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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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 수 없었던 화
고정혁기자2009년 03월 13일 13:53 분입력   총 880229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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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44)|미용업. 야생화사진.
남편(48)|혀암. 식도상피내암. 위상피내암. 간암. 간내담도암. 비장비대증. 간섬유종. 간세포암.

이 글은 2년 동안 암에 걸린 남편과 함께 생명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기록들입니다.
간병기를 쓴다고 하나 아내입장에서 쓰다보면 이야기가 자꾸 곁가지로 빠지지나 않을까 겁이 납니다. 병은 늘 예고가 있었는데 그냥 지나쳐버린 내 무지까지 들추어내야 하기에 힘든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나와 같은 사람, 우리 부부처럼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좋겠습니다.

음식은 그래도 길을 찾아가면 찾을 수 있었지만 정작 길을 잃어버린 건 마음이었습니다. 모든 수치가 좋아지고 음식은 청국장 샐러드를 꾸준히 먹고 녹즙도 효소도 다 열심히 했지요. 무엇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항상 거짓으로라도 웃으려고 노력했고 많이 웃고 참으라고도 참 많이 했습니다. 짜증이 나는 것도 될 수 있는 한 참으라고요.

11월 정기 검진일. 알파페토 수치가 수직 하강. 오랜만에 의사 선생님은 웃는 환한 모습을 보이셨고 기껏 5분 진료였는데 그날은 15분 이상을 투자해 주셨지요. 모든 수치가 안정기에 접어든 것 같다고 하시면서 조금만 더 열심히 노력하자며 지금껏 가장 환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불편한 부분은 없으십니까?”
“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네. 물어 보세요.”
“제가 가끔 화를 내고 싶을 때가 잦아요. 그런데 그 화를 참으려고 하니 조금 힘이 드네요.”
“그럼 안 되지요. 조금 화내는 것은 신경 안정도 되고 스트레스도 날린다 생각하면 괜찮을 겁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간호실에 나와서 복도에서부터 화를 내기 시작했는데 꼬박 두 달을 화를 내었지요. 의사 선생님이 화를 내도 좋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퇴근하는 길이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고 집으로 가는 길이 너무 힘들어 아이들을 불러내서 함께 놀다가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환자니까 하고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참으라고 하면 의사 선생님이 적당한 화는 참지 말랬으니까 화를 내도 된다고 우기면서 계속 화를 냈지요.
억지를 써서 화를 낼 것을 만들었고, 길에서도 집안에서도 눈을 뜨면 짜증이요, 모든 것이 자신이 생각한 선 안에 들어와야 했고, 우기기 시작하면 입안에 거품이 나올 때까지 합니다. 말을 하고 억지를 쓰기 시작하면 자신의 논리로 사람을 꼼짝 못하게 했지요.
악몽 같은 하루하루였습니다. 이제 겨우 몸을 추슬렀는데, 얼마나 당신이 귀하고 소중한데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해서 몸을 상하게 하냐고 달래고 또 달래도 소용이 없었지요.

큰 애와 아빠 사이에 흐르는 긴장이 집안을 날마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했고 열네 살 아이에게 참고 이해하라면서 나는 날마다 아빠 못지않은 강요를 딸아이에게 했습니다. 아이는 그럴수록 노래에 빠져 갔지요. 컴퓨터에 매달리고 공부하기 싫다고 하고 아빠가 아픈 것을 알지만, 억지까지 다 이해하라는 상황을 아이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지요.
가끔 불러내서 이야기했습니다. 우리의 현실을요. 암환자가 있는 가정이고 너는 공부해야 하는 학생이고 아빠이지만 환자인 것을. 우리가 안아 주어야 한다고, 아빠는 죽음과 싸우고 있다고, 극한 공포와 고통을 가족이니까 함께 할 수밖에 없고 함께 견디어야 한다고, 서로에게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럼 아이는 눈물 가득 머금고 말을 합니다.
“엄마, 엄마는 남편이니까 살리려고 한다고 쳐. 그럼 난 뭐야? 아빠 아프고 난 뒤 엄마가 우리랑 함께 놀거나 쉬는 시간 있었어? 하루도 놀아 본 적 없잖아? 아빠 아프고 난 뒤 엄마는 한순간도 우리와 함께 해준 적 없잖아? 엄마는 날마다 아빠 아빠 하지. 나도 알아. 아빠 아픈 거.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잔소리에 엄마 얼굴 보기도 어렵고 난 너무 힘들어.”

그때는 아이의 아픔은 보이지 않았고 남편의 얼굴과 눈에 선 핏발 그리고 다시 차오르는 복수, 다시 생기기 시작하는 붉은 반점에 나는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병이 깊어 간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날마다 화를 참지 못했고 어떤 날은 화를 내다가 목에 튀어나오는 울퉁불퉁한 동맥을 보고 남편을 달래야 했습니다.
자꾸 화를 내면 피가 산성화되고 동맥이 약해져서 터지게 된다고 이야기해도 가쁜 숨을 쉬어 가며 입술에 하얀 막이 생길 때까지 화를 내고 했지요. 남편의 몸과 마음은 통제되지 않는 듯했고, 날은 춥고 운동도 거의 하지 못하고 자꾸 게으름을 피우기까지 되었습니다.

