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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이야기] 잊지 못할 그날!
고정혁기자2007년 12월 06일 15:52 분입력   총 878821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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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_51세 폐선암3기B


잊지 못할 그날! 2005년 11월 16일.
이후로 난 폐암 환자가 되었답니다. 정확히 하자면 검사가 끝난 11월 21일부터군요.
십여 년 넘게 꾸준히 수영을 하고, 매주 등산을 하고, 가정환경은 남들이 보기에도 최적의 환경에다 감기 한번 안 걸리는 차돌맹이 같은 쪼만한 아줌마였건만. 하루 아침에 폐선암 3기말이라는 엄청난 선고를 받고 눈물도 나지 않더군요.
폐암이라는데 어떻게 아무 증상 없이, 하다못해 가래 한 점, 기침 한 번 없을 수 있는지 기가 막혔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남편보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더군요.
전 암이라고 선고하고 이어서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의사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왜 수술을 못하느냐고. 의사의대답이 ‘암의 크기가 크고(약 5.7센티) 위치가 바로 대동맥 옆에 붙어 있노라고, 충분히 수술을 이길 것 같은 환자도 중환자실에서 못깨어날 수도 있다. 다른 방법이 있는데 왜 목숨을 담보로 하느냐, 그냥 항암으로 갑시다.’ 라구요.
네. 그럼 지금 이 순간부터 현대의학과 의료진을 믿겠습니다.
그렇구나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죠. 나는 살아야 한다 정신을 바짝 차리자 내인생 너무 순탄해서 브레이크 한번쯤 걸어주는 거야 저 병아리 같은 딸을 혼자 남겨두고 어찌 내가. 내 나이도 정말 너무나 아깝다. 혼자 되뇌면서 의사에게 병원 옆 미술관을 다녀오겠노라 허락을 받고 딸과 함께 바람을 쐬러 나갔죠.

돌아오는 길에 한만청교수님의 <암과 친구가 되라> 는 책도 사고. 그 다음날로 항암은 시작되었죠.
1차 항암주사를 맞고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부러울 게 없던 우리 세 식구는 암중증 환자와 가족이 되어 청주로 왔습니다. 다음날 바로 구토가 시작되었지만 집근처 종합병원에서 구토 억제 주사를 맞고 속을 가라앉히고 바로 그날 오후부터 걷기를 시작했답니다.
딸이 그랬어요. 엄마 지금부터는 면역력과의 싸움이야
이를 악물고 걷고 또 걸었습니다.
다음날은 조금 구토가 가라앉고 밥도 먹게 되어 집 옆의 산으로 등산을 시작했죠. 조금만 시장기 돌면 먹고, 먹고 나서 구토나면 토하고, 또 걷고 산에 오르고.
그다음 6차까지의 항암을 저는 다른 환자들보다 훨씬 수월하게 넘겼는데, 문제는 6차 마지막 항암에서 약이 듣지 않았는지 잘 줄고 있던 종양이 다시 조금 커지고-늑막쪽으로- 암수치도 199에서 237로 4차 항암때의  수치로 돌아가 버렸죠.

몸이 스트레스에 얼마나 민감한지 6차 항암 당시 시댁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딸애가 남편에게 그랬답니다. 봐라, 엄마는 앞으로 왕비로 살게 할 수 밖에 없다 아빠랑 내가 돈 벌어서 우리집 왕비 갖다주고  스트레스 받을 일은 아예 말하지 말라고. 이후로 저는 어설픈 왕비가 되었답니다.
6차 항암에서 문제가 생겨버리니 병원에서는 앞으로 항암은 안 하겠다 이레사로 처방 나간다 이런 수치에 너무 민감해 하지 마라는 조언과 처방을 들었습니다. 그때의 충격이라니. 처음 암이란 말을 들을 때보다 더 두려웠고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이게 마지막일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에 울컥하더라고요.
이레사 복용 4주후에 CT로 확인한다기에 무거운 마음으로 세 식구 병원을 나서고 딸애를 수원 직장에 내려놓고 내려오는 제 가슴은 병보다도 딸을 생각하면서 더 많이 울었죠.

