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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넘어 맞이하는 세 번째 삶
구효정(cancerline@daum.net)기자2015년 02월 28일 20:41 분입력   총 8731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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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철 (72세 폐암)

나는 스물일곱에 한 번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그리고 나이 칠십 넘어서 다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스물일곱 한창인 그 시절 돈도 많이 벌었고 술도 많이 먹었다. 아내는 나 때문에 무던히도 속상할 일이 많았다. 밖에서 일하고 돈을 번다는 핑계로 술집을 밤낮으로 드나들었는데 아내는 오랫동안 속병을 앓다가 결국 폐결핵에 걸렸다. 아내가 걱정이 되어 병이 나을 수 있는 방법들을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병원 약을 하루 세 번 한 주먹씩 먹어야 했다. 하지만, 약을 먹어도 시간이 지나면서 아내의 병은 더욱 악화되어만 갔다. 나 또한 계속 소화가 안 되서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고 속에서는 계속 신물이 넘어와서 몸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종로4가에 있는 한의원을 찾았다.

지긋한 나이의 한의사는 진맥을 하고는 젊은 나에게 계속해서 꾸지람을 하였다. 젊은 사람이 얼마나 술을 많이 먹고 몸 관리를 하지 않았으면 속이 이렇게 나빠질 때까지 있었느냐는 꾸지람이었다. 술은 목으로 조금씩 넘어가는데 밥만 먹으면 다 토해내면서 몸이 받아 주질 않았다. 밤마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몸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갔다.

집사람도 폐결핵에 걸리고 나의 몸도 하루하루 망가져 가면서 삶에 대한 희망이나 꿈이 사라지고 있었다. 결국 집사람과 함께 자살을 결심하였다.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세상을 등지는 게 더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그 당시의 나와 집사람의 몸은 결국 고통에 시달리다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럴 바에는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고 싶었다. 스물일곱에 그런 결심을 하였다.

안방에 연탄을 갖다 놓고 집사람과 손을 잡고 같이 죽자고 연탄불을 피우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초인종을 누르며 친구가 찾아왔다. 당황하면서 마당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방으로 들어가자고 할 까봐 조마조마했다. 방안 풍경을 본다면 분명 이 친구는 우리 부부의 자살을 눈치 챌 것이고 그 때문에 계획이 빗나갈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 친구는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면서 조금 있다가 이 근처에서 부흥회라는 것을 하는데 거기 같이 가자고 권유하러 찾아왔던 것이다. 교회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친구의 계속되는 권유에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인데 죽는 일은 내일 해도 되니까 싶은 생각이 들어 아내와 함께 친구를 따라 나섰다.

그곳에 도착하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나보다 잘생기고 멋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내심 초라하게 느껴졌지만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렇게 3일 동안 진행되는 부흥회였는데 3일째 되는 날 집회를 주관하는 강사가 종을 치면서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더니 질문을 하였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천당에 갈 자격이 있는데 천당은 죽어야 가니까 여기서 죽을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 보세요."

이 말을 듣고 나는 번쩍 손을 들었다. 왜 손을 들었냐는 질문에 나는 죽을 사람 손들라고 해서 들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 강사는 나에게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 대해서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고 그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버린다면 천국이 아니라 지옥으로 직행한다고 일러주었다. 나는 속으로 이런 게 어디 있냐는 생각에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그 말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잠자코 있었다. 결국 나는 그 부흥회 때문에 스스로 자살할 계획을 포기하게 되었다. 또, 강사의 설교는 결국 힘든 삶과 고통 때문에 자살하고 싶은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그럴 때는 하나님께 의지해서 믿어 보라는 이야기였다. 결국 나는 자살 대신에 하나님을 믿어 보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였고 부흥회는 끝났다. 그리고 집에 와서 밥을 지었다. 김장김치를 꺼내서 밥을 한 숟갈 입에 넣었는데 신기하게도 밥이 잘 넘어가는 것이었다. 죽을 사람은 죽기 전에 밥을 잘 먹는다는데 이런 건가 하면서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리고는 잠이 들었는데 평상시와 다르게 아침까지 달고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났다. 그 후부터 잘 먹고 건강하게 되었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게 되었다.