막내 생일날 축하 케이크를 샀습니다. 손뼉치고 노래하고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남편은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지요. 거의 절반을 다 먹고서야 멈췄습니다.
어떻게 그게 다 들어가? 당기니까 먹었지. 그래도 너무 심하잖아.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더라. 신경 쓰지 마.
그리고는 30분 뒤부터 화장실을 들락거리다 사흘 동안 거의 빈사 상태까지 갔지요. 홍시를 먹고 곶감 사서 먹고 해도 설사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얼굴은 움푹 파이고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일 년 넘게 뛰어다니며 남편 살리겠다고 버둥거린 게 케이크 반 쪼가리에 다 날아가다니…. 믿을 수 없었지만, 현실이었습니다. 정기검진하는 날이 다가와 병원에 가니 암수치가 2780/135까지 떨어졌었는데 의사 선생님은 거의 무표정이었고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심판관이나 판사 같은 의사 선생님 앞에서 저희는 죄인 같았습니다.
“간에 암세포가 8개가 늘어났어요. 그중에 급한 놈이 네 개입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관찰하여야 하고요. 담도 쪽에도 암이 자라고 있네요. 이것은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색전술을 해야 합니다. 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지요. 남편은 처음으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화를 내서 그렇지만 통제가 되지 않았다고. 괜찮다고 했지만 떨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남편과 앞날을 의논해야 했습니다. 남편은 색전술을 한다고 했고 저는 지금 상태에서 간을 건드리는 것은 도박이니 차츰 상황을 보아 가면서 하자고 했습니다.
일단 일주일 뒤로 일정 잡은 것을 이주 뒤로 미루어 달라고 간호사실에서 거의 생떼에 가깝게 억지를 써서 미루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마지막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색전술을 하면 죽음도 준비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색전술을 미룰 수는 없을까, 어찌하면 남편을 설득할까, 날마다 고민을 했고 남편 설득을 했지요.

아이들과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프랑스 미술전을 구경하고 신나게 놀아 주고 아빠와 엄마 여행을 간다고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남편과 둘이서 여행을 떠났습니다.
살아생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하면 더 살 수 있을까?
어찌해야 남편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머릿속은 온통 이런 생각들로 가득한 채.

무작정 끌고 나와서 부산까지 달렸고 통영으로 거제로 향했습니다. 통영 동생집에서 거의 빈사 상태에 빠져 버린 남편을 뉘어놓고 대체의학에 대해서 잘 아신다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경주에 가면 침으로 다스리는 분이 있다고 했고 또 대구에 가면 또 다른 분이 있고, 보성에 가면 어성초 효소와 진액으로 다스리는 사람, 또 다슬기로 다스리는 사람 등 말해 줍니다.
그분 말씀으로는 전부 다 신의 경지에 다다른 이들 같지만 저는 한 사람도 믿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일단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을 찾아가기로 하고 무작정 달렸습니다. 통영에서 순창을 향하는 데 새까만 밤에 차 한 대도 지나지 않습니다. 옆으로는 섬진강변으로 눈이 쏟아져 내리는데 운전대를 잡은 머릿속은 절망으로 가득했습니다. 한순간 이대로 저 강물에 빠져 버리면 아무런 근심 걱정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소스라치게 놀라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도록 밟았던 페달에서 발을 떼었지요. 벌 받으려고. 세상에 아이 셋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몹쓸 생각을 하다니 자책하며 옆을 보니 남편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지요. 그 다음 날 친정아버지와 같이 남편이 수술 후에 쉴 곳을 찾기로 했습니다.

남원에 수양 시설에 가니 남편은 너무 답답할 것 같다고 싫다 합니다. 황토로 집을 지었고 나무를 땔 수 있게 해 놓은 곳으로 제 맘에는 아쉽지만, 다음에 언제든지 남편이 오면 받아 주겠다는 말을 뒤로하고 떠나와야 했지요. 지친 남편은 낮잠을 자도록 하고 밤에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옥정호를 지나갑니다.
“저기 저 집 좋지 않아!” 그러자 웬일로 남편이 한번 들어가 보자고 하여 오던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인기척에 무턱대고 지나가던 사람인데 방을 빌려달라 했습니다. 선선히 들어오라는 말에 방안으로 가니 따뜻한 차 한 잔에 마음씨 좋아 보이는 부부가 웃으며 맞아주시고 그렇게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앉아있었지요.
자정이 다 되어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 집에는 별채로 방이 있는데 황토로 지었다고 했습니다. 참 좋아 보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이 스르르 감기는 것을 참다가 하는 수 없이 남편에게 운전대를 넘겼습니다. 눈을 감으니 생각이 정리되더군요.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환자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요. 정말 절실히 깨닫고 나니 오히려 무기력감에 마음이 무거워 감당하기 어려웠지요. 너무도 어렵고 무거운 짐이 어깨에 얹힌 것 같았고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만 가는 현실을 이겨내기 어려웠습니다.

돌아오고 나니 색전술 하는 날은 다가옵니다. 입원 이틀 전날 늦은 밤, 남편에게 느닷없이 오늘 밤 정읍 산내 그 집에 가자고 했습니다. 남편이 자신이 없었답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저는 힘들어하는 남편과 함께 그 밤, 지치는 줄도 모르고 정읍으로 달렸습니다.
새벽 두 시경. 황토방은 따뜻했고 흙냄새 맡으며 오랜만에 꿀 같은 잠을 잤습니다.

뒤로월간암 2008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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