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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 종이컵
고동탄(bourree@kakao.com)기자2022년 05월 19일 11:20 분입력   총 3792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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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철우(수필가)

병실을 가장 아늑하게 만드는 벽의 색깔은 분홍색이라는데, 흰색이 가진 확장성 때문일까. 순수성 때문일까. 내가 다니는 병원의 병실 벽은 여전히 흰색이다. 이번 7층 병실의 시선은 창문 밖의, 사용하지 않는 옥외 주차장으로 이어져 개방성은 썩 마음에 든다. 옥외 주차장 너머에는 특급호텔이 위용을 자랑하듯 서서 시선을 막는다. 호텔이 막아서지 않았다면 반포대교와 함께 한강이 보였을까? 비슷한 기능도, 상반된 기능도 있는 두 건물이 마주 보며 서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부조리한 일이다. 그 이유 때문일까. 두 건물 사이에서 감정을 중재하는 것은 옥외 주차장의 새 떼다. 사람도 차도 없는, 공터나 다름없는 넓은 주차장을 자신들의 전용 놀이터인 양 들고나는 새 떼를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 짓게 한다.

또 입원했다. 수술 횟수를 세다가 어느 순간 포기할 정도로 수술대 위에 눕는 게 익숙해졌지만, 수술실을 향하는 복도의 불빛을 누워서 바라볼 때마다 시간이 빨리 흐르길 얼마나 원했던가. 언젠가 받아야 하는 수술이었다. 한쪽 다리 수술을 마치고 나머지 다리 수술을 미루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 수술 날짜를 정했다. 늘 마지막 수술이 되길 기대하지만, 다음 수술은 여지없이 다가왔다. 차가운 수술실 베드에 누워 마취 기운이 점차 몸에 퍼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시간은 정지된다.

시간은 공간의 변화로 인식된다. 모든 것이 멈춘 공간 안의 존재는 시간의 흐름을 분별하지 못한다. 벽시계의 초침이 숨을 헐떡이며 정상을 넘는다. 재개발 지구의 가파른 골목길을 걷는, 숨 가쁜 노파를 보는 듯하다. 허공에 매달린 수액이 방울방울 떨어져 몸속으로 파고든다. 보이지 않지만 소변 줄과 피 주머니도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을 터. 모두 소리 없이 진행되는 것들이다. 병실에서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보조 침대에 누워 가끔 뒤척이는 집사람이 유일하다. 수술 부위의 통증이 뇌에서 느끼는 것이라면, 피곤함에 지친 아내의 앓는 소리는 심장을 찌른다. 심장 통증이 수술 부위 통증보다 더 아프다.

수술 후 이틀이 지났을까. 드디어 병실 복도로 나왔다. 압박 스타킹을 신고, 워커에 몸을 의지한 채 병동을 크게 한 바퀴 돌면 숨이 가빠온다. 첫날은 한 바퀴, 다음날은 오전과 오후로 나눠 두 바퀴. 그렇게 조금씩 다리 근력을 키운다. 운동을 마치고 병실에 들어서기 전에 있는, 반포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창가가 꽤 좋은 휴식처다. 이곳에서 아내는 주로 커피를, 나는 물이나 병실에서 가져온 음료를 마시는데, 그날은 아내가 따라준 음료를 종이컵으로 한 모금 마신 후였다. 종이컵을 잡은 손에 뭐가 묻었는지 끈적임이 느껴졌다. 들고 있던 종이컵을 자세히 보니 접합이 좋지 못했던지 아래쪽에서 음료가 새는 게 아닌가. 접합 불량의 종이컵을 내려다보니 다리 수술을 마치고 워커에 의존해 걷고 있는 한 남자의 다리가 겹쳐 보인다. 새고 있는 음료는 수술실에서 차고 나온 피 주머니를 연상시킨다. ‘너도 다리가 아프구나.’ 낯선 점성의 불쾌함보다 안쓰러움이 먼저 감정의 문을 두드렸다. 한낮 종이컵을 통해 나 자신을 보게 되다니.

한때 사물처럼 손쉽게 삶을 리셋(reset)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숨 쉴 때마다 밀려오는 통증이나, 발을 디딜 때마다 뇌를 찔러대는 고통에 맞설 때가 있었다. 아군은 보이지 않고, 몸 하나 숨길 곳 없는 평야에서 물밀듯 밀려드는 적군에 맞서 혼자 서 있는 느낌. 병상에 누워 그런 느낌이 들 때면 불쑥 찾아오던 생각이었다. 하늘 아래 육체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것은 외롭고 힘든 일이었다.

병상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앉은 녀석이 안쓰럽다. 종이컵은 몇 단계의 과정을 거쳐 제작될까? 불량이 나올 확률은? 그리고 내 손에 들어와 나와 같은 모습을 보일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내 손에 들어온 작은 인연이기에 일회용 종이컵이 아닌, 업사이클(upcycle)이 되는 삶처럼 누군가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재탄생하길 바라본다. 다만 지금은 누군가의 우악스러운 손에 구겨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아내가 사용한 빈 종이컵에 겹쳐 넣어 두었다.

몇 해 전 퇴원하기 전날 밤, 폭풍우가 칠 거란 일기예보에 병원 뜰에 핀 목련꽃이 질까 봐 잠을 설친 적이 있다. 맨몸으로 폭풍우를 맞을 목련은 큰 수술을 앞둔 나와 같은 처지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밤새 폭풍우를 견뎌낸 목련을 보며 퇴원하던 차에서 얼마나 감격했던지….

작고 소소한 것들에게 자꾸 시선이 간다. 목련꽃에 감정이입을 하더니 이번에는 종이컵이다. 아스팔트 틈을 비집고 올라오는 작은 꽃들을 보면 여지없이 카메라를 들이댄다. 나도 미미한 존재라는 걸 느껴서일까. 아니면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일까. 미미하고 소소한 존재로 돌아갈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그들에게 연민을 느껴서일까. 반대쪽으로 향하는 시선을 일부러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미세한 감정선을 퉁겨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역시 그런 부류들임을 부인할 수 없다.

창문 커튼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 한 줌이 병상 모서리에 떨어지는 오후의 병실. 한 손에 체온계를 들고 빈 포도당 주사액까지 가슴에 안은 간호사 선생이 다 드셨으면 치워주겠다며 겹쳐 둔 종이컵을 집어 든다. 병실 밖 주차장 위를 날던 새처럼 날렵한 손놀림이다. 순식간에 닥쳐온 이별. 나는 종이컵이 구겨질까 봐 병실을 나서는 순간까지 간호사 선생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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