는 촛불이 다시 빛을 밝히고 있었다.

무현스님은 내게 도움이 될 건강식품을 알아보셨다. 나도 전부터 주변에서 좋다고 권하는 것들을 몇 가지 먹어봤지만 특별히 도움이 된다 싶지는 않았다. 효과보다는 부작용을 더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쏠투비 운모가루를 알게 되었다.

쏠투비 운모가루

무현스님이 이전부터 알고 지낸 지인이 카야니라는 건강식품 판매회사에 근무 중이었다. 나에게 도움될만한 것들을 찾던 무현스님에게 지인이 쏠투비 운모가루를 소개하며 구내외에 발표된 논문 자료를 건네주었다. 스님은 신중하게 검토하여 나에게 써보자고 권하였다. 그길로 서울로 올라가 쏠투비 운모가루를 한의원에서 처방을 받아 섭취할 수 있었다. 오늘이 쏠투비 운모가루를 복용한 지 42일째 되는 날이다. 무현스님의 보살핌으로 서서히 삶의 희망을 찾던 순간 이 약은 희망에 더 가속도를 올려 주었다. 고통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이 꿈만 같다. 그동안 잃어버린 생기가 몸속에서 물방울이 튕기듯 조금씩 생겨나는 것이 느껴진다. 쏠투비 운모가루를 먹고 30분이 지나면 아랫배에 크게 자리잡고 있는 암덩어리에게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미세한 전류가 흐른다. 암세포가 서로 싸우면서 생기는 현상인 듯한데 그 덕분인지 몰라도 아랫배에 크게 자리 잡은 암이 서서히 줄어드는 느낌이 들고 장기에 자리 잡고 있던 암들도 얌전해졌다.

음식을 먹으면 몸속에 있는 암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마치 내가 먹은 음식을 뺏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좀 지나면 암덩어리는 단단해지고 부어오른다. 그 때 쏠투비 운모가루를 섭취하고 시간이 좀 지나면 암덩어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부풀어 올랐던 혹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줄어든다. 한의원에서는 하루에 한 번이라고 했지만 최근에는 아침과 저녁 두 번을 섭취하고 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일어설 힘조차 없어서 하루 종일 누워서 보내야했다. 옆에서 간병하는 식구들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였지만 지금은 밖에 나가 산책도 하고 하루 세끼 식사를 챙겨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팔다리를 움직이며 춤인지 운동인지를 열심히 할 수 있다. 실컷 몸을 움직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면서 비관적인 현실이 견딜만하다고 생각이 들고 어디선가 용기가 샘솟는다.

마음은 항상 움직인다. 암에 걸리기 전에는 내 마음을 내가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마음은 내 의지와는 별개의 생물처럼 예측할 수 없이 모습을 휙휙 바꾼다. 희망에 가득 차 있다가도 순간 우울해진다. 안정감을 갖고 편안했는데 느닷없이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우울함이 찾아오면 나는 누운 채로 땅속으로 끝없이 끌려들어가는 느낌에 빠지곤 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식으로 몇 년 더 산다고 무엇이 더 나아질까, 가족들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고 끊임없이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땅속으로 잡아당긴다. 그러나 늘 다시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아직 나는 살아있다는 것’만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머지의 불안이 가져오는 것들은 다 거짓임을 순간마다 깨닫고 떨쳐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늘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자고 다짐하곤 한다. 믿을 수 없지만 현재 이 몸을 하고도 나는 간수치가 정상 범위를 되찾았다. 내 몸을 점령해가던 암의 성장 속도를 치유의 속도가 앞지른 것이다. 기적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나는 확신으로 바꾸고 싶다.

나보다 더 큰 고통 속에서 지내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모두 희망을 잃지 말고 함께 이 시간을 견디고 최선을 다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자. 이 땅의 모든 암환우에게 평안이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기도를 드린다.
뒤로월간암 202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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