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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일기⑥]되찾고파, 잊혀진 초심
고정혁기자2008년 04월 05일 19:42 분입력   총 878514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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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섭(74) | 식도암과 갑상선 아래 전이된 림프절 치료 중. 비절제 식도암 생존율 0%라는 비정한 숫자를 도전으로 2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2007. 1. 4(목)
또 2회 더 추가된 방사선 치료

안용찬 교수님과의 면담 결과 방사선 조사를 두 번 더 추가하게 결정되었다.
결국 20회라는 숫자를 채우는 교수님의 과감한 결단이다.
말이 20회이지, 하루 조사선량이 300선량으로 20회면 합이 6,000선량이다. 재작년 35회에 걸쳐 총 6,300선량을 쬐었던 선량과 맞먹는 어마어마한 선량이다.

두 번 더가 아니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연장하여 내친김에 목의 림프절을 박살내버리고 싶은 마음이야 교수님이 더 할 거다.
그러나 환자가 아무리 견디어낼 수 있다 하더라도 현재의 방사선 조사량이 관행적 처치를 벗어나 있는 상황이라 교수님 고심도 이만저만이 아닐 거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환자를 위태롭게 할 소지가 있는 일은 의사로서 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래 죽나 저래 적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마음으로 강청했던 제 2차 방사선 조사가 교수님께 받아들여졌던 것만 해도 나로서는 감지덕지다.
마음 속 깊이 고마워하며 나머지 두 번을 치료받을 것이다.

아직도 다 못 타버린 암세포들의 찌꺼기가 남아있다면 마지막 두 번의 치료로 꼭 씨를 말려버리고 말 것이다.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 꼭 그렇게 될 것이다. 꼭….


2007. 01. 11(목)
미리 걱정은 하지 말자

총선량 6,000cGy를 쬐었는데 부작용이 없을 리 없다. 그래도 지난 1차 때보다는 덜하다.
그땐 항암주사와 병행되었었기에 초죽음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나 이번은 방사선만의 조사였기에 1차 때에 비하면 견딜만하다.
가장 힘든 일이 어지럼기와 무기력 증세다.
가끔가끔 졸도 직전까지 이르러 외출하기가 두렵다.
이 증상은 1차 때에는 없었던 것인데 웬일인지 모르겠다.


2007. 02. 01 (목)
회복된 체중

2차로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심하게 닥쳐올 부작용을 무척 겁먹었었다.
그런데 부작용이 심하지는 않아 오히려 의아스럽다.
우선 밥 먹는데 지장이 없고, 밥 잘 먹으니 살이 빠지지 않고, 살이 안 빠지니 다리 힘이 줄지 않아 걸어 다니는데 지장도 없다.

밥을 잘 먹다보니 엉뚱한 걱정거리가 생겨버렸다. 실은 몸무게가 암 발병 이전의 체중으로 회복되어버린 것이다.
57~58Kg이 평상 체중이었다. 지금은 그와 맞먹는 55.7Kg이다. 작년 최저점 42.7Kg에서 열 달 만에 체중이 회복된 것이다.

체중이 느니 얼굴도 훤해져 암이 완치라도 된 듯 아내가 제일 기뻐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식도암 환자는 노인들의 병인데 노인들의 체중 증가란 근육질 세포의 증가가 아니고 과잉 섭취한 탄수화물이 당화되어 포도당으로 흡수되고 과잉 흡수된 포도당이 지방으로 전화되면서 창자사이에 지방 덩어리로 저장되는 것이 아닌지….

지금 뱃속에 기름 덩어리들을 잔뜩 불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체중은 증가되었지만 다리에 힘은 안 붙어 아직도 걷는 일은 어렵고 고통스러울 뿐이다.
다리에 힘은 없는데 몸무게마저 늘고 있으니 걷기가 더욱 힘들어지는 꼴이다.

체중 문제 말고는 목 부위에 통증이 있다는 것만이 2차 방사선 치료의 부작용인 듯하다.
목 부위 통증은 참을만한데 그래도 아플 때는 시도 때도 없이 바늘로 찔러대는 날카로운 아픔 때문에 진통제를 사용해왔다.
처음에는 먹는 약으로 몰핀 썰페이트를 처방 받았었는데 엊그제 붙이는 진통제를 새로 처방 받았다.
림프절의 아픔과 그 영향으로 퍼지는 방사통은 날이 갈수록 약해지는데 그와 반비례하게 우측 쇄골 부분 피부가 쓰리게 따끔거린다.
방사선에 피부가 타버렸다는 이야기인가보다. 피부가 타버린 것만큼 전이된 림프절도 완전소멸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완전소멸 즉, 완전관해가 아닐까. 제발 그리되어 다오.


2007. 02. 08 (목)
소강상태

방사선 치료 때에는 치료에 앞서 반드시 종합병기를 진단한다.
두 번에 걸친 치료가 있었으니 두 번의 종합병기 판정이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1차와 2차 때의 종합병기 판정은 다음과 같이 달라져 있었다.

1차: T₂, N₁, M₁...... Stage:4a
2차: To , N₁, M₁...... Stage:4a

위의 병기에서 M₁을 소멸시키기 위해 방사선 치료를 받은 것이 이번의 2차 치료였다.
이미 종양(T-tumour,식도암)은 소멸상태로 되어 있으니 전이(M₁)만 Mo로 된다면 ‘암 뗐다’는 결과가 될 것인데….

