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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일기]어려운 마음 다스리기
고정혁기자2008년 09월 08일 22:52 분입력   총 879212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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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담 이승섭(74)_식도암과 갑상선 아래 전이된 림프절 치료 중. 비절제 식도암 생존율 0%라는 비정한 숫자를 도전으로 2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어려운 마음 다스리기

2007년 4월 12일

조금은 초초하고, 조금은 짜증스럽고, 조금은 우울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벌써 열흘 넘게 투병기도 팽개치고 있다.

마음이 허공을 떠다니는 것인지, 나를 잃어가고 있는 것인지…. 음악을 들어도 애잔한 곡들에 더 빨려든다. 지난해 이맘때의 마음은 흔적도 없이 증발하고 말았다는 것인가? 덤으로 얻게 된 하루하루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살아가겠다던 그 마음이.

딸아이 염려대로라면 늦봄 타기가 시작된 것일까? 아니면 가는 봄 고별인사에 감상(感傷)이 이어지고 있는 것일까? 내 마음 나 몰라다.

간간히 따끔거리던 목 부위 통증이 며칠 전부턴가 완전히 사라졌다. 목소리도 돌아오고 있다. 아직은 쉰 소리에 발음이 어눌하지만 그래도 분명 소리는 나온다. 발성하는데 예전같이 힘들지도 않다.

그러나 도수체조하면서 목 운동을 하면 문제의 림프절 언저리가 뻐근하게 아프고 손으로 눌러보면 아직은 둔통이 깊숙이 넓게 자리 잡고 있다. 방사선에 타들어간 말초신경들이 아직도 통증 전달 물질을 방출하고 있다는 이야기일까? 1차 방사선 치료 때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방사선에 타버린 자리가 완전히 아물려면 아직도 서너 달은 더 걸려야 할 것 같다. 그나마도 림프절의 암세포들이 완전관해 되어 있다는 전제하에서다.

경과하는 느낌으로서는 2차 치료가 좋은 성과를 거두어 림프절의 암 조직이 박살난 상태가 아닌가 싶다. 그렇더라도 그 결과가 CT로 확인될 때까지는 섣부른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데…. 마음이 느슨해지고 있는 것이다.

통증이 사라져 좀 살아볼만 하게 되니 올챙이 시절 잊어가고 있는 속물 늙은이가 된 거다. 먹을거리는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고, 그러면서 복용해야 할 약들은 예사로 까먹는다. 내 마음은 내 것이건만 조종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암을 친구하라느니 암을 잊고 살라느니 평정심을 갖고 일상생활을 하라는 말들이 있다.

잊으란 말이 매일 지켜야할 여러 요양규칙을 잊으란 말은 아닌데 핵심을 잊으니 문제다.

나만 그러는 것일까. 대부분의 환자들이 느슨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래서 암환자들은 걸핏하면 재발되고 전이되고 암과 인연을 못 끊는가 보다. 5년 생존율을 뚫고 10년을 넘기고 20년을 멀쩡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마음 다스리기의 명수들이란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일이 어려운 일이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가능한가보다. 그런 명수이기에 암도 떨쳐낼 수가 있다는 이야기인가 보다.

의료진에게 치료를 받는 과정은 이제 끝나간다. 아니, 꼭 이쯤에서 끝나야한다. 문제는 이제부터 나 홀로 알아서 보완요법을 지속하여야 하는데 잘 해낼 것 같지 않으니 큰일이다.

가장 앞서는 마음 다스리기부터 못하고 있는 탓이다. 스스로 마음 다스리기가 안 되면 요가를 하던지, 선의 길을 닦던지, 종교에 푹 빠지던지, 뭔가 길을 택해야 할 것인데 그러한 자기희생적 인고의 길보다는 편하기를 원하는 내 마음의 나태함이 문제의 근원이 될 것 같다.

이 나이 되도록 아직도 제 마음 제 맘대로 못 하는 덜 떨어진 주제에 어떻게 암을 떨쳐 내겠다는 것인지.

 

재활훈련

2007년 4월 24일

제2차 방사선치료 종료 경과일수: 105일

목련이 지고 나니 벚꽃도 지고 바야흐로 여름을 알리는 라일락이 무리지어 한창이다. 아침 이른 시간, 삼성서울병원 본관 정문을 들어서기 전 라일락 특유의 달콤하고 상쾌한 짙은 향이 나를 감싸며 반기는 것이었다.

오늘은 나만의 감흥을 기념할 기록을 낸 특별한 날이다.

지하철 일원역 밖 큰길에서부터 병원에 이르도록 단 한 번도 쉬거나 멈춰 서 있는 일 없이 꾸준히 걸어온 것이다. 본관 2층 채혈실에 이르기까지 14분 걸렸다. 지난해 이맘때는 서른 번도 더 쉬던 멀고도 먼 길이었다. 이제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하나 보다.

채혈 마치고 영상의학과로 급히 갔다. 7시 23분의 첫 순서로 CT 촬영을 예약해 놓았기 때문이다. 통산 아홉 번째의 촬영이다. 베테랑급 피촬영체가 된 늙은 몸 팔에 조영제 주입이 차갑게 퍼져간다.

이윽고 코에서 역겨운 냄새가 풍기며 회음부가 야릇하게 뜨거워진다. 마지막 메인 촬영용이다.

그 전까지 있었던 다섯 번 가령의 “숨 깊이 들어 마시고~~! 꾸욱~ 참으시고~~!” 는 아마 컴퓨터 조정용이었는지 모르겠다. 조영제 주입 후 한 번 더 숨을 참는 촬영과정을 마치면 CT검사는 끝난다.

요즘 들어 환자 행세하는 나 자신에 역겨움이 느껴지고 있다.

