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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아홉, 재발과 전이를 넘어 큰사랑을 얻다
고정혁기자2009년 11월 12일 17:11 분입력   총 884175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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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미(39세) | 침샘암. 다발성 폐 전이.

**마흔일곱 번째 생일을 맞는 나의 마음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간 것 같은데 돌아보니 26개월 남짓이다. 꿈을 꾸듯 흘러간 시간을 돌아보며 이렇게 행복한 웃음으로 지금의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하루를 맞을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정말 꿈을 꾼 듯 지나온 26개월에 목이 메어온다.

나는 결혼 14년차의 아주 평범한 주부였다. 아니,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결혼생활이 생각처럼 평범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최악으로 치달은 2006년은 내게 너무 고통스러운 한해였다. 더 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할 필요도, 마음도 없어서 난 친정으로 가버렸다. 그때는 세상을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묻는다면 그냥, 이라는 말뿐이었다. 그냥, 나는 그렇게 살았었다. 그때, 오른쪽 귀 밑으로 혹이 있었다. 한 7~8개월쯤 되었나. 마음이 지옥이었던지라 만져지면 그런가보다 하고는 넘어가곤 했는데 우연찮게 동네 병원을 찾은 김에 여기에 이렇게 혹이 자리 잡았다고 말했더니 의사가 보고는 놀라며 빨리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그때가 2006년 12월경이었다. 종합병원을 찾아 초음파를 찍었는데 수술을 해야 한다며 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길래 충북대병원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서 알 수 없는 검사를 여러 차례, 두 달이 넘도록 이 검사, 저 검사를 해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 결국, 다시 조직검사를 시작하여 악성종양으로 판정을 받았다. 2007년 2월이었다. 내 심정은 차라리 잘됐다 싶었고 속이 후련해지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기도 안찰 노릇이지만 그렇게 암에 무지했던 나는 아무런 걱정도 없이 그곳에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받고 일주일 후 ‘이하선암 악성종양. 그리고 임파선 전이’라는 최종소견을 들었다. 다시 이어진 방사선 27회를 끝으로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더 살고 싶지도 않았건만 어린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니 이제는 다 놓아버리고 편안하게 좋은 생각만 하며, 아이들 엄마로 최선을 다해 살고 싶어졌다. 그토록 내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신랑에게도 서로 지난날은 다 잊고 잘 살아보자고 말했다. 잘 살고 싶어졌다. 그렇게 새 삶을 살았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고, 좋은 아내가 되고 싶었다. 암은 그렇게 나하고는 무관하게, 치료란 모두 끝난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어느 날 다시 목 주위에 무언가가 작게 잡히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나는 서울대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다시 시작했고 다행히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면서 암환자들과 만나 서로 정보도 나누고 웃기도 했다. 장기 쪽이 아닌 침샘으로 생긴 암환자는 정말 드물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서울로 정기검진을 다니다가 2008년 6월 MRI 검사에 임파 전이 판정을 받고 그 다음 달에 수술을 했다. 수술시간만 15시간. 그 길고도 긴 시간동안 밖에 기다리던 식구들은 너무도 힘들었을 텐데 난 편안하게 잠을 잤던 기억만 난다.

수술 후 의사선생님 말씀이 임파로 전이되었고 원발 부위에 재발되어 더 오래 걸렸다며, 인면 신경도 끊고 다른 신경과 이어주는 수술까지 했다고 한다. 이제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내 암은 암 조직 중에서도 아주 성질이 못된 놈이라 항암이 듣질 않는단다. 항암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그냥 정기검진만 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대신 수술은 아주 깨끗하게 잘 되었다고 한다. 내 암 조직이 폐로 잘 전이된다고 해서 폐 검사도 했었는데 다행히 폐가 깨끗했었다.

