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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수기 - 김영숙의 생활이야기
고정혁기자2008년 12월 15일 19:25 분입력   총 879913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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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숙_시인. 노래그룹 해오른누리 기획실장. 1992년 월간 문학 신인상.
시집 <슬픔이 어디로 오지?> <고통을 관찰함> <흙 되어 눕고 물 되어 흐르는>이 있음.

**Prologue
암 환자 등록증을 받은 이후부터 어언 9개월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에 달라진 내용을 정리하겠습니다.
암 환자 등록증을 받았다고 해서 자신이 암 환자인 것을 인정하는 시점이 된 것은 아닙니다. 제 경우에는 겉으로 인정하는 척 했지만 진짜로 몸과 마음이 받아들이는 데는 훨씬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첫째, 인정하기

암 환자인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고치기, 실행하기, 적용하기의 단계를 거쳐야 했습니다.
고치기란 생활태도의 개선입니다.
설탕 안 먹기, 백미 안 먹기, 태운 음식 안 먹기, 병조림 통조림 안 먹기, 기름진 중국음식, 서양음식 안 먹기.
결심은 단단했지만 진짜 큰 고통이었습니다. 아주 가끔 사람들 몰래 한 입 가득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다 뱉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정도 쯤이야, 하고 삼키기도 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완전히 굳어지는 데 3개월은 걸렸습니다.
‘이 정도쯤이야’를 하지 않게 되는 단계가 실행하는 단계입니다.
실행하기에 들어서면 먹는 것은 물론이고 숨 쉬는 것, 걷는 것, 사람 바라보는 것, 물건 사는 것, 이런 모든 습관들이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도 한 3개월 걸렸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길을 걸으면서도 생각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생각하고, 커피 관장할 때도 생각하고, 결국에 스스로 내 방법이 조금씩 만들어졌습니다. 적용하기입니다.
이렇게 될 때 거의 인정단계는 마무리되어진다고 봅니다.

**둘째, 지침서 채택

암 환자가 되기 전에는 암에 관한 정보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너무 많아서 혼란스러웠습니다. 읽은 책만 30권이 넘습니다. 좋다는 것도 수백 가지였습니다. 내 스스로의 선택이 옳은 것인가, 불안한 때도 왜 없었겠어요. 그러나 점점 암이라는 것이 결코 단기간의 싸움일 수 없다는 결론에 도착했습니다. 정리된 바에 의하면, 암 진단을 현대의학으로 받기까지 발생으로부터 최소 2년에서 7년이라고 하네요. 저처럼 중증으로 발견된 사람은 발병이 10년 전 쯤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10년 이상 된 상태를 단기전으로 끝낼 수 없다는 객관적인 결론에 도착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자기에게 맞는 지침의 채택이 중요하고, 수없이 많은 이론 중에서 내게 필요한 것을 정리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했습니다. 이 지침서들은 제 생각에는 이용하기 나름이고, 정리하기 나름입니다.
이용하기란, 내가 어쩔 수 없는 주변 환경과 사람과 내 자신까지 내 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내게로 끌어당기는 것을 시도했었는데, 부작용이 많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로 확인되도록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그러면 자기 스타일이 만들어지던데요. 이렇게 되면 전에는 몰랐던 주변의 것들이, 사람들이, 내 자신까지 좋아지는 경험을 하게 되고 즐기기까지 할 수 있었어요.

**셋째, 구체적 적용

▶의생활
가장 확실한 정리는 모든 화학 섬유를 과감하게 버리고 천연소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과도기가 지나면 천연의 인간이 됩니다. 화장은 물론 필요 없습니다. 저는 피마자 오일 하나만으로 마사지와 로션과 선크림, 모든 것을 끝냅니다. 전에 색깔 있는 얼굴이었던 사진들을 돌아다보니 요즘에 저보다 그다지 예쁘지도 않던데요.

