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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 이야기] 보석보다 귀한 내 아들 하규
고정혁기자2009년 07월 01일 13:14 분입력   총 881785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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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귀 | 아들 하규 간모세포종

병원에서 집으로
마지막 항암은 원자력병원에서 했다. 약의 용량이나 종류나 투여 방식이나 무엇 하나 변한 것이 없건만 아이는 그날 피자를 시작으로 메론, 자두, 천도복숭아, 슬러시와 과자를 조금씩 먹는다. 다른 사람들이 밥을 먹어도 피할 생각 없이 어쩌면 색다른 것은 먹고 싶은 듯이 있어서 주면 먹는다. 희망이란 것 정말 좋은 것이다.

6개월의 짧고도 긴 여행이 끝나 집으로 돌아왔다. 완치 판정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금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지고 걱정하면서 조바심내고 싶지 않았다. 잘 견뎌준 아이에게 박수를 보냈다. 다 큰 아이는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잘 견뎌줘서 고맙다고 했더니 이 녀석은 이뇨제 때문에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이 제일 힘들었고 다른 것은 별로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 항암일정 중 마지막 스케줄인 ADRI를 떼고 나서 아이는 내게 엄마,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하더니 제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같은 인사를 했다.

치료 종결 후 마지막 외래에서 선생님은 그동안 치료받느라 고생했다, 이제 치료는 끝났으니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아이는 환호성을 지른다. 숨 쉬고 있음을,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음을 감사하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아이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먹기 힘든 각종 건강식품을 먹고 나는 나대로 콩나물과 새싹채소들을 기르고 요구르트와 두부를 만들어 먹이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일상으로 돌아가 친구들처럼 살라고 했지만, 아이도 외식은 가급적 줄이고 몸만들기에 들어갔다. 6개월쯤 쉬고 나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자퇴를 했으니 검정고시도 보고. 재수학원에 등록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정기검진을 받으러 다니면서.

다시 재발, 수술 그리고 방사선과 항암 치료
정기 검진일이 다가오면 그 불안감이라니…. 2005년 1월에 발병하고 2006년 4월이 되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아이가 어깨가 다시 아프다고 하니 불안감이 또 엄습해왔다. 정기검진일이 되어 선생님께 아이가 어깨가 아프다고 말씀드렸다. 처음 발병 때와 상황이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검사결과 아무 이상 없으니 암과 연결하지 말고 통증치료만 하라고 하셔서 동네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 받고 한의원에서 침을 맞기도 하면서 두 달이 지나갔다.

통증이 멈춰지질 않고 계속되니 남편이 정형외과를 다니더라도 서울대병원으로 가보라 해서 찾아간 그곳에서 간이 약한 사람이니 약을 쓰려고 해도 일단 초음파 검사를 해보고 하자고 해서 한 초음파검사에서 재발이 발견되었다. 그 교수님 너무 야속하고 미워 나는 앉는 자리마다 불평을 쏟아내는데 아이는 이것이 교수님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실력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라며 불평하지 말라고 나를 나무랐다. 두어 달을 돌아다니던 바람에 척추까지 전이되어 종양이 신경을 누르는 바람에 아이가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다리를 휘청거렸었다. 다시 간 절제와 척추에서 종양을 제거하고 방사선치료와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재발의 경우 항암 스케줄이 없다. 기약 없이 항암을 하는 것이다. 하다가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같이 있던 아이들을 보니 재발의 경우 치료를 끝내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가 많아 그 후로는 선생님과의 면담은 내가 자제를 하고 거의 묻지 않았다. 겁이 났다.
하지만 그 기약이 없다던 재발 항암이 끝났다. 모두 22번의 항암이 끝난 것이다.