몸이 다시 좋아지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 달 동안 일을 하지 않았으니 집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나는 알루미늄 새시를 시공하는 기술자로 일했는데 그 당시에는 고급기술이었다. 보통 인부들의 하루 일당이 1,300원이었는데 나는 5,000원을 받았을 정도였다. 몸이 아프면서 일을 하지 않았고 들어온 일들도 계속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고용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아는 사장을 찾아가서 돈은 안 받을 테니 일만 시켜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 회사는 일이 별로 없고 한산했는데 내가 들어간 뒤로는 일이 계속 생기고 바빠지게 되었다. 얼마가 지나자 사장은 나에게 월급을 주면서 다른 데 가지 말고 꼭 우리랑 같이 일하자는 당부를 할 정도가 되었다. 이제 살림살이에 필요한 돈을 벌 정도가 되었고 그렇게 얼마간 일을 하다가 나는 서울시에 공무원이 된 후 그곳에서 정년퇴직을 하였고 아들 둘, 딸 하나 모두 건강하게 키워 대학을 졸업시켰다.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한 후에 나는 교회와 지역에서 봉사하는 즐거움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갖고 있는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라도 나눌 수 있는 것은 즐거움을 넘어서 삶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가슴이 따끔따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손으로 툭툭 치면 또 아무렇지도 않고 그래서 이상한 생각이 들어 건강검진을 받으러 병원을 찾았다. 병원 의사의 말은 나이가 들어 협심증이 생긴 듯하다는 진단을 내리고 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의사가 처방해준 협심증 약을 먹으면서 지냈다.

그러던 중 작년 9월에 옆집에 사는 노인이 비만 오면 집에 물이 샌다고 푸념을 늘어놓기에 집에서 노느니 저거나 고쳐주자는 생각으로 종로5가에 지붕 수리에 필요한 자재를 사러 갔다. 집에 오는 길에 가슴과 옆구리에 통증이 너무 심해져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우선 하던 일은 마무리해야 되겠기에 옆집 수리를 마무리하고 병원으로 갔다. 엑스레이를 찍고는 CT 검사를 해야겠다고 담당자가 이야기를 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에 검사결과를 기다렸다. 검사가 끝난 후 담당자는 빨리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말을 한다. 무슨 일이냐고 따지듯 물어 보니 '암인데 너무 많이 퍼져 있네요'라는 답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이다.

집에서 가까운 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일주일 동안 입원하면서 모든 검사를 받았다. 폐의 조직검사까지 끝내고 결국 암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폐암은 머리로 전이가 잘 되기 때문에 MRI로 머리까지 검사를 했다. 다행이 머리로 전이는 없었지만 폐에는 이미 상당 부분 암이 차지하고 있었다. 교수와 상담을 통해서 상태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 당시 선암 4기로 진단을 하면서 수술은 안 되니 항암치료를 권한다. 나는 좀 더 다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다른 대학병원에 방문하였지만 그곳 역시 할 수 있는 것은 항암치료 밖에 없었다. 폐에는 물이 차서 숨을 쉬기가 어려웠고, 통증이 심하다고 담당 의사에게 호소하니 진통제를 한 주먹 처방해주었다. 그 와중에 해외에 있던 둘째 아들이 내 상태를 알고 귀국하였다.

