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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일기⑦]거듭나야 할 투병노력
고정혁기자2008년 04월 10일 15:03 분입력   총 880269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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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섭(74) | 식도암과 갑상선 아래 전이된 림프절 치료 중. 비절제 식도암 생존율 0%라는 비정한 숫자를 도전으로 2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2007. 2. 26(월)
거듭나야 할 투병노력

십이일 전 검사한 CT 결과지 결론 부분이다.

CONCLUSION:
1. Decreased size of metastatic lymphadenopathy in right highest mediastinal area.
2. No change of tiny nodules in both lungs since 2006/11/2.

결론:
1. 종격동 우측 최상부에 있는 림프절 병증의 크기가 줄어들었음.
2. 2006년 11월2일 이후 양쪽 폐의 작은 결절들은 변화가 없음.

괴사된 림프절 크기가 줄었고 폐 속 작은 점들은 지난 11월 CT 결과와 변동이 없다는 것이다.
necrotic lymph node라는 판정이지만 문제는 림프절 속의 암 세포들이 완전 괴사된 것인지 아닌지를 판정하기는 곤란하다.
차트 상 방사선 치료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니 그 과정을 고려한 관념적 표현으로 necrotic(괴사성의)이란 판정이라면 그것은 환자인 내가 곤란하다.

이상은 제2차 방사선 치료의 총결산인 것이며 나에게 주어진 투병의 입지조건을 밝혀주고 있는 내용이다.
넘어야 할 언덕을 넘지는 못했으나 바로 그 언덕 앞에 와 있다는 말이다. 넘어야 할 언덕이 바로 눈앞에 있으니 더욱 정신 차려 투병을 더욱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다. 사정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더욱 열심히 하기는 하겠는데 어떤 방법으로 투병을 해 나아갈 것인가가 새로운 문제다. 살아온 대로, 해온 대로 그냥 그렇게 지내야할 것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새로운 방법을 택해야 할 것인지….

살아온 대로 산다는 것은 아무래도 걸리는 문제가 있다. 나름대로 식이요법을 지켜왔다 하지만 결코 완전한 식이요법이 아니었다.
문제는 두 가지. 첫째는 설정한 가이드라인이 과연 더 따질 수 없을 만큼 바람직스런 것이냐, 둘째는 가이드라인을 완전히 지켰느냐는 것이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늘 말만 식이요법이었지 실제 내용은 흉내만 낸 것 같은 엉터리였다.
한 번쯤 어쩌랴하는 마음으로 먹고 싶은 것은 영락없이 먹었다는 것이 정직한 이야기다.
하나마나식의 식이요법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식이요법, 웃음치료, 운동 등등 이런 모든 것이 따지고 보면 부교감신경을 자극시켜 체액 개선과 면역력을 높이기 위함인데 자신을 속이고 달래고, 이런 식으로 정직한 부교감신경이 과연 자극을 받아 이 몸속의 면역력을 높여 줄 것인가, 한심스럽다.
림프절의 재발과 전이 그리고 새끼 폐암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 거듭나는 노력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2007. 3. 6(화)
묘한 일

아무리 생각해도 묘한 일들이다.
림프절 통증은 이제 안 나타나고 방사선 부작용 통증도 많이 가라앉아 요 며칠은 지난 1년 반 동안에 처음으로 통증 없이 지낼만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얼씨구 좋아할 만한 날이 이어지고 있는데 마음은 무거워지고 있다. 울적해지는 것이다.
딸아이는 아빠 봄 타느냐고 물어왔다. 평생토록 봄 탄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왔었는데 묘한 일이다.
죽을 고비는 이제 넘겼고 수명이 조금 연장되었으니 여러 가지 경험을 더하고 떠나라는 자연의 조화인가. 꼭 우울증에 가까운 나른함 속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묘한 일이다. 내 마음 나 몰라다.
묘하다 생각하면 암환자에게는 참으로 묘한 일들도 많은 것 같다.