남편과 단둘이 사는 집에서 정말 이 방법이 끝이라는 생각에 그 다음날부터 한 번도 먹지 않았던 당근쥬스를 마시고 아침 일찍 동네 산을 오르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이 숲이 나를 살려줄 것이라는 생각에 비가와도 우산을 쓰고 산을 올랐답니다. 음식도 조금씩 주의를 하였죠.
이전에는 그냥 잘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잘 먹었죠. 항암 후에는 스테로이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끝없이 당기는 식욕으로 얼굴은 빵떡처럼 부었고 목덜미는 어느 조폭의 목덜미, 배는 임신 7~8개월처럼 빵빵하고 가관이었죠.
매일 물을 많이 마시라는 딸의 성화에 물을 약 챙기듯이 마셨고. 매일 저녁마다 반신욕으로 땀을 흘리면서 노폐물을 밀어냈죠. 힘든 시기였답니다.
항암 부작용 말고는 아직도 병의 증세는 없는데 폐암환자라 하고... 가끔씩 혼돈이 왔죠.
설마 오진은 아니겠지? 우리나라대형병원 빅3의 한곳인데 하며 혼자 있는 시간에 가족 몰래 울기도 했어요.
왜 하필이면 나인가?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엄청난 병을 나이 오십 초입에 날 쓰러뜨릴까. 하지만 전 두 얼굴로 바로 눈물 닦고 친구가게로 놀러가서 실컷 떠들고 하하호호 배가 아프게 웃었답니다.

두부랑 콩으로 만든 음식을 주로 먹고 토마토쥬스도 의식적으로 챙겨먹었죠. 과일은 하루에 한두 가지 빠뜨리지 않았어요.
이레사 복용 4주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237의 암수치가 36.7로 내려가고 CT 상으로 종양도 푹 줄어버렸죠. 의사선생님의 표현이 통통하던 놈이 쪼글쪼글해졌다며 정말 좋아하셨어요.
다행히도 이레사의 대표적인 부작용인 피부발진도 전혀 없었고요. 정말 기적의 주인공은 멀리 있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수영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다시 이레사 처방을 받아서 다음날로 바로 수영을 시작했죠.
많이 빠지긴 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부기로 몰라보는 이들도 많았답니다. 실은 수영보다는 수영장 안에 있는사우나, 찜질방, 반신욕장 등 시설 이용이 주목적이었죠.

아침에 일어나면 당근쥬스 한잔 마시고 산으로 가서 한 시간 반 정도의 등산 후 아침식사를 하고 수영 후 점심식사 끝나고는 오후 6시까지 쉬었죠. 일반적인 집안일은 물론 혼자 다 했답니다. 한 달 후 몸이 가벼워짐을 느끼고 부기도 많이 빠지고 얼굴색도 많이 희어졌다는 소리도 듣구요.
검사결과는 더욱 좋아졌어요. 암수치 3.7에 종양크기도 조금 줄어서 2.2Cm 정도. 2박 3일의 외국여행이 괜찮으냐는 질문에 의사선생님 말씀이 6박 7일도 괜찮으니 다녀오라 하십니다.
우리 가족과 저의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건 압니다. 이렇게 쉽게 내 몸속에서 완전히 투항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요. 그러나 전 믿는답니다. 내가 꼭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모든 정성을 환자인 내게 다 쏟아 붓는 가족이 있고, 나날이 발전하는 현대의학이 있으니까요.

분명 어려운 길 위에 서 있음이 확실하지만 이겨내겠다는 데 암인들 질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조그만 덩어리 하나에 지지 않을 겁니다.
오늘도 전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첫째도 운동, 둘째도 운동, 셋째는 잘 먹고, 그 다음은 스트레스를 남겨두지 않고, 그 다음은 나의 승리. 하하.

겪어보니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모든 정보를 환자나 가족이 찾아내야 하고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은 이론에 병은 한 가지인데 약은 수백 가지에다 사기성 있는 메일에다 환자를 두 번 세 번씩 울리는 나쁜 사람들도 많더군요.
저는 아무런 대체요법도 하지 않습니다. 소화제 한 병도 병원 상담실에 문의했어요.
암 진단 이전에 먹었던 비타민제, 건강보조식품들도 모두 다 끊었어요. 이레사란 약만으로도 간에 엄청난 부담을 줄 테니까. 지인들이 사다준 버섯류와 온갖 항암효과가 있다는 것들 그대로 두었답니다. 이레사란 약마저도 필요 없어졌을 때 먹으려합니다. 제 생각이 맞는지 가끔씩 의문도 들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를 소화할 수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요. 

병원은 좀더 환자에게 암이란 병에 대해 정보를 줬으면 좋겠네요. 물어봐야 그제야 알려주는, 때론 마지못해... 참 그렇더군요. 그래도 전 의사와의 관계가 좋았습니다. 일단 제가 믿었어요. 의사를 믿는 것도 치료의 한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벌써 3년차가 넘어갑니다.
이 병만 물리치면 정말 전 왕비가 되겠죠?

뒤로월간암 200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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