그 당시 내 생각을 이랬다.
첫째로 내가 나이가 칠십이 넘었고 살만큼 살았는데 얼마나 더 살라고 돈을 들여가면서 병원치료를 받겠는가. 그럴 돈이 있으면 해외에서 고생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부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둘째로는 항암치료를 받던 많은 지인들이 머리카락도 하나 없는 상태에서 고생만 하다가 세상을 등지던 게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그런 아픈 기억 때문에 나는 기도원으로 들어가서 기도하다가 죽을 생각을 했다. 기도하다가 죽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말레이시아에서 귀국한 아들은 무척 놀랐지만 인터넷으로 많은 공부를 하고 암에 대한 정보를 알아본 듯 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두말도 않고 "생명나눔한의원"으로 가자고 조르는 것이다. 그곳이 그나마 알아본 중에서 가장 신뢰할 만하며 한방치료이기 때문에 큰 위험이 없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결국 나는 아들과 함께 생명나눔한의원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병원의 몇 가지 자료를 가지고 안소미 대표원장과 상담을 하였다. 약 3개월 정도를 치료하면 호전 여부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큰 신뢰를 갖게 되었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같이 왔던 아들은 의사의 확신에 오히려 더 큰 의심을 품는 듯했다. 그래도 나는 안소미 대표원장의 확신에 찬 모습에 미련이 남아 고민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일단 상담을 잘 들었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안소미 대표원장이 치료를 포기하지 마시고 몇 가지 선처를 해줄 테니 꼭 치료를 받고 건강해 졌으면 한다고 간곡히 말을 하는데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들과 상의하여 생명나눔한의원의 치료를 시작하였다.

생명나눔한의원에서 처방한 약을 먹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1알부터 시작해서 점차 양을 늘려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약을 먹으면서 생기는 반응들을 설명하는데 소변 반응, 대변 반응 등이다. 특히 설사가 지속될 수 있는데 때에 따라서는 변을 조절할 수 없을 정도가 될 수도 있으니 기저귀를 준비해서 차고 다니라는 말을 했다. 나는 아이도 아니고 무슨 기저귀를 차고 다니냐는 생각에 그 말을 무시했지만 결국 사단이 나고 말았다. 집 앞에 세워 놓은 차를 잠시 빼달라고 하기에 차를 이동시키고 들어오면서 일이 생겼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변이 쭉 나와 버린 것이다. 그 때 집에 사위랑 같이 있었는데 바로 기저귀를 사다 주었다. 창피한 일이었지만 생명나눔한의원에서 했던 이야기들이 점점 현실이 되었다.

또 소변은 느낌이 있어서 화장실에 서 있으면 안 나오기를 반복하다 3시간이 넘어서야 소변이 나오는데 매우 따가운 느낌이 들어서 보았더니 소변과 함께 몸속의 노폐물들이 같이 쏟아져 나왔다. 또 며칠 동안 딸꾹질이 나온 적이 있다. 계속 딸꾹질이 그치지 않으니 신경이 쓰였는데 안소미 대표원장이 처방한 가루약을 먹고 나니 신기하게도 바로 멈춰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무엇보다 통증이 없어졌다. 가슴의 통증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는데 이제는 편안하다. 이제 몸속의 암은 그리 큰 걱정은 되지 않고 하루하루 건강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처음 암 진단을 받을 때 병원에서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원발이 폐가 아니라 대장에서부터 시작된 암이었다. 폐와 대장은 서로 부부관계처럼 밀접하기 때문에 대장암이 폐로 전이 되는 경우가 많다. 몇 가지 검사를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알고 대장암 치료를 병행했다. 대장암 치료는 생명나눔한의원에서 처방해주는 약으로 관장을 하면서 치료했고 지금은 모두 마무리 되었다. '살만하다'는 말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직장을 퇴직하고 해비타트 활동을 하였다. 큰 아들은 우크라이나에서, 둘째 아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데 너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건축 교육을 받고 해비타트 요원 4명과 함께 우크라이나로 가서 건물을 지어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해주었다.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이었고 다시 건강을 찾게 되면 이런 활동들을 통해서 세상을 살면서 좀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가는 일에 보탬이 되고 싶다. 아울러 생명나눔한의원은 이제 집처럼 느껴질 정도로 정이 들었다. 그리고 이곳의 암치료는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치료법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전 세계를 다니면서 이곳의 치료법을 소개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 모쪼록 지금도 암과 투병하는 모든 분들이 절망보다는 희망을 갖고 그 희망을 갖을 수 있는 길이 생명나눔한의원에 있다는 나의 체험을 알려주고 싶다.

뒤로월간암 201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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