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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일기] 새로운 갈등
고정혁기자2008년 01월 26일 20:13 분입력   총 878753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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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섭 | 원발부위 식도암과 갑상선 아래 전이된 림프절을 치료받고 있는 74세의 남자.
식도암 3년 생존율 0%라는 비정한 숫자를 받아들일 수 없어 집착이 아닌 도전으로 2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2006. 12. 03 (일)

마을버스에서 내린 국립중앙도서관에의 길은 완만한 비탈길이다.
평지도 힘없이 걸어야하는데 비탈길 걸음은 너무 힘들다.
십여 발자국 내딛고는 멈춰 발에 기력이 되살아나기를 기다린다. 어제도 그랬었지만 오늘도 바람이 매섭다. 한겨울 삭풍.

어제 토요일 오후 문득 도서관이나 들려볼까 하는 생각에 국립중앙도서관을 실로 오래간만에 들렸었다. 내부 구조가 많이 달라져있었다.
한 십년 전 들렸을 때와는 달리. 입관 수속부터 디지털화 되어 있어 컴퓨터 기판을 모르면 안내원 신세를 톡톡히 져야한다.
나의 시절, 도서관은 책을 찾으려면 비치된 카드를 일일이 뒤져 봐야했다.
대형서점마다 비치되어 있는 검색용 기능의 컴퓨터로 서적 배치를 알게끔 바뀌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당연한 추세일 텐데 당연한 것이 경이하게 보이는 한 노인이 되어 있는 나를 그곳에서 봤다.

무슨 책을 찾아볼까? 귀천(歸天)?

엊그제 읽은 『요양원일기3-암환자의 눈물2』에서 천상병 시인이 언급되어 있었던 것이 머릿속에 아직 박혀 있는 탓일 게다.
하필이면 「강물」이 새삼 읽고 싶어졌으니….
6.25의 참혹했던 부산 피난 시절 18세의 어린 나이에 지은 그의 등단 첫 작품이어서 우리 또래는 시 제목만은 모두 외우고 있다.

식도암에 걸린 이후론 부쩍 눈물이 늘었다. 흘리는 눈물도, 고이기만 하는 눈물도….

“남자들은 안 운다.”라고 어느 환우는 갈파하였다.
그러나 나는 “남자들도 여자 못지않게 운답니다. 가슴 속 저 깊은 바닥에 고이는 눈물들, 엄청나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이 아직 살아 있다면 강물 되어 바다로 흐르지 못하는 남자의 눈물을 어떻게 읊었을까?
더불어 이야기하여 보고픈 생각 속에 천상병 시인의 시집『귀천』을 들췄다.

강물

                       천상병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일요일 오후도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자료실에서 한가로이 천상병 시인의 시를 옮기고는 있지만 머릿속은 결코 한가롭지 못하다.
새로운 문젯거리를 만나 심적 갈등을 심히 겪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오른쪽 갑상선 아래 전이 림프절을 방사선 조사로만 그칠 것인지 아예 절제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전이 림프절에 대해서는 항암 화학약품들이 힘을 못 쓴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방사선 조사를 밀고나가기로 결정한 것인데 과연 그 일만으로 전이의 온상 림프절과 주변 대소 림프절들을 퇴축시킬 수 있을 것인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외과적 수술로 모조리 떼어내 버리는 일이다.

비좁고 복잡한 중격동 내의 수술이라 경동맥이며 성대신경이며 안 다치게 섬세한 수술 능력이 요구되는 작업이겠지만, 한국의료진 수준으로 봐서는 크게 힘들지 않고 너끈히 해낼 수 있는 일감이다.
수술비용도 크게 오를 수준이 못 되는 수술일 것임이 틀림없다. 문제는 이런 문제들을 누구랑 상의하고 누구에게 요청하는 것인가이다.

L교수가 나의 특진 주치의다. 그런데 그분과의 관계는 이미 미묘하게 되어 가고 있다.
내가 내 멋대로 하는 고집덩어리 늙은 환자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떼쓸 만큼 떼쓴 나의 떼를 다 받아준 A교수에게 이 수술문제를 의논할 수도 없다.
S교수에게 직접 상의해야 할 것인데 S교수에게는 이미 두 번이나 헛면담을 한 바 있다. 두 번이나 수술을 포기하겠다는 뜻을 밝혔던 일이 있는 것이다.
용기를 내어 한 번 더 면담 신청을 하고 수술을 부탁할 수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경력 20년의 식도암 수술 최고 베테랑 권위자에게 겨우 목 언저리 림프절 몇 개 떼어내는 수술을 부탁하기도 좀 그렇다. 자칫 의사의 자존심 건드릴까 두렵다. 그럼 어찌한담.

림프절 위치로 보아 갑상선암 수술 전문가라면 주변 림프절 제거에 더 익숙할 것 같다.
누굴까? 어떻게 말을 건네 가야 할 것인가? 나 아닌 누구를 내세워 말을 건네 봐야 할 건가?
점점 골치가 아파온다. 인터넷 코너 사용 제한 시간 두 시간이 다 되었다.

일단 컴퓨터를 마치고 찬바람 쐬며 머리도 식힐 겸 출입증 카드를 임시외출용으로 변경 시킨 후 일단 도서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오후 네 시 반의 서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여 있다.

어! 저건 또 뭐냐?

동녘 하늘 지평선에서 15도 각도 위쯤 상공에 새하얀 둥근달이 떠있지 않나.
하얀 솜뭉치 같은 둥근 달이 푸른 하늘을 쟁반으로 두둥실 떠 있질 않나.
대낮의 하얀 달.
처음 보는 일은 아니지만, 마음이 심란한 이런 날에는 유난스레 마음속으로 다가온다. 길조냐? 흉조냐?

그래, 수술이라는 아이디어, 결코 나쁜 생각은 아닐 거다. 어려운 수술도 아니고.
밀고 나가자. 아직 시간적 여유는 많다. 방사선 재조사를 받아가면서 천천히 구체화 시켜보자.
은퇴한 늙은 의사 친구들의 의견도 물어보며 차근차근 일을 꾸며보자.

암 전이의 뿌리를 완전히 뽑는 거다. 하얀 솜뭉치 달을 바라보며 속으로 다짐을 중얼거리다 재입관을 위해 출입 카드를 눌러 대는데 느닷없이 오른쪽 편도선 언저리가 아파왔다.
예리한 메스로 찔러대는 날카로운 아픔이다. 갑작이 찬바람을 쏘인 탓일까?
건물 밖에서 서성댄 것은 불과 10분도 못되었는데. 웬걸, 겨드랑이도 아파오고, 가슴도 쓰려오고. 우욱, 너무 힘들다.

뒤로월간암 200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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