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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이 사는법]킬로만자로를 딛고서다
고정혁기자2008년 04월 08일 17:12 분입력   총 879733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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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준 | 42세. 위암4기

내일이면 나는 아프리카 땅을 딛고 있을 것이다. 어릴 적 소풍가기 전날이 이러했을까. 잠은 안 오고 정신은 점점 맑아온다.
공연히 일어나 꼼꼼히 챙겨놓은 짐을 새삼 들추며 빠진 것이 있는 냥 하나씩 만졌다 넣는다. 내 인생이 이렇게 달라질 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등산화라는 신발은 40이 넘어서 처음 장만했다.
그것도 2년 전 8월 위암4기 진단. 위 전체를 들어내고 임파선도 떼어내고 항암 3회로 내 몸은 무너져 내렸다.
말 그대로 KO. 넉 다운. 더 항암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병원을 나와 나는 무슨 결심으로 산으로 기어 올라갔을까. 기어 올라갔다는 표현은 말 그대로다.

위를 들어내고 미주신경까지 닥닥 긁어낸 내 몸은 몇 걸음에도 휘청거렸다. 평지도 걷기 힘든데 나는 산으로 산으로만 고집을 부렸다. 두 발이 아니라 네 발로 기었다.
그때 옮긴 한 발자국 자리마다 땀 한 방울, 눈물 한 줄기가 핏빛으로 배어 있으리라.
하늘이 노랗고 입술은 타들어가고 빈혈로 하늘이 빙그르르 돌면서 산을 배웠고, 인내를 배웠고, 찰나 속에 영원이 깃들여있음을 배웠다.

 

생(生)이 온통 바늘 박힌 썩은 동아줄일지라도, 그리하여 움켜쥔 두 손이 송곳에 찔려 피가 줄줄 흘러도, 절대 놓치지 말고 꽉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고, 더 이상은 할 수 없으리라 절망의 꼭대기에 서 있다 여겼는데 희망의 봉우리가 저 위에서 또 나를 부르는 소리도 들었다.

백두대간 종주할 때, 작년 백두산을 등정할 때도 사람들은 일 년도 채 안 됐는데 이렇게 산을 잘 타느냐며 놀라워했다.
빙긋이 웃으며 “감사합니다” 한다. “내가 위암환자요, 위는 몽땅 없소” 이 말은 속으로만 한다.
사람들이 달리 대하는 것도 싫고 암환자요 하고 내세워 도움 받는 것도 싫어서다.

위암 진단 받고 딱 일 년. 나는 아프리카 킬로만자로를 오른다.

항상 마음속에 그리던 아프리카!
아프리카의 지붕!
세계 최고의 화산 산!
만년설로 덮여있는 킬리만자로!

그래! 가는 거야!
아프리카 킬리만자로로 나는 간다!

무엇보다 가장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던 것은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어서였다. 그 다음은 5,000m 이상의 고산에 도전해 보는 것이었고, 그렇게 더 높은 곳으로의 비상을 꿈꾸고 싶었다.

킬로만자로 등정, 그 5일간의 일정을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2007년 2월 15일 밤 10시 35분

인천공항을 출발 중간에 상해를 경유하여 카타르 도하(2007년 아시안게임이 열린 곳)까지 13시간이 걸려 도착. 도하공항에서 환승 후 이륙하여 케냐의 나이로비 공항 착륙. 약 23시간이 걸렸다.
드디어 아프리카에 왔다!
그동안 기내식을 네 번이나 먹으며 Economy class의 좁은 공간에 앉아 자다 먹다만 되풀이했다.


2007년 2월 16일

케냐 나이로비 공항 출발.
이제 케냐와 탄자니아 국경인 ‘나망가’까지 가서 ‘아루샤’로 가야 한다.
도로는 포장이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초벌 포장만 하다가 그대로 둔 채 공사를 끝낸 것 같은 좁은 도로다. 성능이 좋은 것 같지도 않는 차는 잘도 달린다.
이 넓은 땅덩어리에 이리 저리 비켜서 길을 내지 않아도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거의 직선으로 도로는 뚫려 있었다. ‘아루샤’에 있는 임팔라 호텔에 도착하여 아프리카에서의 첫 꿈을 꾼다.


2007년 2월 17일

산행 시작점인 마랑구 게이트(1,900미터)에 도착하여 산행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던 포터들과 만나 입산신고를 하는데 1인당 하루 입장료가 70달러(한화 7만 원정도)다.
우리가 산에 머무르는 기간이 6일로 1인당 420달러를 지불해야 한다. 이제 본격적인 출발.

메인 가이드인 리차드의 뒤를 따라 "폴레폴레"(천천히 천천히).
정말 하산까지 폴레폴레(천천히 천천히)와 잠보(안녕)를 수천 번은 들은 것 같다.
가이드보다 앞서 나간 자, 반드시 고소병에 걸리리라.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숲길을 하염없이 올라간다. 즐거운 마음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간다.

만다라 산장(2,700m) 도착.
오늘의 숙박지 만다라 산장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다. 영국 트랙커 100명, 일본 트랙커 20명 , 대한민국 18명이다.