면역 치료하러 일본으로
우리는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하던 중 일본에 면역치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면역치료에 들어가기로 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항암으로 암세포를 다 죽였으니 이제 면역력만 기르면 싸움은 끝이 난다는 생각으로 하루도 지체할 수 없이 수속을 하여 일본 규슈로 향하였다.
규슈의 구마모토는 하루에 왕복이 가능한 거리이지만 우리는 오랜만에 맞는 이 시간을 즐기기로 하고 아이와 나는 2박 3일씩 여행을 하였다. 여행을 많이 다녀봤지만 그렇게 신나고 기분 좋은 여행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6번이 한 스케줄인데 처음에는 채혈하고 와야 하기에 7번을 간다. 7번을 가는데 3회 차 가기로 해놓은 상태에서 다시 재발이 되었다. 아, 그때의 비통함이라니….
그때, 태풍이 온다던 그 10월에 나는 기도를 간절히 했다. 태풍의 힘으로 비행기를 밀어서 떨어뜨려 달라고. 일본에 가는 비행기를 타면서 하규와 내 여행보험을 아주 크게 들어놓고 보험증서를 인쇄하여 화장대 위에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우리는 비행기를 탔다. 죄 많은 기도라 응답받지 못했지만 그때의 그 간절함은 뭐라 표현할 수 없다. 이 아이를 어찌 혼자 보낼까, 같이 가면 덜 무섭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남편과 남은 아이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지경이니 같은 비행기를 탄 승객들은 말해 무엇하랴.

사이버나이프…, 폭풍 속에서 견디기
다시 병원을 찾았는데 신경외과 선생님이 수술하기에 애매한 곳이라고 하시면서 수술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하셨다. 방사선 치료도 10회 받은 터라 이상은 더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하셔서 원자력병원에서 사이버나이프 시술을 받기로 했다.
사이버나이프시술은 장점만 있고 단점이라면 오직 고가인 것만으로 광고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막상 시술을 받으려니 일반 수술과 마찬가지로 갖가지 위험 요소가 있었고 사인을 해야만 받을 수 있는 시술이었다. 그래도 받아야 했다. 척추종양은 종양이 신경을 눌러 하반신이 마비되지만, 수술로 종양을 제거하고 나면 다리의 신경이 돌아오는데 사이버나이프 시술은 종양이 죽었어도 그 자리에 신경을 누르고 있기 때문에 다리 신경이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쯤 신경이 돌아오느냐고 했더니 죽은 세포가 혈관을 타고 다 내려와야 한다고 했다.

2008년 4월 1일 휠체어에서 일어나 드디어 걷기 시작하다
아이는 이제부터 휠체어를 타고 생활을 한다. 물을 많이 먹으면 도움이 된다고 하니 아이는 하루에 수도 없이 물을 마셔댄다. 시간이 가야만 될 거라 하여 집에 있었는데 곁에서 자꾸 서울대 병원으로 가보라고 하여 다시 찾은 신경외과에서 2008년 1월에 재수술을 하고 재활훈련에 들어갔다. 아이는 팔을 이용하여 생활하는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 훈련과정을 보는 심정은 참으로 착잡했다. 어쩌다가 내 아들이 저런 훈련을 받고 있나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지만 정작 아이는 씩씩했다. 아니 엄마를 위해서 씩씩하고 있었다. 아이는 교수님과 재활치료사께 언제쯤 다리 훈련을 시킬 거냐고 물으니 대답을 하지 않다가 아주 어렵게 말씀하셨다. ‘너와 같은 환자는 아직 서는 것을 보지 못했다’라고.

하지만 아이는 자신은 걸을 수 있다고 믿고 기도하고 노력을 했다. 휠체어에 앉아서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있어야 다리 재활훈련에 들어가는데 그것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아이는 얼마나 노력을 하는지 어느 날은 엄마, 나 다리를 들 수 있을 것 같아. 피아노 페달을 밟아 볼까? 하더니 어렵게, 어렵게 페달을 밟았다. 서지도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아이는 본인의 의지로 다섯 발자국까지 걷게 되었다. 정말 기뻤다.
하지만 맞는 항암제가 없는 상태라 수술만 하고 퇴원을 해야 했다.

