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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일기] 절망(絶望)이란 없다.
고정혁기자2008년 11월 13일 00:49 분입력   총 879860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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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담 이승섭(74)_식도암과 갑상선 아래 전이된 림프절 치료 중. 비절제 식도암 생존율 0%라는 비정한 숫자를 도전으로 2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2007년 10월 11일(목)

PET 결과지 사본을 교부받으며 마음이 들떠 있었다.
만 2년 2개월 만에 육체의 고통,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신호가 떨어지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암으로부터의 탈출을 확인하는 순간이 내 손 안에 있는 까닭이었다. 크게 소리치며 덩실덩실 춤이라도 한 판 추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심봤다.”
“암 뗐다! 암 뗐다!”
승리감의 절정에서 어떤 소리가 터져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덤덤하게 그냥 그 순간을 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접수대에서 결과지 사본을 교부받으며 마음이 급해 바로 그 자리에서 읽었다.

“뭐야! 이것? 이럴 수가?”
이렇게 황당할 수가…. 내용은 장밋빛이 아니었고 낭떠러지 속 암흑 천지였다.
기쁨의 절규는커녕 신음소리 내뱉으며, 당혹감이 실망으로, 실망감이 낙담으로, 낙담이 좌절감으로 변하며 극도의 허탈 상태로 빠져들고 말았다.
방사선 조사로 사라졌어야 할 암 전이 림프절이 오히려 새끼를 치고 있다는 것이며 지난 해 11월 검사 당시의 당분 섭취 농도보다도 더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을 뿐더러 식도 상부에 악성 조직으로 보이는 새로운 국소 당분 섭취가 보이며 왼쪽 폐의 기문(hylum)에도 새로운 당분 섭취가 인식된다는 것이었다.

PET 결론 부분이다.
1. Increase of FDG uptake in the right highest mediastinal lymph node, malighnant lymphadenopathy more likely.
※ 2005.10.21 ........ p-SUV=13.1
2006.11.23 ........ p-SUV=6.9
2007.09.06 ........ p-SUV=8.2
2. Newly appeared focal increase of FDG uptake in the right wall of upper thoracic esophagus, malignant tissue more likely.
3. Mild increase of FDG uptake in the left pulmonary hylar lymph node, benighn lymphodeopathy more likely.
※ 2006.11.23 ....... 언급 없었음.
2007.09.06 ....... p-SUV=3.1
4. Multiple pulmonary nodules without significant FDG uptake in both lungs, benign lesion more likely.

뒤집어 말하면 2차 방사선 조사가 완료된 금년 1월 8일 이래 아홉 달 동안 허구의 환각 속에서 몸 안의 암이 사라진 것으로 믿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중간 중간 검사한 CT 결과지에는 ‘늘 변동 없음’, ‘변동 없음’ 이었는데…. 환각에 빠진 세월이라니….
좋아라하며 외국 나들이를 했었고 식이요법도 느슨해져 겉모습만 열심인 척 했고 내실은 적당이 적당히 안이하게 지내왔던 것이다. 자만심마저 있었다. 식도를 수술하지 아니하고도 깔끔하게 고쳤으며 폐 속에 전이된 림프절로 인식되는 미세한 결절들이 있지만 아무런 대책 없이 무시해온지 1년 동안 변동이 없으니 자연 퇴축으로 볼 수 있겠고…. 이번에 방사선 치료한 림프절 하나만 박살내면 걱정거리는 모두 없어지는 것이라 여겼다.
“기다리나 마나, 보나 마나 암 세포들이 내 몸에서 소멸 되거나 퇴축 과정일 것” 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지내왔던 것이기에 PET 결과지로 인한 그 반작용 쇼크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일을 어찌한담.
하루 300선량(cGy), 20일 조사, 총 조사량 6,000선량(cGy)을 맞고도 끄떡없을 뿐더러 되려 새끼를 치기 시작하는 림프절을 어떻게 처치해야한다는 말인가? 기나긴 암흑의 터널 속으로 다시 내동댕이쳐진 황당한 현실이여!
이튿날 안용찬 교수님의 면담이 있었다.
“새끼를 치고 있는 것 같군요.”
결과지를 미리 검토하고 받는 면담이라 새삼 놀랄 것도, 걱정도, 분노도 없었다.
“미안합니다. 안 교수께서는 효과가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소극적이었던 것을 환자인 내가 우겨 강행된 치료였는데 이런 결과라 면목도 없고 정말 미안합니다.”
환자인 내가 되려 주치의를 위로해야 할 어색함이 있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좀 더 지켜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석 달 후에 CT 검사나 해보죠.”
“네, 그러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정말 힘든 세월을 보내게 되려나 봅니다.”
온화한 표정을 지키기 위해 미소를 띠며 말했지만 누군가가 자세히 나를 살폈다면 헐어빠진 초가지붕 위에 덩그러니 얹혀있는 둥근 박의, 슬픈 박색 미소를 보았을 거다.
그 다음 날은 귀부인님이 주최하는 암까페 경기·서울지역 정모가 있었다. 암 환자들간의 모임은 한 번도 경험해본 일이 없다. 나갈까, 말까. 나쁜 소식에 기진해 있는 이 몸으로 나가서 어쩌겠다는 건가. 하지만 주최하는 분께 꼭 참석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에라, 모르겠다. 내 사정 따로 있다하더라도 약속은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도 되어보자. 아무 일 없는 척 모임에 참석했다.
그리고, 벌써 한 달이 지나버렸다. 뒤숭숭한 머리로는 투병기 기록도 여의치 않다. 매일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이며 무엇에 문제가 있었던가를 곰곰이 따져보는 일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도 생각하는데 공상 같은 추리만 가능할 뿐 뾰족한 수가 안 보인다. 공상 속에 지내는 동안 한 달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한 주일이 멀다하고 기록했던 투병기를 달포가 되도록 기록 못한 사연이다.

