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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이야기] 고향으로 돌아갈 그날까지
고정혁기자2008년 02월 23일 18:32 분입력   총 879200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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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일(51세) | 흑색종 2년 투병 중. 일도 투병도 열심히
 

언제부터였을까.
왼쪽 손바닥, 정확히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 아래 부근에 점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항상 거기 있었다.
내 딴에는 복점이렷다, 속으로 기꺼워하며 뺄 생각이 없었다.
전에 자주 가던 식당 아주머니가 손금도 봐주곤 했는데 이 점은 복점이네, 빼지 말어 라고 덕담을 한 것도 한 몫 했을까 싶다.
또 여자였다면 모르겠지만 남자가 얼굴도 아닌 손바닥의 점을 굳이 뺐겠는가.

그러다 점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주 서서히, 조금씩, 기억도 나지 않게 천천히 달라져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조금씩 커지면서 위로 볼록 솟아올랐고, 딱딱하게 굳기도 해 나중에는 시간나면 심심풀이로 굳어진 곳을 칼로 긁어내곤 했다.
암인 것을.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 하지만, 나도 변명하고 싶다. 어디 티눈처럼 된 점이 암이 되리라곤 상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 실제가 된 것은 아내의 채근이었다. 이만하길 아내 덕분이다.
아내는 그 전부터 병원에 가보라고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긴지라 귓등으로 넘겨버렸는데 잠자리에서 자꾸 손에서 피가 흘러 이불에 묻곤 했다.
아내는 심상치 않다 싶었는지 독촉했고 결국 동네 피부과를 찾았다. 귀찮은 참에 점을 확 빼버려야지 했는데 의사가 손을 보더니 바로 큰 병원으로 가라는 것이다.
그 다음은 여느 암환자들과 같은 코스이다.

조직검사(2005년 5월 20일) 받고, 흑색종 진단(2005년 5월 28일).
손가락 두 개와 손바닥 일부를 자른다는 의사 말에 수술안하면요? 했다가 그럼, 수개월 내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는 소리에 두말없이 수술을 받았다.
같은 해 6월 15일. 채 한 달도 못되어 암환자가 되었다.

수술 후 1년 남짓 인터페론 주사를 맞았고, 지금까지 정기적인 검진만 받고 있다.
폐 쪽으로 뭔가 보인다고 했는데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어 두고 보자고 한다.

꿈만 같았다. 처음에 암 진단 받고 하늘이 노랗다는 둥, 무너진다는 둥 하는데 나는 참말로 암도 그냥 감기처럼 앓다 지나가는 것이려니 싶었다.
진단받고 공포감이 없었으니 말이다. 두려움은 서서히 찾아왔다. 인터넷을 뒤적이고 같은 흑색종 환우, 다른 암환우를 만나면서 암이 점점 실감나고 무섭기 시작했다.

등산을 다니며 아무도 없는 산 속에서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를 부르며 혼자 통곡을 하기도 했다.
친구, 동창과의 만남, 모임, 연락을 모두 피했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도 않았고 병을 드러내기는 더더욱 싫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 없을 때 내 얘기를 뭐라고 할까, 별 생각이 다 들어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다.
감정도 예민해져 자영업이라 손님들과 얘기하다보면 꼭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몸의 병을 알고 마음에 병이 생겨나 자라기 시작한 것일까.

의사 한 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환자의 심정도 그때 알았다.

한번은 의사선생님께 허리가 좀 아픈 듯 싶다 했더니 뼈스캔을 해보자하여 검사를 받았다.
그때가 작년 추석 즈음. 그날부터 신경이 칼끝처럼 예민해져 밥도 못 먹고, 일도 못나가고, 끙끙대는데 아프지도 않던 허리부터 온 몸의 뼈마디가 다 쑤셔왔다.
뼈로 전이가 되서 이리 아픈가, 또다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일주일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의사의 입만 쳐다보는데 뼈스캔이 어찌되었는지 말이 없다.
마지막에야 용기를 내어 물어보니 괜찮네요 한다.
그때의 허탈감이라니.
아, 암이 몸에서 마음으로 병이 되었구나 하는 것을 그야말로 뼈저리게(?) 깨우쳤다.

지금은 별다른 이상 없이 잘 지낸다.
아내는 새벽부터 나보다 먼저 일어나 먹을거리를 챙긴다.
내가 아침에 출근하면 아내는 집안일을 하고 점심을 현미밥을 새로 하고 반찬을 챙겨 가게로 나른다.
무심했던 내게 어느 날 딸이 일러줬다. 엄마가 점심밥을 싸올 때 그 사이 식을까봐 수건을 미리 덥혔다가 그걸로 아빠 밥그릇을 싸서 가져오는 거라고.

아내에게 고맙다 못해 미안해진다.
저녁 8시 넘어 가게를 정리하고 집에 들어가면 아내는 또 즙을 갈아준다,
아이들 챙겨준다 하여 밤 12시, 1시까지 움직여야 한다. 미안해하는 내게 아내는 오래 살라고만 한다. 그래, 오래 살아야겠다.
아, 건강해져서 나도 아내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해주고 싶다.

앞으로 내 꿈은 이렇다. 아이들 교육만 마치면 아내랑 함께 시골로 내려가 황토집 자그맣게 짓고 텃밭 가꾸며 사는 것이다.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고 새하얗던 그 겨울밤.
창호지 문 열고 토방 끝에 서서 시린 달빛 향해 오줌발을 겨누던 어린 내가 있는 고향으로.
지금이라도 문 덜컹 젖히고 회일아, 내 새끼야, 하며 반겨줄 것만 같은 어머니가 계신 그 고향으로 가고 싶다.

뒤로월간암 2007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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