▶식생활
모든 지침서에 의하면 유기농을 절대 권장합니다. 시도하려고 애썼습니다. 처음에는 규모를 잘 몰라서 많이 샀다가 못 먹고 썩히기도 했습니다. 못 먹으면 빨리 죽지 않을까 남모르는 마음의 불안이 먹을 것을 자꾸 사서 쌓아두게 되더군요. 이것도 시간이 지나니 능력 밖의 일이라 정돈이 되고 필요한 만큼만 사서 먹고 아끼게 됐습니다. 확실히 스트레스와 먹는 것을 발병의 큰 요인으로 꼽는데, 제 생애에 깨끗하고 좋은 음식만으로 살아가는 이 시절이 호사스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지요. 때때로 특별한 포도요법과 같은 강력한 시도도 상당히 효과적입니다. 장기전에서 확실히 의지를 굳게 하고 몸을 바꾸어주는 기초적인 역할을 충분히 해냅니다. 좀 더 발전하면 자기 메뉴가 개발됩니다. 물론 부지런해야 됩니다.

▶주거생활
환경 개선의 실제 중에서 부담스럽고 실천하기 어려운 일일 수도 있는데, 서민이 쉽게 덜컥 이사하기도 힘듭니다. 제 경우에는 3월에 진단을 받았기에 3월부터 11월까지, 말하자면 봄부터 가을까지 집 바깥을 아주 많이 이용했습니다. 집은 늘 창을 열어 환기를 시켰고 햇빛이 좋은 날은 하루 두 번도 산책과 산행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지침서들을 통해서 내 주변 환경 중에 암을 키운 요소들이 확인되면 개선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렇지만 때로 너무 많이 아는 것이 스트레스를 주기도 합니다. 이산화탄소가 암의 원인이라니 가스레인지를 켤 때마다 신경이 예민해지곤 했죠. 어쨌든 투병에 있어서 햇빛과 바람은 아주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겨울이오니 무언가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군요.

▶대략 맺음말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라는 소설에 보면 자기 자신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강한 소망이 내일 아침 자고 일어나면 오늘의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표현으로 나옵니다. 삶의 영점지대라는 말을 썼습니다. 전들 왜 안 그랬겠어요. 내일 눈 뜨면 다른 사람이고 싶은 날이 물론 있었지요. 그런데 인정하기 과정이 끝나고 나서 결국 그것은 도피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야곱이라는 인물이 나와요. 기독교에서는 너무나 인간적인 ‘속이고, 훔치고, 배반하고, 거짓말하는’ 모든 인간적인 약점을 거쳐서 성화해가는 성숙한 인간으로 변모합니다. 겪어야만 한다면 이겨내야죠. 긍정하면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보이고 변화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섭니다.
목표는 낫는 것입니다. 제가 읽은 여러 권의 책 중에서 인상적인 말이 ‘암은 개성이 강한 병’이라네요. 결국 자기가 만든 병이죠. 성격과, 습관과,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오는. 그러므로 부단히 자기 분석하기를 게으르지 말 것이며 그리고 병이 걸린 것처럼, 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 절대 필요합니다. 여기에 수많은 지침들 중에 자기 기준을 세우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여겨지고, 너무 많이 아는 것보다는 자신만의 룰이 필요하고 누군가 멘토(슈퍼바이저)도 필요합니다. 그 사람, 혹은 자기 신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마음으로 생활해 나가면 훨씬 편안해지지요.
마지막으로 저는 항암주사 한 번 맞고는 보름 만에 머리가 몽땅 빠져서 대머리가 됐을 때, 내 생애에 단 한 번의 대머리일 것이다 생각하고 두건과 모자패션으로 대머리를 즐기고자 노력했습니다. 포도요법 후에 40kg 이하로 몸무게가 줄었을 때는 세계적인 모델의 몸이라 생각하고 절대로 못 입었던 슬림한 청바지를 마음껏 입고 다녔습니다. 지금은 유기농 인간임을 즐깁니다.
여러분은 자기 생의 주인공입니다. 어떻게든 해내세요. 누가 해주길 바라지 말고 스스로 해내세요. 단 한 가지,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라는 생각이 들 때는 과감하게 물리치세요. 고집, 욕심, 이기심이 생각날 때마다 자꾸 빼내버리고 제일 중요한 일부터 순서대로 해나가기 시작하면 실마리가 보일 거예요. 때론 어떤 현상들이 겁먹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들지도 모르지만 모든 나타나는 현상을 ‘아, 병이 낫고 있구나’, ‘명현 현상이네’, 라고 생각하면 훨씬 씩씩해집니다. 자신을 설득하고 주변을 설득하고 생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씩씩하게 살아갑시다. 파이팅!

뒤로월간암 2008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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