[부작용과 후유증]

항암 부작용 중에 발가락과 발바닥이 마비되는 부작용이 있는데 살짝 마비된 오른발 발가락들이 전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해가는 것 같다.
항암 수주 완료가 지난 해 3월 25일 이었으니 경과 일수로 꼭 1년이 되어간다.
부작용이 이렇게도 오래 끄는 것인가. 선험자들의 체험을 듣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마비가 시간 경과와 더불어 과연 사라져 줄 것인지, 영영 굳어지거나 더 심해져 가는 것인지 듣고 싶다. 이 증상은 부작용이 아니라 후유증으로 오래오래 아마도 이 세상 하직하는 날까지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인지….

부작용이란 약물 투여를 중지하거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이토록 오래 지속되고 더 심해질 징조가 있는 증상들은 부작용이 아니라 후유증이다.
언제까지나 남는 증상들을 후유증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묘한 일은 병원 쪽 설명도 부작용으로 되어 있고 약품 설명도 부작용이라 부른다.
후유증이라 하면 환자들이 겁내기 때문에 말장난으로 얼버무리는 것일까. 묘한 일이다.

[사레]

수술을 하던가,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겪고 나면 식도암 환자는 너 나 할 것 없이 사레드는 일로 고생을 겪게 된다.
예외는 없는 것 같다. 식도의 탄력성 상실 때문에 기도마저 영향 받아 기도를 막는 밸브 작동이 불완전해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 같다.
사레는 자칫 흡인성 폐렴을 유발하게 된다.
폐렴이 되면 항생제를 계속 쓰게 되고, 항생제를 계속 복용하다보면 백혈구를 비롯한 면역체계 기능저하가 뒤따르니 암과의 싸움은 더 더욱 힘들게 된다.

고형물 사레는 거의 없고 액체 사레가 잦은 편이다.
사레에 안 걸리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 방법이 좀 묘하다. 목을 길게 빼고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수그린 상태에서 물을 마셔야한다.
ET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세다. 사관생도와는 정반대 자세다. 깜박하고 맥주 들이키듯 시원스럽게 물이라도 마시다가는 사레들기 쉽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묘한 일은 침을 삼키다가 침마저 사레가 들리는 현상이다.
평생, 시도 때도 없이 마셔온 침이다. 침마저 ET모양으로 마신다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가끔 침 마시다가는 깜짝 놀라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침 사레, 안 겪어본 사람들은 웃어버릴 것이다. 허풍 떤다고. 나조차 꼭 허풍 떠는 것 같은 묘한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체중 증가]

암에 걸리기 전 체중은 평균 57Kg이었다. 오늘 56.2Kg. 체중은 회복된 것이다. 다만, 쭈그러진 얼굴, 가냘파진 팔다리, 얇아진 가슴팍은 옛날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체중 증가란 배에 고이기 시작한  지방덩어리 무게일 거다. 항암과 방사선 때문에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을 때의 최저 체중은 43.3Kg이었다.
만 1년 걸려 체중이 회복된 것이다.

몸무게 늘리겠다고 애쓴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늙은이가 몸무게 늘려봤자 근육질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기껏 뱃살이나 불릴 것 같아 빠진 체중을 그대로 지키려고 음식을 되도록 적게 간소하게 먹어왔었다. 그런데도 세월 따라 기름덩이는 고이도록 되어 있나보다.

오늘은 11시 경 아침 겸 점심 소위 브런치를 들었는데 메뉴가
15곡 잡곡밥 70g, 데친 브로콜리 한 덩어리 30g, 구운 마늘 다섯 조각, 생미역 30g, 청국장찌개(두부 5조각, 배추 몇 가닥 포함) 반 대접.
이렇게 밥까지 포함해서 5가지이다.
오후 두 시 무렵 날고구마 주먹만 한 것, 한 개가 현재까지 먹은 것의 전부다.

