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에세이경계 또는 균형임정예(krish@naver.com)기자2022년 03월 11일 11:47 분입력 총 3007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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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철우 | 수필가
내가 속한 문학단체의 시화전은 매년 가을과 겨울의 사이에 열린다. 따스한 햇볕과 차가운 바람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계절의 경계다. 한낮의 포근함을 즐길 생각에 또는 추위를 피할 생각에 차림새를 갖췄다면 서로 다른 날씨 탓에 한 번쯤은 판단 실수를 자책하게 되는 그런 시기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은 몇 번이나 옷장 문을 열고 고민하게 된다.
마침 귀가하던 아내에게서 시화전을 보러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내 작품의 첫 독자인 아내도 공원에 설치되는 이번 전시는 직접 보고 싶었나 보다. 먼지만 쌓여가던 구민회관 앞 분수대에서 만난 아내는 내 앞에 오자마자 털썩 주저앉으며 풀린 내 오른쪽 신발 끈을 묶는다. 아내의 치마가 바닥에 끌리며 먼지가 인다. 이런 것도 모르고 다닌다는 아내의 핀잔이 귓가를 스친다.
나는 언제 풀렸는지 모르는 신발 끈보다, 귓가를 스치는 핀잔 소리보다, 아내의 치맛단이 쓸어올린 먼지에 눈길이 간다. 먼지는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의 햇살을 따라 반짝이며 하늘로 오를 것 같더니 이내 힘을 잃고 바닥으로 주저앉고 있었다. 그 먼지의 조각들을 따라가다 보니 대학 시절의 아내와 내가 뿌옇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내와의 데이트는 학교에서 할 때가 많았다. 먼저 졸업한 아내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나를 위해 늘 먼 길을 달려 와줬고, 고마움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던 그 시절부터 나는 늘 보호자를 자처했었다. 한번은 학교를 산책하다가 연인이었던 아내의 신발 끈을 묶어 준 적이 있다.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채. 그러니 정확히 지금의 반대 상황이었던 셈이다.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심리적 위치가 뒤바뀐 건 언제였을까. 병원 측이 요구한 수술 동의서에 보호자로 아내가 서명했던 20여 년 전 그날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 보호자에서 피보호자가 된 것 같은 먹먹한 기분에 아내 핀잔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오른쪽 신발 끈은 왼쪽보다 더 단단하게 조여졌다. 아내의 호의와는 별개로 양쪽 신발의 불균형은 그렇게 시작됐다.
시화전 개전식을 마치고 저녁을 함께하기 위해 식당에 들어서다가 그 불균형이 문제를 일으켰다. 신발을 벗으려고 오른발 뒤꿈치를 왼쪽 발 안쪽에 대고 들어 올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악’ 소리를 내고 말았다. 오른쪽 종아리에서 갑자기 쥐가 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허벅지 뒤쪽까지 뻐근하게 당겨오는 것이 덜컥 겁까지 났다. 운동 좀 하라던 아내의 음성이 기억의 밭에서 불쑥 고개를 든다. 평소에 신발은 편하게 신거나 벗을 수 있도록 적당히 끈을 묶어 두는데, 오늘은 아내의 손길이 닿으며 평소와 다르게 조여진 오른쪽 신발을 무리하게 벗으려다가 마비까지 온 것이다. 어느 정도일까. 걸으며 끈이 풀리지 않으면서 쉽게 신고 벗을 수 있는 정도의 조임이란.
돌아보면 나는 늘 경계인이었다. 중심 근처에 서 있다가 인력(引力)에 끌려 헤어나오지 못하고 구설에 휘말리거나, 원치 않게 악역을 도맡기도 했던 친구를 보고 난 후, 적당히 경계선 주변에서 서성이다가 원심력을 핑계 삼아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쪽을 택했다. 문제는 중심으로부터 또는 경계로부터 적당한 지점에서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세상을 살아낸다는 것이 어쩌면 균형을 맞추는 일이 아닐까. 나이 들면서 이런 이치가 조금씩 눈에 들어올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나는 불균형의 미로를 헤매고 있는 것 같다.
중도 장애를 갖게 된 지 벌써 스무 해를 넘겼다. 약물 부작용에 따른 장애까지 겹쳐 중복장애를 안고 살고 있지만, 아직 장애의 아픔을 작품 속에 녹여내지 못하고 있다. 장애인이면서 스스로 장애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러니 장애인 단체의 행사에 가면 철저히 경계인이 된다. 물론 어떤 누구도 나의 위치를 탓하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나의 위치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오로지 나를 경계선 가까이 서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것은 장애인 단체가 아닌 다른 모임에서도 마찬가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에 선 나는 양쪽에 모두 속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무적자(無籍者)인 셈이다. 그러니 장애에 대한 근본적인 정의 내리기는 차치하더라도 나는 장애인일까 아니면 비장애인일까.
더구나 나는 약물 부작용으로 인공관절 수술하며 한쪽 다리의 길이가 2Cm 짧아졌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그 불균형이 나를 절룩이게 한다. 재밌는 것은 그 절룩거림을 당사자인 나는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쪽 발을 디딜 때마다 전해오는 반복적이고 영속적일 것 같은 고통에 뇌도 차라리 외면하는 것으로 맞서고 있다. 그러니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각과 스스로 느끼는 그것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또한, 2Cm의 길이만큼 불균형의 기울어진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사시적(斜視的) 시각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쪽 다리를 마저 수술해 2Cm의 차이가 없어지더라도 이런 비판적 시선은 놓치고 싶지 않다.
그나저나 치마가 끌리는 것도 잊은 채 내 신발 끈을 묶어주던 아내는 사랑이었을까,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사랑과 연민을 적당히 버무려 놓은 것의 어느 경계였을까. 지난 주말에 슬며시 그날의 풀린 신발 끈에 관해 물었더니 아내는 빙그레 웃으며 딴소리다.
“점심에 떡국 해줄까요? 봄동 무쳐서…….”
뒤로월간암 202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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