림프절의 암세포들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면,
식도 상부에 새로운 식도암이 생긴 것이라면,
왼쪽 폐 입구 기문에 암이 자리 잡은 것이라면,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급반전한 회전무대다.

지상 낙원은 애당초부터 없었던 것이니 새삼 실낙원도 아니다. 이제부터 다시 지옥을 감내하라는 것인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옛말을 믿고 싶다. 솟아날 대책을 세워야하는데 아직은 구멍은커녕 틈새도 안 보인다. 무언가 획기적인 새로운 요양 방안도 구상해봐야 할 것 같은데….

다만 분명한 것은 흐리멍덩하게 보내고 있는 현재의 생활을 오래 지속하지는 않을 것이란 점이다. 길이 안 보인다는 것이 바로 절망적 사태는 아니란 점이다. 두드려라, 길이 열릴 것이다. 두드릴 기력이 남아있는 한에는 절망이란 결코 없는 것이다.

독한 마음
2007년 10월 25일(목)
독한 놈! 소싯적부터 평생 함께 해온 친구들 사이에서 요즘 나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식도암에 걸렸을 때 얼마 안 가서 세상을 하직 할 것으로 보이던 약골배기 순뎅이가 그 어렵다는 식도암을 수술조차 안한 채 말끔히 고쳐 놓았고, 통증에 시달리는 그 어려운 과정 속에서도 2년 넘게 병상일기며 투병기를 꼬박꼬박 기록하여 이어왔으니 지독하게 강인한 놈이라는 놀라움에서 붙인 말같다.
친구 중 누가 먼저 이 말을 썼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독이란 말은 독사, 독충, 독버섯, 독살 등 사람을 해치는 나쁜 뜻의 말로 쓰인다. 그래서 ‘독한 놈’하면 욕에 가까운 말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몸도 약골이라 늘 잔병에 시달려왔으며 성격 또한 유순한 편이라 친구들이 모이면 늘 뒷전에서 친구들 말을 들어주는 편이지, 어떤 일에 앞장서거나 떠들어대는 일은 거이 없는 조용한 비둘기였는데 독이란 당치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수식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상적 사고의 범위를 벗어난 어떤 일에 대한 놀라움의 표시로서 사용 된 감탄사 부류의 말이라고 새겨듣고 있다.(나 행복한 바본가 보다.)
그런데 나 자신은 과연 내가 독한 놈인가 매우 의심스러워한다. 제2차 방사선 치료를 마친 직후부터 이제 암을 다 털어내 버린 것 같은 환각과 마음 한 구석에서 싹트기 시작한 오만함이 있었으니 말로만 투병이었지 여러모로 느슨해진 투병 아닌 생활을 이어온 것이 나의 실상이다.
마치 암 정복의 대가나 된 듯 우쭐대는 마음으로 지내다 예상과 전혀 다른 나쁜 결과의 PET 검사 결과지를 보았으니 그 타격은 배가 되었던 것이며 투병정신은 한 순간에 무너져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어언 두 달이나 방황에 방황을 거듭해온 것이다.
무엇이 독한 놈인고….
걸핏하면 지 잘났다고 우쭐대기나 하는 경박한 놈이었을 뿐이지….

암이란 것이 무 자르듯 뎅강뎅강 잘려나가는 그런 쉬운 병은 아니다. 첨단 분석기기로 검사하여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도 잘못된 일상생활을 되풀이한다면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암이다. 끈질긴 놈이 암이다. 암이라는 악마의 덫에 한 번 걸리면 용하게 덫을 빠져나온다 하더라도 악마에게 찍힌 꼴이라서 한 삶의 끝까지 마음 놓고 지내서는 안 되는 것이 암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혹자는 암과 친구하라, 암을 손님 대하듯 하라 등등 그럴싸한 말을 하기도 하는데 나 자신은 이제 더 이상 암과 친구할 생각도, 암을 귀한 손님 대하듯 할 생각이 없다.
다시 한 번 더 암과 맞서서 싸워볼 생각이다. 두 달 간의 방황 속에서 얻은 결론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다는 방침은 아직도 못 세우고 있지만 이제 마음만은 방향을 잡았다. 암과 항쟁할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암에게 항쟁하는 항암생활을 이어 갈 생각인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하여 적극적으로 암에 항쟁할 생각인 것이다.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암과 대항하는 일에 걸 생각이다.
이제는 식이요법이니 자연요법이니 하는 말들도 용도 폐기할 생각이다. 보다 적극적이기 위하여 주식은 항암밥, 찬은 항암찬, 운동은 항암운동, 여타의 모든 방법 모든 일에 항암이란 관사를 붙여 오직 항암이란 개념 속에 일상생활을 집약 시킬 생각이다. 자는 일조차도 암을 이겨 내기위한 일이니 항암잠이다. 암싸사(다음카페)의 환우들은 나에겐 항암벗들이다. 먼동 터서 하루가 밝아오는 일은 항암아침이 될 것이고 항암으로 하루가 저물면 항암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나도 항암, 둘도 항암, 이어질 모든 것이 항암일 것이다.
모질게도 끈질긴 독한 암들과 항쟁하기 위해서는 나 또한 독한 마음으로 지독하게 항암생활을 펼쳐 갈 생각이다. 순한 비둘기였던 나였지만 이제부터는 독수리보다도 더 독한 비둘기가 될 것이고, 독사보다도 더 독한 개구리가 되고, 독충보다도 더 독한 놈 되어 독한 마음의 지독한 항암노인이 되어볼지어다. 암의 독함, 나의 독함…. 내기 한 번 걸어 보자꾸나.

뒤로월간암 200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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