우측 쇄골 언저리의 통증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다만 그 범위나 강도는 하루하루 조금씩 덜해가고 있다. 진정 단계에 접어든 느낌이다.
이제 진통제는 쓰지 않고 있다. 얹힌듯한 식도의 답답함도 덜해가고 있어 직경이 굵은 태브렛이나 캡슐도 억지로나마 삼킬 수 있다.

특이하게 나빠지는 것이 없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물론 경과시간으로 보아 방사선 폐렴이 나타날 때가 된 것이 염려스럽지만 방사선 폐렴도 1차 방사선 치료 시 경험한바 있어 그 대응 방법도 알고 있으니 큰 걱정은 안한다. 올 테면 오라다.

문제는 전이된 림프절을 과연 모두 태워버렸느냐다. 좋은 결과가 안 나온다면 그동안 헛고생한 셈이 된다.
길이냐 흉이냐, 그 판가름은 일주일 후로 예약되어 있는 CT 촬영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동안은 하루하루 마음의 도나 닦고 있어야지.

 

2007. 02. 12 (월)
새벽에 찾아 드는 손님

불에 타듯 따끔거리게 아프던 우측 쇄골 부위 피부의 통증이 하루하루 엷어지고 있다.
방사선 부작용이 이제는 가라앉기 시작하나 보다하고 좋아하고 있는데 묘한 통증이 새로 그 자리를 메우려 두더지 머리 내밀듯 밀어대기 시작한 것 같다.

까맣게 잊고 있던 식도점막염. 음식은커녕 물도, 침도 삼킬 수 없던 그 식도점막염!

방사선에 타들어 신경말초들이 울부짖느라 진통제를 가슴에 붙이고 그것도 모자라 몰핀 썰페이트정을 함께 복용해도 아픔을 잊을 수 없었던 생지옥의 식도점막염.
지긋지긋했던 그 식도점막염이 다시 생겨가고 있는 것이다.
2차 방사선 치료는 중격동 림프절에 초점이 맞춰졌던 것이고 식도암은 내시경 사진에도 흔적이 안 나타나는 깨끗함을 보였던지라 식도염이란 부작용은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 식도염이 다시 나타나다니…. 방사선 종료 후 한 달이나 되어서….

방사선의 위력인가? 통과의례인가?


2007. 02. 19(월)
되찾고파, 잊혀진 초심

“식도는 이상 없고요. 폐암은 이것이 아직 그대로 있지만 다른 것들은 조금 작아진 것도 같습니다. 문제의 림프절은 반 정도로 작아졌어요. 이렇게 경계가 불분명한 것은 아마도 암세포가 혈관을 생성시켜 림프절 밖으로 나가 있었던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나로서는 아주 만족스런 결과를 얻었어요.”

CT 영상화면을 일일이 뒤적이며 친절하게 설명해준 안용찬 교수님의 결론이다.
되도록 내색하지 않으려 했었지만 내 기색은 실망에 차서 시무룩해져 있었던 것 같다.

반이란 게 무엇이고 좀 더 지켜보자는 것은 무엇이냐. 나는 완전관해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부분관해인지 완전관해인지 어쩐지는 림프절 속의 조직을 검사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지금 현재로서는 그런 검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석 달 후에 다시 CT 촬영해 보고 이상이 없으면 또 석 달 후에 PET검사를 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현재 나로서는 만족스런 결과를 얻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내 방사선종양학과 권위자의 언명인데도 나는 계속해서 시무룩해 하고 있었다.

신의 손길 같은 재능으로, 비절제 식도암을 말끔하게 치유시킨 손으로, 아주 작은 림프절 하나를 케이오 시키지 못하고 겨우 반이라니, 내내 아쉽고 실망스러웠다.
남아 있는 림프절 속에 괴멸시키지 못한 암세포가 남아 있다면 얼마 후에 그놈들이 다시 꿈틀거리며 재발이란 독소를 뿜어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오랫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였으나 그 미소는 분명 밝은 미소가 아니고 슬픔을 간직한 서글픈 미소였을 것이다.
진정 고마운 마음으로 밝고 부드럽게 웃었어야했거늘….
비록 낙담이 가슴 밑바닥에 깔려 있다하더라도 그토록 나의 일에 정성을 기울여 준 의료진이었으니 정말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는 미소여야 했다.
아직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인간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라는 못난 늙은이가 거기 있었다.

몇 달의 연명도 덤으로 얻은 삶이라고 감사해왔었고, 2006년 한 해를 성공적으로 보내게 되어 감동의 눈물까지 흘렸던 일들이 값싼 감상적 반응일 뿐이란 것인가.
처음 암 치료를 받으면서 모든 일에 감사하자던 초심을 벌써 잃었단 말인가.
암이란 것이 한 늙은이의 인간완성의 계기가 될 수는 없단 말인가.
과욕을 부린 기대감은 무엇이며, 또 곧바로 낙담의 구렁으로 몸을 내맡기는 경박함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70여 평생을 못나게 보람 없이 살아온 나에게 말년만이라도 국화꽃처럼 좋은 향기를 풍기며 최후의 날을 맞아보라고 암은 찾아들었나보다.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보자 했던 암 발병 당시의 초심을 제발 잃지 말자.
모든 것에 감사하고 모든 사람에게 밝은 미소 보낼 수 있는, 향기 나는 그런 노인으로 거듭나보자.
나아가 올 해는 모든 식도암 환우께 위안을 보낼 수 있는 국화꽃 향기 나는 노인과 그런 최후의 모습이 되어보자.

뒤로월간암 2007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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