지난 여섯 달 동안 거의 같은 음식만 먹어왔었다. 분량도 음식 종류도 그게 그것이다.
청국장찌개마저 소금기가 없어 처음엔 못 먹겠더니 습관이 되니 이젠 간 있는 청국장은 짜서 못 먹을 정도다. 날미역조차 그냥 먹는다.
사람의 식사는 아닌 것 같은데 미각을 망각하고 식성을 탈출하고 나니 이젠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그냥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이런 걸 도통이라 하나보다.

그래도 동물성 단백질 섭취를 위해 한 달에 꽁치 한 마리, 고등어 한 마리, 생태 한 마리는 먹는다. 육류는 전혀 한 입도 안 넣어왔다.
그런데 참으로 기묘한 일은 소금기를 끊는 식사를 하면서도 더러더러 새우젓의 새우 댓 마리는 맛본다. 그 다섯 마리가 어찌나 맛있는지….

이렇게 밖에 안 먹었는데도 체중이 회복되고 배가 나오고 있다니 묘한 일은 묘한 일이다.
아마 어쩌면 녹즙 탓인지 모르겠다. 녹즙만은 참으로 열심히 마셔왔다.

생강 10g, 양파 20g, 레몬 4분지 1개, 사과 반 쪽, 당근 200g, 샐러리 한 대(약 120g)
이상 여섯 가지는 필수 기본이며 여기에 갓, 비트, 깻잎, 양배추, 연근, 우엉. 미나리, 돌미나리, 유채(하루나)등등 계절 따라 많이 나오는 야채를 두 가지 이상 섞어왔다.
신선초를 비롯한 소위 녹즙용으로 특별 재배된 품목들은 몇 번인가 시도하다가 중단했다.

녹즙에 대한 나의 견해는 평생 먹어온 야채들을 녹즙이란 형태로 많은 분량을 먹겠다는 것이다. 한 번 마시는 녹즙의 분량은 300cc 에서 350cc 이다.
녹즙만 마셔도 배부른 것이다. 식사 30분 전 쯤 마시니, 그 후 작은 양의 밥이지만 먹고 나면 배부르다.
그러니 나의 체중 증가는 녹즙 때문인 것 같다. ‘녹즙 배’라는 것도 있는 것일까. ‘녹즙 배’는 올챙이배. 묘한 식성으로 되어버렸다.


2007. 3. 8(목)
안 아프니 그게 이상하다

늘 어딘가 아프다가 전혀 아픈 것을 못 느끼게 되니 기분이 묘하다. 오히려 허전하다.
호주 시드니 사는 딸에게 매일 보내는 쪽지 속에 오늘 처음으로 무통증 이야기를 보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아마  딸이 제일 기뻐해줄 것 같다.


딸에게
무척 바쁜 모양이구나.
아빤 하루하루 좋아지는 것 같다. 다만 이 암이란 것이 하루 이틀에 판가름 나는 것은 아니고 몇 년을 내다보아야하는 몹쓸 병이니 참 기가 막힌다. 자연수명도 다 되었는데 암 고치겠다고 몇 년을 내다보다니….
이삼일 전부터 통증은 거의 못 느낀다.
지난 일 년 반 동안 단 하루도 아픔을 모르고 지낼 수 있었던 날이 없었는데 그래서 어딘가가 못 견딜 정도로 통증을 느꼈었는데 그것이 다 거짓말 같다.
통증을 못 느끼니 오히려 허전하고 정신이 나갔는지 멍하게 그냥 있다. 꼭 바보 천치가 된 기분이다.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런 생각만 하고 있다. 안 아프니 도리어 그게 이상하다.

다 네 덕이다. 정말 고맙다. 엄마도 그동안 무척 속 썩혔을 거고….


통증을 못 느낀다는 것과 몸속에 병이 있다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겉으로 안 보인다고 하지만 식도를 안 잘라냈기에 언제 재발될지 모르는 일이고 폐 속의 새끼 암들은 아직 아무런 조치를 안 하고 있으니 언제 진행성으로 변하여 증식을 거듭할는지 모른다. 게다가 방사선 폐렴도 나타날 무렵이다.

더욱 더 조심히 투병 룰을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뒤로월간암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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