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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이야기] 김경희의 간병기⑨ 즐거운 나날들
고정혁기자2009년 06월 03일 15:54 분입력   총 881689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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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44)|미용업. 야생화사진.
남편(48)|혀암. 식도상피내암. 위상피내암. 간암. 간내담도암. 비장비대증. 간섬유종. 간세포암.

이 글은 2년 동안 암에 걸린 남편과 함께 생명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기록들입니다.
간병기를 쓴다고 하나 아내입장에서 쓰다보면 이야기가 자꾸 곁가지로 빠지지나 않을까 겁이 납니다. 병은 늘 예고가 있었는데 그냥 지나쳐버린 내 무지까지 들추어내야 하기에 힘든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나와 같은 사람, 우리 부부처럼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좋겠습니다
.


투병 중에 즐거운 날이 어디 있으랴 싶지만 그래도 남편의 긴 투병 중 이때가 가장 행복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두 분의 형님이 계시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고 저도 여유로웠지요. 어쩌면 저만 여유로웠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좋은 분들과 함께 한 시간은 남편의 투병에 큰 획을 긋게 해 주었답니다. 제가 산에 가니 주인집에서 묻더군요.

“채소 정도는 심어서 먹어도 괜찮지요?”
“네. 땅만 있다면 심어 먹으면 좋지요.”
“그럼 우리 산 한쪽 귀퉁이를 개간해 놓을 테니 심도록 하세요.”
“고맙습니다.”

그다음 주에 갔더니 양지쪽에 밭을 만들어 놓았는데 한 분 아줌마는 농사에 대해서 아주 잘 아시고 또 한 분은 그냥 심는 재미에 신이 나셨습니다. 방울토마토와 케일, 적색의 양배추, 오이, 토마토, 비트, 들깨, 무, 배추, 고추, 청경채, 파…. 고랑마다 심어 놓고 모두 너무 즐거워하셨지요. 저는 가져간 상추씨와 열무, 쑥갓 등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하루하루 싹트는 것을 지켜보니 쑥쑥 자라는 채소들은 경쟁하는 듯했고, 산속의 겨울은 뒤로 물러나고 어느새 성큼 봄이 왔지요. 근처에 구경거리도 많고 산속의 봄은 향기와 같이 시작합니다. 호수의 아침 안개는 한 폭의 동양화를 떠오르게 하고, 이름 모를 꽃들은 지천으로 널리고, 매화와 갯버들을 시작으로 온 산이 꽃으로 뒤덮여 갔지요.

가까운 만일암으로 회문산 휴양림을 자주 다녀오고, 강천사에도 자주 놀러 가고 장어도 먹고 그야말로 남편에게는 꿈같은 하루하루가 되었습니다. 친정 부모님은 한시름 놓았고 저도 안도하고 있었지요. 주변에 녹즙거리가 넘쳐나고 덕분에 효소 담그기도 한결 쉬워졌습니다. 옆방 아줌마에게 녹즙거리, 산야초와 약초 효소 담그는 법을 하나하나 알려주고 산꼭대기 가까이 살고 계신 할머니께 놀러 가고…. 남편은 투정이 줄었고 산에 가서 엉겅퀴도 캐고, 늪지에 있는 돌미나리도 뜯어오고, 녹즙도 잘 챙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옆방 형님은 마음을 다스리기로 의기투합하여 가까운 교회를 다니기로 해서 저를 놀라게 했지요. 호수 위에 있는 예쁜 교회는 마음씨 좋은 시골 아줌마와 아저씨가 계시고, 감잎차를 잘 만드는 아줌마, 팥떡을 유난히도 잘 만드시는 분도 계십니다. 교회 가는 날에 쑥을 넣어서 쑥 범벅도 해놓고 채소도 고르게 무쳐놓고 산나물도 해놓았지요. 남편에게 묻어가는 저도 마냥 신이 났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아주 맛있는 것을 많이 먹고 와서 남편은 꼭 탈이 났습니다. 4주를 열심히 다니고는 더는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맛있는 음식을 보고 안 먹을 수도 없고 참자니 참을 수 없고 해서 결국 매번 탈이 나 교회를 못 다니고 산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즐거운 날은 빨리도 가나 봅니다. 온 산에 벚꽃도 피고 복사꽃도 만개합니다. 평온한 나날이 아침 안개처럼 하염없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돌배 꽃은 유난히도 흰빛을 품고, 아침 물안개가 호수 위를 가득 덮어갈 때쯤 시골장터에 세 분이 놀려 가셨지요. 찐빵 아줌마와 순창 장터의 순댓국집. 그 순댓국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세 분이 한 그릇씩 드셨습니다. 다른 분들은 괜찮은데 남편만 탈이 나고 말았습니다. 윗배가 볼록하고 숨이 가빠지고 소화도 안 된다고 연락이 옵니다. 급한 대로 효소를 먹고 관장을 하고 지내보라고 했는데 한 삼일 뒤 전화로 이제는 편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음날 혼이 덜 났는지 냉면을 사먹었답니다. 이때 제대로 걸려서 꼼짝을 할 수가 없었지요. 배가 불러오고 숨도 못 쉴 정도로 힘들어했습니다. 복수가 차고 더는 돌아다니기도 힘들만큼 고통스러워졌습니다. 다급해져서 여기저기 자문해보니 단식이 좋다고 하는데 남편은 힘들어하면서도 단식만은 절대로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럼 죽을 먹어 보자고 했고 옆방과 아랫방 아줌마 두 분이 교대로 녹두죽과 현미죽, 깨죽 등을 끓여주었습니다. 세 아이와 가게에 매여 남편 옆에 있지 못하는 저는 그분들이 너무도 고마웠습니다. 즐거운 시간은 가버리고 고통의 시간이 소리를 내면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아랫방의 아저씨는 복수에 체증과 같은 답답함으로 힘들어하셨는데 제가 내려가면 고마운 마음에 손으로 배를 만져주고 쓸어주고 효소를 마시게 했는데 희한하게도 금방 좋아졌지요. 색전술을 세 번 하고 난 뒤에 오셔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고 복수도 햇볕에 나가서 일광욕하니 많이 가라앉았지만, 복부의 체증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랫방 아저씨는 다른 곳으로 가셨고 남편과 옆방 아저씨와 두 분만 남았습니다. 복수가 찬 남편은 먹기만 해도 체증에 시달렸고 죽으로 겨우 연명하는데 기력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져 갔습니다. 저는 또 다른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친정동네에 오랫동안 암으로 씨름하고 있는 아줌마가 한 분 계셨는데 정말 다 죽어가게 말랐다가-친정엄마의 표현으로-그 즈음에 건강해지셨습니다. 친정엄마의 권유로 찾아갔습니다. 남편을 살려야 하는데 두려울 게 무엇이 있을까요. 어떤 방법으로 건강해진 것인지 궁금했고 식이요법도 궁금했습니다.