통증이 가라앉았는데 왜 스스로 환자임을 느끼고 있는지, 정신적으로 뭔가 많이 잘못된 느낌이다.

환자임을 잊지 않고 식이요법에 충실해야 함은 재발과 전이 방지를 위해서 당연한 요양생활의 일부이겠으나 그렇다고 정신이 자신을 중환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뛰쳐 나가야한다. 밖으로, 강으로, 들로, 산으로….

며칠 전부터 한강가로 산책 다니고 있다. 말이 산책이지 조금만 걸어도 장단지가 굳어지고 땅기고 아파서 다리를 옮길 수가 없어 왔다. 그래도 그냥 걸었다. 이를 악무는 억지힘으로 다리를 옮겨본다. 그러다간 우뚝 서거나 앉아 버린다. 걷다가 서고, 앉아 쉬고 하는 시간이 걷는 시간보다는 길지만 그래도 걸었다. 걷고 또 걷고 걷기 연습이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되어 가고 있다.

그냥 걷는 일만으로는 다리에 힘이 안 붙는 것도 같아 재활훈련 클리닉에 진료를 신청하였다.

업무 개시 시간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어서 병원 내 공원을 오갔다. 아직은 아침 이른 시간이고 공기도 싸늘한 탓인지 인적이 거의 없었다.

재활훈련 클리닉은 어떤 특별한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26일 목요일로 예약을 마쳤다.

26일에 식도 역류 때문에 정기적 진료를 거듭하고 있는 소화기내과 진료가 있어 재활훈련 진료를 겹치게 예약한 것이다. 병원 내 사정을 잘 알게 된 탓인지 웬만한 일은 뜻대로 잘 처리된다.

이제부터는 환자라는 생각부터 털어버릴 것이다. 정상인과 같은 생각으로 몸을 재활시킬 것이다.

온 힘을 다해서 재활훈련에 정성을 쏟을 것이다.

호주에 있는 딸을 보러 갈 예정인데 가서 폐가 안 되는 몸을 만들어 놓을 것이다.

앞으로 보름간의 강행군이다. 꼭 해내겠다고 다짐해 본다.

 

장기전

2007년 5월 5일

제2차 방사선치료 종료 경과일수: 116일

150번? 아니 200번 이상? 수를 헤아릴 수 없이 오가던 삼성서울병원 구내 통로다. 이 길을 통해서 계절의 뒤바뀜을 언제나 느껴왔었다.

지금은 새 잎들이 꽃보다도 아름다운 신록의 계절, 오월의 문턱이다.

어제는 새로운 시도를 해봤다. 지하철 일원역 밖 병원셔틀버스 정류소로부터 병원본관 현관문까지 논스톱으로 걸었었다. 단순한 논스톱이 아니고 보행 속도를 높여 앞서 걸어가는 행인들을 뒤로 제치며 빨리 걸었었다. 도중에 있는 작은 건널목도 붉은 등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횡단했었다. 쉬지 않고 걷기 위해서였다.

병원 구내 진입로 입구에 있는 수위 경비실까지는 스스로 놀라고 흐뭇해 할 만큼 멋진 걸음걸이였다. 경비실을 지나면서부터 장딴지들이 느닷없이 아파오며 당기기 시작했다.

한 발, 한 발 점차로 느려지는 것이 아닌가. 서서 아픔이 풀리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걸었다. 점점 더 땅기고 아파오는 다리를 겨우겨우 옮기면서 이를 악물고 걸었다.

현관문을 한 발 들어서고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마라톤 전 코스를 완주한 쾌감이라 할까.

9차 CT검사 결과를 알아보는 날이라 뭔가 대단한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빨리 걷기를 시도하였던 잠재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CT 결과지 결론 부분은 다음과 같다.

CONCLUSION:

1. Grossly no change in extent of metastatic lymphadenopathy in right highest

mediastinal area sice 2007/2/15 CT.

2. No change of several tiny nodules in both lugns.

참으로 싱거운 결론이다. 석 달 전 CT 결과와 다른 점이 없다는 이야기다.

변화가 없다는 것. 암환자라면 박수치며 좋아할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 획기적 변화를 기대했었던 것이다. 적어도 목의 림프절 문제만은 이번으로서 끝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석 달 전과 견주어 변화가 없다는 이야기는 제2차 방사선 치료가 괄목할 만한 좋은 성과를 걷지를 못했다는 이야기로도 되는 것이다. 그토록 공을 들여 치료했던 것인데.

석 달만의 안용찬 교수님과의 면담이다.

“림프절 경계 부위는 어떻습니까?”

안 교수님은 미소 지으며 CT화면을 가리킨다.

“이것에 비해서 요것이 좀 작아졌죠?”

CT 판독의사 리포트는 대체적인 변화 없음인데 안 교수님 판독은 약간 작아졌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석 달 후에 PET 검사를 하여보자는 것이었다. 안 교수님의 결정은 나도 이해가 간다. 비록 CT 에서는 림프절 경계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PET 검사에서 포도당 섭취의 이상 징후가 안 나타난다면 암조직을 잠재웠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시 석 달을 기다리며 지내야한다는 이야기도 된다. 석 달, 석 달로 이어지는 징검다리를 건너다 보면 완전관해도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원래 암이란 것이 이토록 끈질긴 것이라 암 투병 = 장기전인 것인가 보다. 그러니 암에 걸리면 ‘서두르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다.

원발 병소인 식도암은 이제 언급도 안 해진다. 일단은 깨끗이 매듭지어진 것으로 보는가 보다.

또 다른 석 달을 위해서 한층 더 조심스런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가게 생겼다.

뒤로월간암 2007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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