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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일기⑧] 고기가 먹고 싶어 죽겠어요
고정혁기자2008년 07월 31일 16:30 분입력   총 879454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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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섭(74) | 식도암과 갑상선 아래 전이된 림프절 치료 중. 비절제 식도암 생존율 0%라는 비정한 숫자를 도전으로 2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2007. 3. 21(수)
고기가 먹고 싶어 죽겠어요

2차 방사선 치료를 마친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목소리가 미세하나마 하루하루 풀리고 있다. 아직도 쉰 소리가 나고 알아듣기 힘들지만 목에 힘을 주지 않아도 소리는 나온다.

방사선 벼락 맞은 림프절이 하루하루 퇴축되어 가고 있다는 증좌다. 완전히 풀릴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림프절이 완전 퇴축될 날도 머지않았다는 희망으로 통하는 증좌다. 안용찬 교수님의 정성들인 작품이고 방사선종양학과 모든 분들의 노고의 결과다. 두고두고 잊지 못할 고마운 일이다.

T 。 N 。 M 。 → Stage: 0

꿈같은 결과여, 어서어서 오너라!

그런데 요즘은 식도역류라는 복병 때문에 색다른 고생을 하고 있다. 식도역류현상이 이렇게 지속되면 힘들게 가라앉은 식도암이 재발될까 두렵다. 정신 바짝 차려 역류의 원인이 될 만한 조건들은 꼭 없애주어야 한다.

기능적 장애로 일어나는 역류는 의료진 지시에 따라 약물을 복용하면 되겠지만 생활상의 문제로 역류를 유발 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다.

생활상의 문제들은 두 가지로 생각된다. 첫째는 밤에 잠들기 전 두 시간 이후로는 무엇이던 먹어서는 안 된다. 둘째는 저녁 식사는 과식, 자극성 음식, 어육류 섭취를 삼간다. 의료진은 무어라 할런지 모르는 일이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참으로 큰 문젯거리가 하나 있다.
이렇게 글로 정리할 때는 나의 결론이 그럴듯해 보이며 마치 글 내용대로 실행할 것 같은데 실제 생활에서는 자제력 결핍으로 생각했던 대로의 요양생활을 못한다는 점이다. 늘 생각 따로 실행 따로이다.

지난 일 년 반 동안 정신없이 투병생활을 계속해 왔는데 그 중 가장 힘든 일이 먹거리에 대한 자제력이었다. 그래도 늙은 탓에 어느 정도는 미각을 잊을 수 있었고 식성에서 탈출할 수도 있었다. 젊은 분들은 정말 힘든 부분인 것 같다. 오죽하면 "고기가 먹고 싶어 죽겠어요. 꼭 고기를 피해야만 합니까?" 하고 나에게 질문들을 하겠는가. "그토록 먹고 싶으면 기름기 없는 양질의 고기를 조금만 먹어보세요."로 대답했다.

암환자가 고기를 먹어서는 된다, 안 된다 하는 주장들은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온 문제 같은데 의학적으로도 실험에 따른 변증법적 논리를 펴나가기에는 아직 힘든 일로 보인다. 암세포의 종류, 병환상태, 개개인의 체질에 따르는 변수가 많아 일률적인 정설을 확립시키기 어려운 탓인가 보다.

그러니 의사 입장에서는 영양학적 관점에서 "가리지 말고 골고루 먹어라." 즉, 육류 섭취도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 면역력이란 관점과 그를 뒷받침하는 영양학이라는 입장에서 내리는 권고다. 그런데 이 권고에 대하여 환자들은 아전인수식의 해석으로 육류를 섭취한다.
의사가 먹어도 좋다했으니까 먹어도 좋다는 구실로 먹고 싶은 분량만큼 먹는다. 다시 말해 실컷 먹는다. 뿐만 아니라 남성 환우들은 부부생활을 위해 부인 몰래 집 밖에서 정력제로서 육류를 왕창 먹어 대기도 한다. 육류에 대한 문제점은 바로 이런 점이 아닌가 싶다.

암과 육류 섭취에 대한 나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에는 아직 공부가 모자란다. 그러나 수없이 재발하는 많은 환우들을 위해서 언젠가는 꼭 밝혀보고 싶은 대목이다.