그렇게 수술 후 퇴원하고 몸이 회복되지 않아 친정에서 지내던 중 신랑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새벽 출근길에 사고가 나서 응급실로 달려가니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간 손상이 심해져 중환자실로 옮기고 만약 간 수치가 내려가지 않으면 사망까지도 갈 수 있다며 내게 확인서에 사인을 하라고 내민다. 그걸 보고는 나도 모르게 잠깐 정신을 놓아버렸다. 도저히 용기가 안 나서 밖에 부모님이 계시니 그분들에게 사인하라고 하면 안 되냐고 물으니 보호자인 내가 해야 한다고 한다. 손을 덜덜 떨어가며 사인을 하고 여러 검사를 마치고는 신랑은 다시 중환자실로, 나는 보호자 대기실로 향했다. 6일 동안 혼자 중환자 대기실에서 지내면서 나는 의외로 담담했었다. 그래, 목숨은 잃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나도 아픈데 저 사람마저 없으면 우리 애들은 어쩔뻔했나.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낫고 다시 건강해질거야. 스스로를 위로하며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수술에서 채 회복되지 못한 내 몸은 견뎌주질 못했던 것일까? 오른쪽 가슴으로 심하게 통증이 찾아왔다. 다시 찾은 서울대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오른쪽 폐에서 이상이 보인다며 CT를 찍자고 했다. 만약 암이라면 수술을 또 해야 한다면서. 두 달 전에 분명 깨끗했던 폐였는데…. 의사 선생님도 너무도 어이없어 하시던 표정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이제는 그저 쓴웃음이 날 뿐이지만, 당시 금쪽같은 당신 아들이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시부모님은 교통사고가 난 것이 너 때문이다, 내 아들이 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그렇게 된 것이다, 라며 화를 내셨었다. 그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내 가슴에 박혔다. 말 한 마디에 사람이 죽고 산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한 너무도 큰 상처와 충격이었다. 그래, 까짓것 수술 한 번 더 하면 되지 뭐. 폐는 두 개가 있으니 암아, 제발 오른쪽에만 있어줘라.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별것 아니라고 위로하고 태연한 척 그렇게 결과를 기다렸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불행에 치이는 딸을 지켜보는 친정 부모님께 나는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겉으로라도 씩씩해야만 했다.

암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멍한 채로 의사 선생님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다발성 전이 폐암. 양쪽 폐 모두에 암이 있었다. 항암을 시작하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우리 같은 암환자에게 스트레스가 얼마나 크게 작용을 하는지 처음 알았다.
‘암을 없애주는 게 아닙니다. 다만 항암을 해서 진행을 늦춰주는 정도인데 그것도 들을 확률은 20% 정도입니다. 항암은 3박4일. 하루 종일. 항암제는 두 병씩 맞아야 합니다. 입원병실이 없으니 낮 병동에서 시작합니다. 항암은 4차에서 6차까지 예정입니다.’
그래, 내 운명이니 받아들이자. 다시 시작해보자. 마음으로는 계속 외쳤지만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한없이 나약한 인간이었다. 여린 여자였다. 두 아이의 엄마였다. 친정 부모님께는 살림 밑천이고 든든해야 하는 맏딸이었다. 효도도 한 번 못해드렸는데…. 가슴이 미어진다는 말, 가슴을 저민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가슴을 칼로 후비는 고통이라니. 미워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건만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왜…, 왜…, 나에게 이토록 혹독한 시련이 거듭되는지, 어떻게 이렇게도 가혹한지…. 누구를 향한 원망이었고 누가 대체 대답을 해줄 수 있었을까. 대답도 없는 공허한 울부짖음이었다.

10월부터 항암이 시작되었다. 1차 때에는 대부분 그렇듯이 잘 견디어 3주를 지내고 2차 항암에 들어갔다. 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아 일주일씩 백혈구 수치를 올리는 주사를 맞아가며 항암을 견뎌내고 다시 CT를 찍었다. 암이 진행되지 않고 있군요. 그대로 있습니다. 너무도 기뻤다. 항암을 더 하면 암이 이대로 없어지리라 착각을 하며 기뻐했다. 잘 견뎌야지. 그렇게 4차까지 버텼는데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차이가 없다며, 항암을 더 해봐야 몸만 망가진다며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3개월 후에 뵙겠습니다. 진찰실을 나서는데 그 힘든 항암을 더는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니 좋기도 하고, 아무 소용도 없었다니 어이가 없기도 하고. 왜 자꾸 나에게만 안 좋은 일이 생기는지 한없이 울었다. 얼마나 더 힘들어야 할까, 얼마나 더 아파야 할까. 얼마나, 얼마나 더 가야 끝이 날까.