늦은 시간에 찾아갔는데도 반겨주신 그분은 난소암 3기로 이제 만 3년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가끔 통증은 있지만 견딜만하다고요.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신 분인데 식이요법도 중요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속을 비우는 단식을 한다고 했지요. 그분이 이야기해준 방법과 풍욕과 맨손으로 하는 기체조, 붕어운동 등 다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그분이 가서 교육을 받았다는 <민족생활의학회>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망설일 수 있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분이 민족생활의학회 회장님이신 장두석 선생님께 직접 전화를 드렸고 마침 광주 유스호스텔에서 교육 중이라고 해서 남편의 입소를 결정했지요.

다음날 아침, 남편은 겁을 먹고 있었고 저는 그분처럼 암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고 내가 맞서고 다스릴 수 있는 대상이다, 다만 약간의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병임을 인정하면 된다, 운동과 밝은 생활 그리고 건강한 식생활을 한다면 그분처럼 얼마든지 암이 있다 해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며 설득을 했습니다.

혼자 낯선 곳으로 가서 단식해야 한다니 남편은 엄두가 안나 망설였고, 저는 전화로 전해오는 장두석 선생님의 호통에 너무도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제가 함께 갈 수 없고 남편 혼자 보내야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불호령이 떨어졌지요. 부부가 함께 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가진 게 없고 제 손으로 돈을 벌어야 하니 함께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암환자인 남편을 어떻게 혼자 보내느냐, 그런 사람은 받아줄 수 없다고 선생님은 전화로 통보했지만 이런 사실을 저는 남편에게 알릴 수 없었습니다.

제게 보이는 길은 오직 그 길 뿐이었습니다. 다른 길을 보이지 않았고 뒤도 돌아볼 수 없는 낭떠러지에 서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말도 많았지만, 저는 귀도 막고 눈도 감았습니다. 꼭 그래야만 남편의 살길이 보일 것 같았고 다른 모든 길은 암흑과 같았지요.

남편을 두고 올라오는 길에 마음이 너무 힘들어 전주병원에 있는 친구와 오랜 통화를 했습니다. 혹시나 하고 남편의 위급 시에 부탁했던 친구였지요. 친구는 복수와 복수 후에 오는 여러 가지 증상과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차근히 말해주며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며 격려해주었습니다.

저는 소리 없이 울었고 전화기 너머로 전해오는 친구의 따뜻한 위로는 온갖 부정적인 마음을 긍정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너무 힘들고 아픈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고 다시 힘을 낼 수 있도록 채워주었습니다.

내게 그런 얘기를 해줄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것에 감사하며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모든 두려움을 잊어버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주인집에서 신태인 역까지 태워 주었고 혼자 몸으로 기차를 타고 광주역에 도착해서 제게 전화했지요. 교육장에 어떻게 가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는데 아기가 되어버린 듯했습니다. 우선 택시를 타고나서 기사님 전화를 바꿔달라고 한 뒤 택시기사님께 도착지인 광주 유스호스텔을 말씀드리고 남편에게는 문자로 장두석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남겼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배짱이 나왔을까 싶었는데 혼자 온 남편을 장 선생님은 하는 수 없이 받아주셨습니다. 환자 앞이라 싫은 소리 못하겠다고 하시면서 전화로 제 목소리는 듣기도 싫다고 하셨지요. 그렇지만,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남편을 살릴 길이 보이지 않는데요. 남편의 입소 후, 교육비를 입금시키고 남편이 단식과 교육을 마치고 돌아오기까지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뒤로월간암 2008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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