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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이야기]아스피린에 웃고, 비데에 울고
고정혁기자2008년 10월 07일 18:46 분입력   총 880398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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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직장암은 아스피린 덕분에 알게 됐고, 비데 때문에 울었다.
사연인즉, 심하지는 않았으나 줄곧 고혈압으로 신경쓰던 중 우연한 기회에 아스피린이 고혈압에 좋다는 말을 듣고는 먹기 시작하여 2주 쯤 지나니 혈변이 약간 비쳐서 이때부터 몸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물론, 암까지는 생각 못했고, 치질 정도로 여겼지만 그래도 항문 쪽에 주의를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로 용변 후 상태를 보는 습관이 생겼으니 아스피린 덕을 봤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비데에는 왜 울었겠는가. 집에는 비데를 써서 내내 혈변이 나오는데도 알지 못했다. 남자라서 소변기면 몰라도 화장실은 그리 자주 쓰는 편이 아닌데 내 경우에는 집에서 용변을 해결하여 직장에서는 화장실을 쓸 일이 거의 없었다. 아마, 직장에서 우연히 화장실을 들어가 일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후로도 혈변이 나오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 비데 때문에는 암 발견이 늦어졌으니 비데 원망을 할 밖에. 집에서도 비데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아스피린 사건 전에 혈변을 알아봤을 것이란 생각이다.

대부분 직장암 발견이 그렇듯 나도 치질인 줄로만 알았다. 통증도 심하지 않았고, 달리 느낌도 없었다. 동네 항장외과(항문·대장외과)에서 내시경을 해보더니 보호자를 데려오라 해서 내심 걱정은 했다. 아내는 혼자 의사와 면담을 하고 괜찮다며 큰 병원에 다녀오자고 했지만 좀 이상하다 생각했을 뿐이었다. 혈변이 비쳤다는 것 이외에는 몸에 아무 이상도 느낌도 없는 것이다. 참 어리석지만 그때는 암 같은 중병이라면 필시 대단한 증상이 나타날 것이라고만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암이 이렇게 조용히, 천천히, 내 몸을 잠식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암을 정말 몰랐었다.
원광대학병원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던 날, 아내가 갑자기 손을 꼭 붙잡더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아무래도 큰 병이다 싶어 눈앞이 캄캄해졌다.

2006년 4월 13일 직장암 3기 진단. 4월 17일 수술을 하고 항암을 6회, 방사선 30회를 마치고 퇴원했다. 2006년 10월 다시 복귀하여 지금은 직장을 다니며 투병중이다. 이 짧은 투병기록 안에 담긴 수많은 몸과 마음의 변화는 암환자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직장암 환자의 애환은 변으로 시작되어 변으로 끝난다. 하루에 화장실을 적게는 10번, 많게는 2, 30번을 들락거린다. 밥 먹고 컨디션이 좋으면 2~3번 다니고, 별로인 때는 6~7번 이상을 다녀야 한다. 화장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다.
항문에서 가까운 부위로 직장이 잘려버리면 항문괄약근도 함께 손상되어 초기에는 많이 힘들다. 또, 직장이 변을 담는 역할을 하는데 수술로 인해 그 기능이 상실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변의를 느끼는 것이 뇌에서 신호가 오는데 수술한 부위가 자극되는 것을 뇌에서 변의로 인식하여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직장암 환자에게 ‘잘 싸는’ 문제는 제 1순위의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왜 암에 걸렸을까? 암환자치고 누구나 해봤을 고민이다.
그래서 하나씩 꼽아 보았다.
남자는 술 먹고, 담배 피우고, 과로에 운동은 거의 안하고… 나도 예외는 아니였다. 술도 담배도 지금은 다 끊었다. 식습관도 많이 바꾸었고, 운동도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환경적인 문제는 어떨까? 시골에서도 공기 좋고 물 좋기로 이름이 났으니 사는 곳 덕은 보는 셈이다.
성격이나 생활은 어떨까? 나는 8남매의 장남이다. 우리나라 장남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무게를 갖고 살아왔다. 암에 걸리고야 집안의 모든 문제를 내가 해결해야 하고 내가 꼭 있어야 한다는 ‘장남 강박증’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동생이 결혼하면 새로 늘어난 식구까지 ‘장남의 책임범위’안으로 들어왔고, 아직 미혼인 동생은 ‘결혼하기’가 ‘장남의 책임범위’로 들어왔다.
이제 건강 때문에 한걸음 물러나 앉아보니 내가 없어도 세상사가 모두 잘 돌아간다. 어쩌면 강한 책임감이 가족뿐 아니라 내 자신에게도 과히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싶다. 성인이 된 동생들은 제각기 일가를 이루며 살아간다. 각자 해결하고 각자 책임질 수 있는 자리이다. 나는 무엇 때문에 다 자란 동생들에게 항상 조바심을 냈던 것일까?
바깥으로만 향했던 눈이 이제는 ‘나 자신’에게로 서서히 바뀌어 갔다. 장남이라는 ‘책임감’보다는 ‘집착’이였으리라.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내 자신의 문제를 알고 암을 알고 나니 배짱이 커졌다. 웬만한 일이 생겨서는 담력도 커져 움쩍을 안한다.
아무렴, 죽다가 살았는데 이보다(암) 더 무서운 것이 있으랴 싶다.
지면을 빌어 암환자를 대하는 일반인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암환자를 암환자로만 보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배려를 해 주는 것도 좋지만, 배려를 언제나 늘 해주는 것은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하다. 평상시처럼 늘 그렇듯이 편안하게 대해줬으면 좋겠다. 넌 암환자니까 이건 안 되지, 저건 안 되지 하는 말은 암환자에겐 상처가 된다. 병은 있으나 병자로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스스로도 환자라 하여 자신을 나약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암도 이기고 사는데, 이까짓 것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러니 보호하는 ‘배려’보다는 할 수 있다는 신뢰감과 책임감이 암환자를 더 씩씩하게 만드는 것이다.

뒤로월간암 200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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