집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은 치료도 없다. ‘어차피 난 죽을 사람이야. 병원에서도 포기했잖아. 날 받아놓은 사람이야.’를 말끝마다 붙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조금씩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분이 나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신다는 말도 들었다.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나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울대 병원에서 같은 병실에 입원했던 한 환자의 보호자는 내게 하나님께 의지하라시며 퇴원하고도 연락을 하고 나를 위해 기도한다고 전해주셨다. 항암 할 때도 찾아오셔서 기도를 해주시기도 했다. 8개월이라는 시간이 가면서 응급실로도 몇 번 실려가고 통증이 찾아와 진통제를 먹기 시작했다. 진통제로 구토가 시작되면 너무 힘들고 어지럽고 내 몸을 어찌 가누지를 못해서 나는 무조건 진통이 찾아오면 교회로 쫓아가 엎드려 울었다. 하나님,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목 놓아 울다보면 어느 새 통증은 가라앉아있었다.

지나는동안 응급실도 몇 번가고 통증 때문에 진통제를 먹으면 구토 때문에 너무 힘들고 어지럽고 내몸을 내가 어찌 가누질 못해 난 무조건 통증이 찾아오면 교회로 좆아가 엎드려 울었다 하나님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실컷! 울다보면 어느새인가 통증은 가라 앉아있었다 그때도 몰랐는데 내가 기도를 잘해서 통증이 가라앉은줄만 알고 있던내가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울부짖는 목사님들의 성도님들의 기도소리로 나에 통증이 가라앉게 되었다는것을 늦게서야 알게되었다 이렇게 철저하게 나 밖에 모르고 나만 아픈양 지내며

5월초 3개월지났으니 CT를 찍어보니 결과는 8개월전 그대로 너무 너무 감사했어요 세상을 다 얻은듯 너무너무 감사한 또 하루 이었죠 또 다 낳은줄 알고 좋다고 그렇게 지낸 내게 다시 어둠이 내린건 아니 원발 부위에 자그마한 혹이 다시 잡히는걸 전부터 알았는데 최근에 자꾸 수술부위에 전에 같지 않게 아프기도 하고 해서 이비인후과 진료예약을 하고 다시 수술했던 샘을 만났죠 10개월만이었죠 샘요 여기 뭣이가 잡히네요 언제부터인가요? 좀 되었어요 왜 안오셨어요? 주위에서 하도 호들값을 떤다구 하길래 수술부위에 새로생긴 조직인지도 모른다고 하기도 하고 나도 내가 너무 유난을떠나 싶어 그냥 있다가 혹시나 싶어 왔습니다 CT찍죠 얼마나큰지 봐야합니다 수술을 할지 않할지 봐야 하구요 하시네요 일주일후 CT찍고 결과보니 임파전이가 또 되어 있다네요 딱 병원에! 임파전이입니다 소리 들으면서 샘을 위로했네요 샘 그러시네요 참 안타까운 부분들이 많다고 전 샘요 괜찮아요 위로를 하네요 그러구 수술안할랍니다 샘도 수술은 좀 그렇다 하시데요 3번째 전이죠 어떻게 지내냐구요 그래도 저씩씩하게 잘 지낸다네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같은건 제게 없어요 하루하루 너무 행복하고 감사할뿐이네요 어떻게 이런마음을 갖는지 저도 솔직하게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저를 이렇게 만들어주시네요 제가 심각하게 소심한 A형이거든요 예전같았으면 매일울며 자포자기해서 살수가 없었겠죠 저의 일상은 매일 아침 4시30분에 기상을해서 물한컵 마시고 씻고 교회를 먼저 가네요 걸어나가면서 오늘도 새생명주셔 감사합니다 하며 첫 입을열고 말씀듣구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네요 특별하게 식이요법도 하지 않구 야채탕이랑 현미탕 먹고 요양병원에서 지내는것도 아니구 집에서 지내면서 마음에 치유를 받고 지내는 제모습 보세요 안면신경이 끊겨 얼굴은 약간 이상하지만 어디 말기암 환자 같은 모습인가요? 제가 암을 내몸에서 나가게 할순없지만 전 암이랑 같이가면서 하루하루 행복하게 감사하게 살아갈거예요 지금 이순간 ! 전 세상에 그 어떤 부자보다도 잘나가는연애인 보다도 더 행복하답니다 너무 많은 넘치는 사랑을 전 받고 있기에그래 저도 제가 받은 이사랑을 전하고 싶네요 저를 필요로 하는분들이 계신다면 어디든 갈것이고 저랑 얘기를 나누고 싶으시다면 언제든 환영이구요 제가 참 응급실을 몇 번다니면서 무언가 세상에 좋은일을 하고 싶어 장기기증은 어렵고 사후 각막기증이 된다고 하여 싸인 하러갔다가퇴짜도 맞았네요 전이가 너무 많아 안된다고 하더라구요 그땐 정말 울었어요 서글퍼서 이것마저도 난 안되는가 싶어 내게 물질이 풍부하다면 물질이라도 남길텐데 그런여유는 없고

