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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이야기]건강과 재산을 잃은 후에야...
고정혁기자2008년 10월 07일 18:38 분입력   총 879832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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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손이 물에 젖을 일이 없이 살 줄 알았는데 이제는 암에 걸려 까까머리를 한 채 엎드려 방바닥도 닦고 설거지를 하고 화초에 물도 줍니다. 화초에 피어난 고운 꽃을 보다 문득 운세 생각이 납니다. 초년, 중년, 말년을 꼽는데 나의 운세는 아무래도 초년에 정점이었다가 해가 가면서 기울어가는 건가 싶은 생각에 울적하기도 합니다.
저는 유난히 몸에 약해 부모님의 지극한 보살핌과 부족함 없는 경제적인 풍요로움에 쌓여 온실속의 귀한 화초처럼 자랐습니다. 불면 날아갈 새라 쥐면 꺼질 새라 귀하디 귀한 부잣집 막내딸이었습니다. 아마 한꺼번에 너무 일찍 그 복을 다 받아버렸나 봅니다. 나이 들어 겪은 경제적인 고통과 암으로 겪은 시련은 저를 두 번씩이나 쓰러트렸습니다.

암 진단을 처음 받은 것은 2003년.
당시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라 우울증이 심해 호르몬제를 처방받아 먹기 시작했습니다. 호르몬제를 처방하며 2개월마다 유방암·자궁암 정기검진을 받으라 했는데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다 유방암 0기 진단이 내려졌네요. 0기였는데 암이 있는 위치가 젖줄이 나오는 부위 깊은 곳이어서 가슴을 다 드러내야 했습니다.
입이 짧고 몸이 약했던 탓에 끼니보다 약과 보약을 철마다 대놓고 먹어서였는지 그 덕을 본 것 같습니다. 암 걸리기 전 5년을 공진단을 먹었으니까요. 항암제가 무엇인지, 뒤에 나타날 후유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수술을 받고 가벼운 0기를, 암을 떼어냈다고만 믿었습니다. 그리고 일 년. 제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동안 쌓아왔던 재산을 모두 잃었습니다. 갖고 싶으면 갖고, 먹고 싶은 것은 먹고, 입고 싶은 것은 언제든 입고 누릴 수 있었던 기반과 사업과 사람까지 모두 잃어버리며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어느 순간 배가 나왔네 싶었습니다. 나이 먹어 드디어 배가 나오는구나 싶어 훌라후프도 돌리고, 운동기구도 사들이고, 찜질방도 다녔네요. 복막으로 암이 전이되어 퍼져나가는 것도 모른 채 배를 두드리고 문지르고… 창피하지만 그땐 정말 0기, 수술로 깨끗해졌다는 그 암이 다시 생겼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복수로 점점 숨이 차기 시작해서야 검사를 시작했는데 온갖 검사로도 암이 복수만 차 있을 뿐 암이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수술하여 배를 열고서야 복막에 자잘하게 씨 뿌리듯 좌악 퍼져 있는 암을 찾아냈습니다. 언니는 그때 의사의 부름에 수술실로 들어가 그 모습을 보았다고 하더군요. 아직도 그때 얘기가 나오면 언니는 절대 잊혀지지 않을 그 모습에 몸서리치며 왜 보여줬을까 원망을 하곤 합니다.

수술에 이어진 항암치료.
6번째까지 수월하게 넘어가나 싶더니 7번째 가서는 드디어 몸이 버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머리카락은 모두 빠져버리고 철분제를 맞은 손등은 시커멓게 변해 버렸습니다. 0기였던 때와 달리 전이된 지금은 항암도, 몸상태도 너무 힘겹습니다. 암이 또 생기다니, 0기였는데… 깨끗하게 수술도 잘됐다고 했는데… 수십 번, 수백 번을 속으로 되뇌이곤 해습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했습니다. 누구는 신경 안쓰고 고기도 먹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멀쩡한데 나는 그래도 녹즙도 먹고 음식도 유기농이다, 식단도 가리고 운동도 하고 했는데 왜 이 모양이 됐을까. 그동안 노력한 것이 헛수고였나. 그렇다면 다시 또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 별의별 생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막다른 벽에 부딪혀 힘에 겨워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곰곰이 생각하니 돈을 잃으면서 사람을 잃고 결국 그 스트레스로 건강까지 잃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암’은 재빨리 그 빈자리를 꿰어 찬 것입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을 미워하고, 손에서 떠난 돈을 아쉬워해야 암에게나 좋은 일일 뿐일 것입니다.
이제 다시 일어나는 일이 남았습니다. 과연, 암에게 한번 케이오패 당한 제가 이겨낼 수 있을까요. 풍족했던 과거를 잊고 현실을 받아들여 검소하게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확실히 네, 라고 씩씩하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같은 실수를 두 번은 되풀이하지 않겠노라고 말입니다. 암을 얕보지 않을 것입니다.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아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건강을 찾고 씩씩하게 사람들 앞에 나타나고 싶습니다. 투병기를 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저처럼 암의 재발, 전이로 고통 받고 있는 암친구들과 함께 어려움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 태풍이 지나가면 평안이 찾아오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원합니다.

힘들었던 때 월간 『암』을 알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캠프에도 참석하고, 정보도 얻고, 힘도 얻었습니다. 언젠가 꼭 다시 일어나서 지금 반쪽짜리 투병기를 채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뒤로월간암 200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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