 

2007년 2월 18일

만다라 산장 출발. 오늘의 목적지인 호롬보 산장까지는 5시간 정도 걸린다.
산장의 해발이 3,720m이기 때문에 빨리 올라가지 말고 천천히 가이드가 걸어가는 속도에 맞춰 뒤따라가야 한다.

가는 도중에 Maundi crater(마운디 분화구) 갈림길이 나오고 거기를 잠깐 들렀다 가자고 한다.
분화구치고는 자그마한 분화구를 둘러보고 다시 내려와 이제는 열대우림이 아닌 시야가 탁 트인 길을 올라간다. 오늘도 경사는 심하지 않고 꾸준히 오르는 길이다. 호롬보 산장 도착.
이정표에는 5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 고소증에 대비하여 일부러 천천히 올라 7시간정도 걸렸다.


2007년 2월 19일

오늘은 고소적응을 위한 4,200m 정도까지 산책을 다녀오기로 했다. 아침식사 후 마웬지봉 쪽으로 올라갔다가 어느 정도 높이가 되면 내려오기로 했다.
특이하게 생긴 바위가 나타는데 그 앞에 얼룩말 바위(Zebra rock)이라고 쓰여 있었다.


2007년 2월 20일

호롬보 산장 출발. 오늘은 키보산장까지 가서 이른 저녁식사를 하고 잠깐 눈 붙이고 12시쯤 산행을 하기로 했다.
키보로 가는 길은 멀리까지 길이 훤히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시원스럽게 뻗은 길 위에 띄엄띄엄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 그 또한 시원스럽기도 한 장관이다.
키보산장(4,703m) 도착. 7시간이 걸렸다.

머리가 약간 띵한 것이 고소증세가 오는가 보다. 우리 일행 모두들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지는가 보다.
침낭을 힘들여 꺼내고 무거운 백을 치우고 정리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띵하며 속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한다. 얼른 침낭을 펴고 누워 컨디션을 조절해 보지만 영 안 좋다.


2007년 2월 21일

23시 50분 키보산장 출발. 기온이 영하 20도. 정말 미치도록 추웠다.
고소내의, 그 위에 우모복, 그 위에 고어자켓까지. 얼굴은 싸고 또 싸고 눈만 나오도록 했는데도 아프도록 춥다.
가파른 길을 가이드를 따라 오르는데 그 추위에서도 이놈의 잠은 왜 이리도 오는지. 산소가 희박하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잠이 들면 그대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웬 숨까지 이리도 가빠지는 거야.

06시 30분
길만스 포인트(5681미터)라는 팻말이 서 있다. 이젠 정상인 우후르피크(5,895미터)까진 2시간이다.
발끝 손끝이 시리다 못해 감각이 없어졌다. 고소증때문에 헛구역질이 계속 나왔다. 정말이지 창자가 올라오는 것처럼 엄청난 고통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왔나, 내려가고 싶었다. 눈물 콧물 뒤범벅이다. 숨은 차서 다섯 발자국 띄고 한 번 쉬어야 했다.

눈앞에 정상이 보였다. 일순간 찌릿 온몸에 전율이 왔다. "해냈다" 정말 "야호"였다.
그러나 소리를 지를 힘도 없었다. 사진 몇 장 찍고 하산길을 서둘렀다.
화산재로 덮인 하산길을 스키 타듯 미끄러져 내려왔다. 정상에서 키보산장(4,700미터)까지 2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정말 순식간에 내려왔다. 키보산장에서 서둘러 호롬보 산장(3,700미터)으로 하산했다. 일 미터라도 내려가야 고소에 시달리지 않는다. 호롬보 산장에 오니 4시 30분. 11시 50분에 출발하여 거의 17시간을 걸었다.

정말 긴 여정이었다. 내 생애에 언제 다시 아프리카에 올 수 있을까. 또 다시 올 수 있다는 기약도 없이 아프리카를 떠났다.
안녕! 검은 대륙 아프리카여!!!

 

올 3월 15일. 병원검사 결과를 통보받았다. 피검사에서부터 PET까지 모두 검사한 결과 깨끗하다. 모두 정상 판정이다. 이제 일 년은 보장받은 셈이다. 앞으로 일 년 뒤를 계획한다.

유럽의 최고봉 엘브루즈(5,642m). 동으로는 카스피해 서로는 흑해 사이에 위치. 러시아와 그루지아 국경, 카프카스 산맥에 위치하고 있다.
고소증과 무시무시한 추위로 산을 오를 땐 이렇게 힘든데 왜 올라갈까 하는 생각뿐인데 내려오자마자 또 다시 오를 산을 찾아 놓고 나는 행복감에 젖어있다.

나를 보고 힘을 얻는다는 어느 환우분의 목소리가 저장되어 있다가 힘들 때면 자동 재생되어 돌아간다.
이제는 나 하나만의 목숨이 아니라는 책임감이 훈장처럼 어깨에 달려 있다. 기왕이면 제대로 해내고 싶다. 보잘것없지만 다른 환우들께 힘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일 년 후 다시 엘브루즈 등정기를 올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환우님들. 일 년 후에 뵙겠습니다.

뒤로월간암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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