그래 언제든 저를 친구로 필요하시다고 하신다면 전 친구가 되어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이 마음에 천국을 같이 나누어 보고 싶네요

제나이 이제 39 아직 한창나이죠...저에게 주어진 삶이 언제까지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저를 필요로 하시고 저랑 친구하고 싶으신분이 계신다면 기꺼이 친구가 되어 드리고 싶네요

암이란녀석한테 너무 집착하지 마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생활해가신다면 저처럼 하루하루 행복하지 않을까요? 전 솔직하게 암에 대해 아직도 무지합니다 제게 암조직 크기가 얼마나큰지 암 수치가 얼마인지도 몰라요 물어보지도 않구요 책을 들여다 보는것도 다른분들처럼 철처하게 식이요법을 하지도 못합니다 제가 제일 잘하고있는건 잘먹고 잘자고 화장실 잘가고 울고싶은마음이 생기면 교회가서 실컷울며 하나님앞에 친구한테 엄마한떼 얘기하듯 주절주절 얘기하고

조금이라도 원망스런 두려운마음이 생길때도 기도를 하구 기도 잘하냐구요 아뇨 전혀요 솔직하게 하나님 만난지 몇 개월밖에 안되었잖아요 그러니 마음에 평안을 갖기위해 노래도 많이 불러요 그러다보면 어느순간에 마음이 편안해지는걸 느껴요 복음성가 가요 그냥 생각나는데로 불러요 웃음치료라는게 이런거 아닌가요 싶을정도로 그렇게 자꾸 제 마음을 달래가며 하루하루 지낸답니다 결혼 14년차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살았어요 여기 어찌 글로 다 표현을 할수 있겠어요 돌아보면 웃음지을수 있는날 보단 우는날이 더 많았지만 지금은 내가 언제 울며 지내왔나 그런 생각을한답니다 과거에도 집착하지마세요 현재만 생각하세요 지금이순간 내가 숨쉬고 움직일수 있는 이시간이 내겐 가장 중요하다는걸 순간순간에 감사한 마음 우리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암 이녀석 까짓것 ! 아닐까요?...제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식이요법 요양 운동 다 꼭 필요한것들이예요 하지만 거기서 가장 중요한건 정말 우리들 마음가짐이라 생각해요 마음을 놓쳐 버리면 어떤 좋은약이 있다해도 효과가 없을거라 생각해요 오랜시간 투병을 한건 아니지만 너무도 빠른시간에 제몸에 퍼져가고 있는 암세포들을 보면서 저혼자 느끼고 왜 이렇게 빠른가 생각하다 내린 결론이네요 병원에서 침샘쪽 암세포는 자라는건 천천히 자란다고 했었거든요 그치만 저랑 있는녀석은 엄청 빠르잖아요...

처음 암을 접하신분들이 이글을 보신다면 처음엔 정말 힘들꺼예요 그래도 빨리 마음을 편하게 자꾸 좋은생각만 하시고 자꾸 웃고 하신다면 충분히 이겨내실거라 믿어요 아무리 같은 암환자라해도 본인이 아니구는 그마음 다 헤아릴순 없지만 그래도 우리같이 이겨가요 전 오늘도 이렇게 행복한 하루를 맞는답니다

참 운동은 산책정도는 하시는거 좋다는거 아시죠 내몸에 무리되지 않게요...

뒤로월간암 2009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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