2007. 3. 25(일)
슬픔 머금은 미소

엊그저께의 일이었다.
오후 한 시, 서울 지하철 종로3가 복도 매점 부근에서 여성 환우 내외분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늙은이의 투병과정에 대해서 직접 듣고 싶어 꼭 만나자는 뜻으로 점심이라도 함께하자는 청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왕 약속한 것 늦지 말아야겠기에 서둘러 도착한 것이 10분 전이었다. 5분이 아직 남아있을 무렵 늘 그랬듯이 방귀가 또 나왔다. 아차! 방귀만이 아니었다. 관장했던 뒤처리가 완전치 못하였기에 아직 잔류 대변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난처한 순간, 화장실로 뛰어 갔는데 만원이라 기다려야 했고 그러는 사이 사타구니까지 차갑게 흘러내리지 않는가. 시간은 왜 또 그리 빨리 흐르는지….

약속 시간 10여 분이 지나자 손전화가 울린다.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된 것이냐는 전화다. "실은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 화장실에 있으니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암환자란 이렇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점심약속에 화장실 이야기부터 하게 되다니…. 참으로 씁쓸한 멎적은 대화였다. 갖고 있던 화장지를 몽땅 다 써 버리고 팬티도 벗어 휴지통 안에 버렸다. 그래도 겹으로 끼어 입고 있던 겨울 내복에서 오는 축축하고 불쾌한 느낌은 떨쳐낼 수가 없었다. 손을 씻고 또 씻고, 냄새까지 맡아보길 되풀이했다. 내외가 함께 오기로 했는데 장암 여성 환우 혼자 와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도, 이야기를 하면서도 개운치 않는 정신 속에 문득 장암 환자들의 고통과 고충이 헤아려졌다. 얼마나 힘들고 속상한 나날을 보내는 것일까. 나는 식도암 환자이기에 입구 쪽 고생이 주가 되었는데 출구 쪽 환자들은 말로는 차마 다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인생은 연극이라 한다지만 암환자야말로 하루하루를 연극 속에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필요하다면 훗날 다시 한 번 더 만나자고 미소를 지으며 작별한 나의 얼굴이 지금도 생각난다. 동병상련의 따듯함을 간직한 미소였겠지만, 사슴의 눈망울보다 더 슬픔을 머금은 미소였으리라.

 


2007. 3. 28(수)
또 다시 보는 백목련

<암환우들에게 드리는 글>

뒷일들 깔끔히 정리하고 떠날 채비했더랍니다.
식도암으로 먼저 간 두 친구를 뒤쫓는 길이기에…

뜻밖에도 지난해 백목련을 다시 볼 수 있었죠.
올해도 백목련이 활짝 열려가고 있네요.

아리도록 희게 소복한 단아하고 맑은 영혼의 꽃!
암 때문에 다시 태어난 환우들의 아름다운 모습이죠.

한 해 한 해씩 늘려가고 있는 환우들의 희망꽃이요,
내년에도, 그 다음 내년에도,

오래오래 이어질 꺾이지 않는
끈질긴 투병의 승리를 기원하는 꽃입니다.

환우들에게 바치는 꽃입니다.

바라는 꽃말은 서두르지 말자! 포기하지 말자!


 

2007. 3. 31(토)
언젠가는 오르리라

어제 해 질 무렵 들렸던 지하철 1호선 용산역 입구 계단 전경이다. 밤이 되면 계단 한쪽에 오색 찬란히 바뀌는 이루미네이션이 호화롭다.
문제는 저 많은 계단을 오르기 위해서 오르다간 쉬고 또 오르다간 쉬고… 몇 번을 쉬었을까?
열 번도 넘게 쉬었었다. 내 다리의 힘은 어디로 가버렸기에!

항암주사를 맞고 나서 다리 힘을 몽땅 잃은 것이다. 마지막 항암주사를 맞은 지 꼬박 일 년이 되는 오늘날이다. 그래도 나는 아직 암에 안 꺾이고 있다. 비록 다리 힘은 잃었지만 희망을 잃은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저 계단들을 쉬지 않고 단숨에 걸어 오를 날이 꼭 오고야 말 것이다.
모든 식도암 환우들, 나의 노년층 동창생들도 그럴 것이다.
모든 암 환우들도 언젠가는 쉬지 않고 저 계단을 웃으며 오를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날이 언제일런가, 그 날을 위해서 나는 오늘도 다짐해본다. 쉬지 않고 바람직한 요양생활을 이어가리라!

뒤로월간암 2007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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