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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이야기] 캠프를 다녀와서
고정혁기자2008년 01월 26일 20:07 분입력   총 878261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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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 | 유방암 3기로 힘겨워하던 동생에게 산행의 즐거움을 알려주었습니다. 든든한 언니이자 보호자이며 가장 큰 원군입니다.


“언니! 약초나 버섯 같은 거, 판매하는 건 아닐까? 직접 재배한 무공해 채소로 식사하고 황토방에서 잠자고 뜸뜨고 웃음치료하고, 그 회비로는 턱도 없을 것 같은데?”
캠프에 참가하자는 내 말에 동생은 대뜸 대꾸한다.

그렇다 한들 물건은 안사면 그만이고 우리 둘이 계절의 끝에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캠프에 참여했다.
그리고 돌아와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작년 12월. 꼭 1년 전에 내게는 더 없이 소중한 동생이 유방암 3기라는 진단을 받았고, 그 후 우리에겐 엄청난 일들이 펼쳐졌다.
그것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누구나 처음엔 그렇듯이 ‘암’이라는 진단 앞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 나만? 이라는 물음에서 헤어나기 힘들다.
동생은 거의 5개월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책 읽기는 물론이고  그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았다.
자기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아무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았다.
동생이 자기보다 훨씬 더 심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 투병하고 있는 환우들을 캠프에서 만난 것이 지난 1년 동안 수백 번도 더 떠들었던 내 얘기보다 효과적이었으니 진단 받은 지 한 달도 안 돼 캠프에 참여했던 윤형은 얼마나 현명한 사람인가?

담배 한 대 피워본 적이 없다는 마흔 살의 건강한 남자가 어느 날 후두암이란 청천벽력같은 얘길 듣고도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억울함과 분노에 싸여 허우적대고 있을 시간에 암환자센터를 찾고 캠프에 참여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결국은 본인의 선택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겨내며 투병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현명하게 투병에 임하고 이겨낼 것인가 고민하다 참여했다는 윤형은 반드시 투병에 성공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건강한 몸으로 2살짜리 예쁜 딸과 지난 40년보다 더 행복하고 가치 있는 제2의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캠프에서 우린 참 많이 웃었다.

동생은 지난 일 년 동안 이렇게 많이 웃어본 적이 없다며 즐거워했다. 드라마나 소설보다도 더 기가 막힌 상황인데도 모두가 큰 소리로 웃었다.
너와 나 모두 하나가 되어 큰 소리로 떠들고 웃으며 뒷산에 오르던 일이며 웃음치료 시간 어설픈 게임을 하면서 바닥을 뒹굴며 웃던 일,
산야초 강의시간에 산으로 들로 다니며 풀의 효능을 듣고 하나라도 더 배우고 하나라도 더 뜯겠다고 추위도 아랑 곳 없이 논둑을 헤매던 일,
말벌집을 찾은 것이 무슨 큰 보물이나 되는 양 끌어안고 사진 찍느라 소동 벌인 일,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시내까지 나가 조개며 생선 간식꺼리 사 들고 얼굴도 안 보이는데 별 세어가며 구워먹고 떠들던 일,
한 시간 넘게 쭈그리고 앉아 황토방 아궁이에 맛있게 구워주신 군고구마 먹으며 듣던 힘든 투병기는 가슴 아팠지만 누군가 던지는 사소한 농 한마디에 모두 웃고 또 웃었다. 그 시간만큼은 암은 사라지고 없었다.

돌아가고 나면 환자인 자신을 간호하다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있는 남편이 기다리고 있다는 암환자 아주머니에게 앞으로 다가올 시련이란 짐작조차 되지 않지만 모두 그때는 철없는 아이처럼 웃었다.
네 마음 내가 알고, 내 마음은 네가 알고 있으리라는 환우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유대감이 가능하게 했던 시간이었다. 이제 고스란히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모두의 가슴에 따듯하게 자리했으리라.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우는 거라고 했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하고 학식이 높은 사람도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일 수밖에.
스스로를 자기 안에 가두고 혼자 투병 하다가 실패하는 환우들을 많이 보았다는 얘기를 듣고 정확하게 알고 함께 정보를 교환하며 본인이 확신한 다음 하나씩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들도 투병중인 환우들이 운영위원이 되어 물심양면으로 애쓰고 있었다.
건강한 사람이 봉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만약 일반인들끼리만 운영하는 곳이라면 환우들이 지금처럼  ‘공감’ 할 수 있었을까?

본인도 통증으로 한 손에 침을 들고 다니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던 김 대표님의 말이 생각난다.
나도 암환자라고 얘기하는 순간 모두 형제가 되고 사랑하는 가족이 된다던 말! 캠프를 다녀온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캠프에서 만났던 환우들을 생각하면 가슴 깊은 곳에서 아릿한 아픔이 출렁대고 따뜻한 마음과 정 가득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리워진다.

나는 이번 캠프를 다녀와서 많은 것을 느꼈지만 특히 가족의 의미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극한 정성과 사랑으로 보살펴주는 가족들이 곁에 있다면 무섭고 어두운 긴 터널도 무사히 잘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동생도 요즘은 처음 진단받고 우왕좌왕하는 환우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갖도록 편지를 쓰며 작은 사랑을 나누고 산에도 매일 다니며 자연의  매력에 푹 빠져 지낸다. 작년 이맘때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병원에서 수술조차 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도 용기를 잃지 않고 소신과 확신을 갖고  투병하고 있는 환우들을  만난 이후에 동생은 큰 힘을 얻었고 결코 돈이 많아야만 투병할 수 있다는 생각도 달라졌다.
물론 돈은 꼭 필요하다.
꼭 필요하긴 하지만 돈이 없다고 투병에 실패하진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욕심을 버리고(일, 자식, 돈 등) 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 확신을 갖고 자연 가까운 곳으로 다가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식주를 자연에 가장 가깝게 하는 것이 못된 병마를 이기고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음을 깨달았으니 자매끼리 둘만의 추억 말고도 얻은 것이 너무 많다. 64살 서운하기 그지없는 나이에 지병으로 떠나신 엄마가 자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더 낫다.’ 이 말은 시대에 뒤떨어지긴 하지만 아마도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서 말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이제 추운 겨울이다.

맘대로 산과 들로 돌아다니기도 어려운 계절에 환우들은 특히 건강에 주의해야 할 것 같다. 활기찬 봄날 다시 시작되는 캠프에 참여해서 민들레, 엉겅퀴, 익모초, 쑥도 캐면서 산야초 향기에도 푹 빠져보리라.

모든 환우들에게 본인이 감당해 낼 수 있는 만큼만, 꼭 그만큼만 시련을 주셨으면, 하고 오늘도 엎드려 기도한다.

뒤로월간암 200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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