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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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이야기]명산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13년
고정혁기자2008년 11월 12일 21:13 분입력   총 880357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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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수(62세)_연호요양병원 상임이사. 위암3기 13년 현재는 건강하게 생활.

***투병과정
*94년도 49세 경찰직 공무원생활 중 위암3기 진단
*위완전절제
*항암 10개월
*2년간 6개월마다 1회씩 병원검사 받음
*5년지나 2년에 1회씩 검사 받음
현재까지 이상없음.

***수술 그리고 길고 긴 항암을 견디는 법

암 진단에서 수술까지의 과정은 그다지 드라마틱할 것이 없다. 처음 찾아오는 ‘암’이라는 말에 반쯤은 멍한 상태로 수술까지 가게 되니 말이다. 지금이야 암이 흔하지만, 그때만 해도 암이란 병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암이 갖는 무게는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수술이 끝났다. 내 몸속에 위는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항암이 시작되었다. 경찰직이었던 나는 수술 후 항암을 받으면서 그때부터 다시 직장에 출근했다. 병원에 누워있던 몇 일 동안 결심한 것은 반드시 정년퇴임 때까지 직장을 다닐 것이며, 병원치료로 직장생활과 가정의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항암주사를 한번에 5일씩 맞곤 했다. 나는 가능한 한 직장을 다니기 위해 금요일 저녁에 병원에 가서 5일 동안 항암을 맞았다. 금요일 업무를 최대한 빨리 끝내고 병원에 가서 주말을 끼고 3일을 있었다. 그러면 휴가는 월화 이틀만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천천히 종일 맞는 주사. 그리고, 새하얀 병원시트에 맥없이 누워 바라보는 하얀 천정. 숨을 쉴 때마다 가슴속에 스며드는 공기는 역하고 탁했다. 하루 종일 도저히 주사를 꽂고 있자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해 저녁 8시부터 아침 8시까지 12시간만 몰아서 항암을 다 놔달라고 요구했다. 병원에선 난감해했다. 아무도 주사를 빨리 놔달라는 환자는 없었으니까. 결국, 나는 아침이면 주사를 뽑고 외출해서 근처 공원 나무가 있는 곳으로 매일 거닐며 운동했다. 식사는 억지로라도 먹고 싶고, 당기는 것이 있으면 사서라도 먹었다. 과자가 생각나면 바로 사다 몇 조각 먹다 버리고, 빵도 먹다가 또 먹기 싫으면 그대로 버렸다. 과일도 먹고, 음식도 생각나는 대로 먹고 싶은 것을 먹었다. 머릿속에서는 먹고 싶은데 막상 입에 넣으면 먹기 싫어서 버린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그래도 잘 먹어서 항암을 이기려고 했다. 먹으면서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는 집에 가서 쉬었다. 항암주사를 맞을 때만 병원에 들어갔다. 병원에서 하루종일 입원하지 않고 통원치료 받으며 다닌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덕분인지 탈모도 없었고 백혈구수치 한번 떨어지지 않고 항암 10개월을 지냈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을 정하다

나는 이전에 고소공포증이 있었다. 암에 걸리고 난 후 출장을 가게 되어 비행기를 타게 되었는데 ‘여기 있는 사람 모두 다 귀한 생명이구나. 암 수술하고 위까지 없어진 나는 이중 제일 귀하지 않은 생명이다. 이제 더 무엇을 겁내랴.’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고소공포증은 사라졌다. 모든 게 다 욕심이고 생각이더라. 머릿속이 번쩍했다. 마음 한번 바꾸니 한순간에 병이 없는, 병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수술하고 퇴원하고 나는 해야 할 일을 정했다.
첫 번째, 마음을 비우자. 이제는 이전 삶과는 목표도, 원칙도 같을 수가 없었다. 암이란 게 언제 또 재발할지, 퍼져나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돈을 더 벌고, 승진을 하려 애쓰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물욕과 승진, 즉 명예욕을 버리기로 했다. 직장인으로 나는 승진에 대한 미련을 다 털어버림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취미생활을 하자. 유일하게 즐기는 취미가 여행이었다. 나는 아내와 상의하여 주말이면 산을 함께 다니기로 결정했다. 기왕이면 제대로 해야겠다 싶어 <전국 100대 명산> 책도 사고, 지도도 마련했다. 평일 동안 미리 그 지역의 특색, 구경거리, 특산물 등을 공부하고 노트에 정리하여 주말이면 아내와 산을 오르고 여행을 즐겼다. ‘암, 네가 열에 약하다니 어디 한번 더워 죽어봐라.’하는 심정으로 줄줄 땀을 흘리며 걷고 또 걸었다. 정상에 다다랐을 때의 그 충만함과 희열은 한주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몽땅 다 날려 버리기에 충분하다.

**앞으로의 투병방침을 세우다

암 진단을 받고 나도 마찬가지로 서점에 가서, 가족이, 친지가 전해 준 암과 건강관력 서적을 읽었다. 꽤 많은 책을 정독하며 그 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하는 답을 찾으려 애를 썼다. 그 모든 책의 내용을 요약한 결과 딱 2가지, 너무 짧은 문장으로 답이 정리되었다. <적절한 운동과 식사>. 너무 쉽고 간단한 답이지만 이것이 결론을 내린 유일한 답이었다. 어디 암에만 맞는 답이겠는가? 건강을 지키고 모든 병을 이기는 길이 여기에 있지 않던가.
<적절한 운동과 식사>로 원칙을 세운 결과, 온갖 보조식품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있었다.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건강식품과 고가의 버섯 등은 완전히 배제하고 홍삼 한 가지 정도만 선택하여 복용하였다.