2008년 5월 15일
수술을 하고 남아있는 암세포를 약으로 제거해도 재발을 하는데, 맞는 약이 없어 항암을 하지 않고 있으니 다시 5월에 재발을 하였다. 아이가 그 징후를 느꼈다. 아직 병원에 갈 시간이 아니었는데 아이는 일주일 전부터 CT를 찍으러 가자고 했다.
마음이 불안했지만 아이에게 그렇지 않을 거라고, 다른 데로 신경을 돌리라고 얘기를 하던 중 다시 다리가 휘청거려 응급실로 달려가 다시 수술을 했다. 병원치료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후로 아이는 병원에 가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옆에서 다들 걱정하시지만 수술이 장난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인데 그런 수술을 연중행사도 아닌 월중행사로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도 하자고 거들 수도 없다. 끝이 없이 재발하면 수술하고, 또 재발하면 수술하는 이 일을….

2008년 6월 27일
재활훈련을 집에서 하면서 발걸음을 떼기도 했었는데…, 잘 지내고 있었는데…. 다시 다리가 마비가 온 것이다. 이번에는 일주일의 기한도 없이. 한 시간 전에도 잘 지내던 아이가 갑자기 다리에 마비가 와서 참 당황하고 목 놓아 울었다. 병원에는 가지 않기로 하고 기도원을 다니고 있었다.

2008년 12월 9일 보석보다 귀한 하규야 조금만 더 견디자
9월까지 성경을 3독 했던 아이는 이후로는 팔이 불편해져서 성경을 들고 읽을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경추로 전이되었던 모양이다. 10월이 되니 팔이 아파 아이는 잠을 잘 수 없어 고통스러워했지만 병원은 가지 않고 기도만 받으러 다니며 그 고통을 이겨냈다. 11월 하순경 가래가 호흡을 막아 응급실에 가서야 경추로 전이된 것을 알았다.

아이는 응급실에서 그날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일주일을 견디다 집으로 왔다. 세 번의 수술을 맡으셨고 아이를 아들처럼 대해주셨던 교수님이 휴일인데도 소식을 듣고 오셨다.
참 안타깝다고 하셔서 ‘선생님, 제가 병원을 쭉 다녔으면 이런 상태가 되지 않았을까요? 저의 선택이 잘못되어 이렇게 되었나요? 저는 한 달 살리자고 한 달 더 고통을 받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더니 선생님은 ‘잘잘못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선택을 하셨어도 결과는 같았을 겁니다’라며 ‘저 녀석이 갈 때 고통이라도 없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방법이 없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라고 하신다.
이후 중환자실에서 폭풍처럼 밀어닥치는 위기를 넘기고 우리는 퇴원을 했다.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간절히 안고….

4년하고도 15일을 투병했다. 아이는 사는 동안 참 많은 일을 했다. 자기는 아프면서도 걸어다니는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친구들의 고민도 상담해주고 군대 가는 후배에게 전도하여 그 후배를 군종으로 있게 만들고, 짜증내고 슬퍼하거나 불평불만 하는 대신에 엄마에게 사랑한다, 고맙다, 엄마가 아니면 누가 나를 이렇게 돌봐주겠느냐고 감사해 했다.

아이는 하루의 반 이상 기도를 했다. 성경을 들고 읽을 수 없으니 듣는 성경을 들었다. 가끔은 조금씩 읽어주기도 하고 CCM을 듣기도 하며 하루를 보냈다.
등으로 전이되면 하반신을 못 쓰고, 경추로 전이되면 상체도 못쓴다고 하더니 아이는 꼼짝없이 누워 지내게 되었다. 누워서도 불평이나 짜증내는 일 없이 아이는 늘 감사기도를 드렸다. 살아있음에 당하는 고통이라면 그것도 감사하다고…. 다리를 못 쓸 때는 ‘엄마, 팔과 다리 중 다리의 쓰임보다는 팔의 쓰임이 훨씬 많은데 팔을 쓸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해요’하더니 팔을 못 쓰게 되니 ‘암세포가 뇌로 전이되지 않아 이렇게 엄마랑 얘기도 하고 기도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하냐’라고 하던 아이였다.

