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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편지] 뒤늦은 후회
고정혁기자2008년 01월 26일 20:10 분입력   총 877711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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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 올 가을 유방암 진단받은 아내를 도와주지도 못하는 ‘못난 남편’


당신이 암 진단 받는 날, 내게 하늘은 어둠으로 캄캄하고 천둥번개가 치고, 폭풍우가 몰아쳤어.
꿈이었기를, 한바탕 악몽이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 그날 밤,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독한 술을 들이켰어. 한심하게도 술 이외에는 현실을 지울 수 있는 길이 없었나 봐.

살아오면서 무엇이 그리 바빴을까, 겨울날에 부츠 한 켤레, 목도리 하나 사려고 함께 다니질 못했어.
당신은 말없이 착하기만 한 아내였는데 그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어. 언제까지나.

당신이 암 진단을 받은 이후, 한동안은 억 겁의 시간을 산 것처럼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회사 밖을 나와 덕수궁 길을 몇 바퀴나 돌곤 했어.
우리가 함께 손잡고 걸었던 곳, 14년 동안 잠자고 있던 그 시절, 나는 멀쩡하게 여기에 있는데 어째서 당신만 망가졌을까,
나와 함께 살아서 망가진 걸까, 내색 없다가 드문드문 아프다 말하는 아침에 이마 한번 짚어주지 않은 채 아프다고 하지 말고 약 사다 먹어, 내던지듯 대꾸하곤 돌아서는 내 뒷꼭지에 와 닿는 당신 멍한 눈길을 왜 한 번도 돌아봐 주지 않은 걸까, 당신 그래서 망가진 건가.

“당신이 이리 할 줄 알았으면 진작 암에 걸려볼걸.”

바람찬데 산보 간다 해서 서둘러 두꺼운 외투에 목도리로 칭칭 감아주니 당신이 그랬어.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 아무 말 못했어. 항암치료로 민머리가 되고, 구토에 손발 저림에, 얼마나 힘들어 했는데.
그깟 옷 좀 챙겨준 걸로, 그래봐야 저린 손발 주물러 주는 걸로 바꾸려 하냔 말이다, 이 못난 사람아. 내 얼마나 오죽잖아 이렇게 당신을 초췌하게 작게 만들어 놨을까.

나한테 시간을 좀 주라. 우리 신혼여행 갔던 제주도에 다시 가서 그때와 똑같이 지내보고 싶어.
그때 당신한테 약속했는데,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비싼 보석, 비싼 옷은 못 사줘도 마음고생 안하게 좋은 남편 하겠노라고.
그 헛된 약속을 이번에는 지킬 수 있게 부디 시간을 줘. 아~ 왜 이리 어리석은 것일까. 놓치고 나서야 귀한 게 품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되다니.
하늘이 내게 두 번씩이나 기회를 줄까. 당신은 두 번째 기회를 줄까.

다른 건 몰라도 하나만은 약속할게. 기회만 주어진다면 같은 실수, 같은 후회는 하지 않을 거야. 그것만은 믿어줘.

뒤로월간암 200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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