음식은 쉽지 않았다. 위를 전절제하고 퇴원하여 바로 직장을 다니던 초기에는 미음을 갖고 다녔다. 처음은 많이 먹을 수 없어 차에 보온병을 두고 커피잔으로 한잔 남짓, 하루 10번 정도 주차장으로 오가며 식사를 대신했다. 미음을 적응하고 체력이 받쳐줘야 암과 싸워 이긴다는 생각에 생선, 과일, 육류를 골고루 다 먹었다. 쇠고기, 돼지고기는 소화가 힘들어 보신탕을 대체했고, 균형 있는 식사를 원칙으로 했다. 위암 환자에게는 먹고 난 후가 골칫거리이다. 나는 이 문제를 조금씩 자주 먹기, 먹고 난 후에는 걷는 것으로 해결했다. 산을 다닐 때는 천천히 등성이를 걸으며 간단히 식사를 하곤 했다. 그러면 소화가 잘되어 속이 편안했다.
그렇게 하여, 나는 3개월이 지날 즈음에 밥 한공기의 80%를 먹을 정도로 식사량을 늘릴 수 있었다.
인체는 참 신비롭다. 위가 없는 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음식에 몸을 적응시키니 몸이 따라와 주었다. 그렇게 위가 없다는 생각, 암 환자라는 생각을 잊어버리려 애썼다. 그렇지 않으면 운동을 하다가도 문득 ‘암환자인데’ 라는 생각에 위축되고 조금 힘들어도 주춤거리게 되어 앞으로 나가기 힘들어진다.

**5년을 지나 정년퇴임을 하다

잘 견뎌온 것 같지만, 사실 5년이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남들은 세월 가는 것이, 늙는다는 것이 서럽다 하는데 나는 일 년이 지나가면 기뻤다. 세월이, 5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그렇게 기다렸다.
산행으로 체력을 키우고, 마음을 편히 하려 애쓰고, 과하지 않고 치우지지 않게 식사를 지켜 가며 지각 한번, 결극 한번 하지 않고 계획한대로 정년을 맞았다. 병에 걸려보니 ‘악처가 효자보다 낫다’는 옛말이 수긍이 된다. 부모보다, 자식보다, 아내가 제일이다. 병원생활 3개월 동안 아내는 병원 밥을 먹지 않도록 했다. 아내는 아침이면 애들 학교 보내고 내 식사를 준비해 와서 간병을 하며 밤까지 내 옆자리를 지키다 새벽 5시면 집으로 향했다. 몸이 약한 아내였는데….
암 진단을 받고는 가족으로부터 위로를 받았는데 나중에는 내가 가족들을 위로했다. 속마음은 내색하지 않고 아내나 아이들에게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항상 앞에서 꿋꿋한 가장노릇을 하려 했고, 건강에도 큰소리를 쳤다. 직장을 끝까지 다닌 것, 힘들게 산을 다닌 것도 가장의 몫, 아버지의 몫, 자식의 몫을 변함없이 해내야 했던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다.
퇴임 후의 삶은 자연스레 전원생활로 정해졌다. 암환자가 된 덕분에 요양병원에 마음이 갔고, 미리 정년 후를 준비하고 계획하게 되었다.

**행복한 지금, 그리고 행복한 결말을 꿈꾸며

십 몇 년 전, 죽음을 앞에 두고 내 소망은 어머님이 먼저 돌아가실 때까지는 살고 싶었다. 그리고는, 아이들 결혼할 때까지, 나의 환갑을 맞을 때까지, 전원생활을 꾸밀 때까지로 점점 길어져왔다. 이제 자리도 잡혀서 조그맣게 집 옆에 무 심고, 배추 심고, 들깨도 심었다. 출근하기 전에 한두 시간 일하고, 퇴근해서 일하는데 참 재미가 난다. 애들이 내려오면 한 보따리 들려 보내는 것도 즐겁다. 손주들은 강아지랑 놀고, 밭이며, 이제 2통이 된 벌통도 보느라 좋아한다. 친구들이 오면 숯불에 고기를 굽고 텃밭에 키운 상추며, 고추를 먹고 우리 내외는 그 모습을 보며 흡족하다. 지금 생각하면 암에 걸렸기 때문에 이런 집도 지어보고, 농사도 짓고, 원하는 요양병원 일도 함께 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암 보균자’이다. 지금이라도 체력이 무너지고, 심신의 밸런스가 깨져버리면 암은 또다시 발병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또, 설명할 수 없는 생명의 힘을 믿는다.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암환자가 제 힘으로 채 걷지도 못하던 사람이, 한 발짝씩 걷기 시작해서 일 년 만에 요양원에서 산을 제일 잘 타는 사람이 되어 나중에는 제 발로 걸어 나가기도 한다. 목표를 갖고, 신념을 갖고, 불평, 불만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면 길이 보인다. 내 인생의 노년이 잘 정리되고 꾸려지는 것이 만족스럽다. 매일 저녁이면 어스름이 내려앉고 산은 깊어지고 마음도 함께 평온해진다. 나의 마지막 잠도 이처럼 평안하기를.

뒤로월간암 200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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