아이는 치료를 받으며 조기 졸업을 하였다. 일본공대 국비유학생으로 가려던 공부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가 일본공대 국비유학생은 나이제한에 걸려 할 수 없어 미국 유학 쪽으로 방향을 돌려 SAT를 준비하여 수Ⅱ는 만점을 받아놓았다. 그러면서 동아일보와 백병원에서 주최하는 투병문학상에 우수상으로 당선되는 기쁜 일도 있었다. (2007년 7월 23일 동아일보 A23면)
또, 한국메이크어위시의 도움으로 ‘생각심기’라는 일종의 투병교과서를 만들어 아픈 아이들에게 병에서 이기려면 이렇게 하자는 본인의 다짐이기도 한 책을 만들어 투병 중인 아이들에게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엄마교육(?) 시키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 가도 천국에 가겠지만 나를 보내고 엄마가 머리 풀고 정신없이 다닐 것을 생각하니 그것이 가장 염려된다고. 또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일으킬 것이다. 그렇지만 만의 하나 그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엄마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떠나면 안 된다고. 2100년 시점에서 보면 바로 오늘 태어난 아이도 천국에서 만난다, 엄마 나 만나려면 신앙생활 잘해서 꼭 천국에 와야 한다며.

2009년 1월 29일 웃으면서 천국으로
참 밝고 늘 소망에 찬 모습으로 잘 먹고 잘 지내다가 떠나기 하루 전에는 몸져누웠다. 누운 지 두어 달 되었지만 운동도 시키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주었는데 하루 전날 운동을 하지 못하겠다고 그냥 놔두라고 하더니 잘 먹던 밥도 두어 숟가락씩 먹고는 먹지 못했다. 그래도 아이가 떠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다.
말기 암환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보았기에,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를 알고 있었기에, 아이가 이 평안 중에 떠나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모르핀을 맞아도 진통이 되지 않는다고들 했었다. 몽롱한 상태에서도 통증을 호소한다고들 했었다. 그런데 아이는 떠나는 날까지 진통제 한 알 없이 평안 중에 있었다.

새벽에 힘이 든다고, 엄마 나 많이 힘들다고 하기에 어찌할 줄 몰라 하다가 119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가는 도중 아이는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한 이십 여분 힘들어했을까, 그 후로는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하여 링거를 맞고 산소호흡을 하면서 아이는 잠시 의식이 돌아와서 미리 와 계시던 친지들과 이생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아이의 귀에 대고 ‘너는 언제나 엄마의 기쁨이었고 자랑이었으며 행복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잘못해준 것이 많아 미안하다’라고 했더니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면서 ‘엄마 사랑해요’라고 했다.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주치의가 CT를 찍고 오라 해서 CT실 앞에서 기다리는데 아이는 웃는다. 그래서 내가 ‘하규야, 좋은 꿈꾸니?’ 라고 하면서 흔들었는데 아이는 미동도 없다. 천군천사가 마중 나온 것을 본 것일까, 아니면 천국 문이 열리는 것을 본 것일까? 아이는 그렇게 웃으며 친구 아빠가 쓰신 ‘고별시’와 동생이 쓴 ‘형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으며 저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오열 속에 이 세상과 작별하고 그토록 사랑하던 하나님 품에 안기었다.

보석보다 더 귀한 하규를 우리 부부의 아들로, 민규의 형으로, 또 선교사로, 천사로, 23년간 보내주셨다가 이제 그의 영혼을 받으신 주님 감사드립니다.

불꽃처럼 살다간 내 아들
장한 내 아들 하규
너는 언제나 엄마의 기쁨이고
자랑이며 행복이었다

아까운 내 아들
참 아까운 내 아들 하규야
천국에서 만나자
하규야
편히 쉬어라

뒤로월간암 200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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