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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이 사는법] 산은 근심도 아픔도 다 받아준다
고정혁기자2007년 12월 06일 23:06 분입력   총 880262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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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_올해로 마흔넷. 육종 4기.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살아왔나?
왜 여기에 서 있는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이었나?
내가 무엇을 하자고 쉴 틈조차 없이 여기까지 왔던가?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나?

2년 전(2004년 12월 17일) 겨울 혼자 S병원 벤치에 멍하니 앉아서 담배 한 개비를 피면서 내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가는 질문들이다.
아내와 중학교 1학년인 큰아들, 초등학교 5학년인 딸, 사고로 인하여 장애를 입은 5살 막내아들 원중의 걱정이 내 머리에서 혼란스럽게 빙빙 돌고 모든 등불의 전원이 순간적으로 Off되는 순간이었다.

육종 4기. 암 진단 확정 1년 전, 척추와 앞가슴의 통증이 계속됐다. 정형외과 5개월, 한의원 3개월 다녀도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칼잠을 잤다. 이리 잠시 누웠다 아프면 다시 돌아눕다 다시 옆으로 눕다 아파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탄식이 절로 났다. 암 때문인 것을. 척추(흉추) 5, 6, 7, 8번에 퍼져있는 암.

그 후로 진단을 받을 때 84Kg이던 체중이 걱정으로 인하여 15일 만에 입원당시 77Kg으로 떨어졌다.
수술은 못한다 하여 방사선 25회, 화학요법인 항암제 투여를 6 Cycle 중 5사이클까지 실시 후 오른쪽 눈 망막에 출혈로 인하여 중단, 7월 중순경 모든 치료를 마감하였다.
9월에 정기검진을 실시한다고 그때 보자고 하는 담당의사의 말을 듣고 병원을 나왔다. 이때 몸무게는 67kg. 항암제의 독성은 말하고 싶지도 않다. 생각하기조차도 싫다.

내가 산행을 시작한 것은 항암제 투여가 한창이던 4월경이었다.
육종. 원형세포육종암.
국내발병률이 1%도 안된다한다.
방사선 받고 뼈가 약해졌으니 허리에 보호대를 차라, 걷는 것도 조심해라 자칫하다 허리 무너지면 큰일이다 는 의사의 말을 뒷전으로 하고 나는 산을 다니기로 작정했다.
등산이라고는 88년도에 해본 것이 마지막인데, 어찌나 힘이 들던지 해발 610m인 청계산을 약 20번 정도 쉬면서 가까스로 올라갔다.
마땅히 어디 갈 곳도 없고 병을 얻은 후 다니기 시작한 사찰(청계산 소재의 청계사)과 청계산 등산이 주된 일과가 되었다.

2005년 9월부터 매월 약 20회~25회를 청계산을 오르내렸다. 눈감고도 오를 정도로 매일 가는 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오를 때마다 성취감이 다르고, 어느 산이든 정상에 우뚝 서 있으면,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불쑥 솟고는 한다. 지금도 매월 15회~20회 정도를 산을 다니면서 일과를 보내고 있다.

등산 시작한지 1년 4개월, 전국의 다른 산까지 포함하면 약 300여회는 산을 올랐다.

작년 겨울 어느 한 날이 떠오른다. 한참 혹한이던 12월로 기억한다. 청계사에서 사시예불을 마치고 배낭을 둘러멨다. 기념품 파는 매점에서 온도계를 보니 영하 7~8도 정도는 되었다. 오전 11시 30분경인데 자비 없는 추운 날씨다. 그날도 정상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늘 하던 대로 산행을 시작하였다.
정상까지는 약 3km, 산행시간은 약 1시간30분 정도 소요된다. 제 1전망대에 도착, 내가 매달아둔 온도계를 보니 영하 11도다.
바람은 그다지 불지 않지만 몹시 춥다.
정상에 올라가서 소리 한번 지르고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헬리콥터 장 한 곳에서 자리를 펴고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오가는 이는 별로 없었다. 이따금 지나가는 등산객.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불현듯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정상적인 몸이면 청계사에서 주는 따뜻한 공양을 할 텐데 식이요법을 하는 나로서는 사랑하는 아내가 싸주는 도시락이 전부다. 그래도 요즈음 도시락은 보온력이 좋아서 점심시간에 꺼내면 따뜻하니 먹을 만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양지쪽에서 도시락을 먹어도 겨울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반쯤이나 먹었을까 밥통을 잡은 손은 장갑을 끼고 들어 그런지 괜찮았는데 수저를 들은 손이 정말 시렸다. 호호 불면서 먹는데 따뜻하던 된장국도 차가워지고 먹기가 영 사나웠다.
일주일이면 4~5일은 여기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한숨 자고 하산 하곤 했는데 오늘따라 무척이나 추워 그런지 나도 모르게 왼손에 들고 있던 밥그릇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혼자서 소리 없이 한참을 울었다.
외롭고, 춥고, 쓸쓸한 점심. 이런 점심은 평생 처음이었다. 그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고 콧등이 시려온다.

직장인, 더구나 건축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은 고만고만할 것이다. 일주일에 서너 번의 회식. 담배 한 갑 반 내지 두 갑. 술은 소주는 2병, 양주 반병 안주는 주로 고기류.

2005년 1월 1일. 거짓말 요만큼도 안보태고 그날 집안에 있는 모든 조미료, 인스턴트, 과자, 흰쌀까지 모두 다 치웠다. 텅 빈 냉장고. 나의 식이요법은 간단하다. 그전에 먹던 것은 하나도 안 먹는다.
퇴원 후부터 온 가족이 현미잡곡밥으로 바꾸어서 먹기 시작하였다. 아내는 말없이 도움이 될 책을 구해 식단을 새로 꾸렸다.
'잘 먹자 먹는 게 남는 것이다' 주의였던 이전 밥상엔 이틀에 한 번꼴로 고기가 밥상에 올랐다.
돼지고기, 닭고기, 쇠고기, 생선, 등. 퇴근 전 아내에게 전화로 고기메뉴를 주문하곤 했는데, 지금은 아내가 현미를 직접 발아시키고, 7~8가지의 잡곡으로 밥을 먹는다.
그중 한 끼는 생식을 먹는데 생식도 직접 만들어 먹는다. 발아시킨 현미와 잡곡을 짜놓은 틀에 펼쳐 햇볕에 말려서 빻아둔다.

처음에는 목으로 넘기기가 어려웠다. 이제는 흰쌀밥은 맛이 없어서 못 먹는다.
야채는 약 30여 평의 밭에서 100%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어서 먹고 있다.
된장은 집에서 아내가 직접 담그고, 물은 유약처리하지 않은 옹기에 자석, 맥반석, 숯으로 정화시키는 옛날 방식으로 먹고 있다.

검사결과는 점점 좋아졌다. 혈액은 깨끗하고 암수치도 정상, 암도 줄어 이제는 방사선 받은 자리만 보인다.

식이요법과 등산이 내게는 가장 큰 힘이다. 아직 끝을 말하기엔 이르지만 그래도 꿈꾼다.
먼 훗날 빛바랜 추억의 앨범을 넘기듯 웃으며 두런두런 지금을 이야기 할 날들을….

뒤로월간암 200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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