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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장미와 콩나물
고정혁기자2008년 04월 02일 21:51 분입력   총 879128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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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비 | 소설 『꽃잎의 유서』, 『경상도 우리 탯말』공저 출판. 소소한 삶의 이야기를 잔잔히 그려내는 소설가.


옛날, 전통 부엌 한구석에 콩나물시루가 있었다. 옹기 자배기위에 나무 막대기를 걸쳐 시루를 얹고 검은 베 보자기를 뒤집어씌운, 오직 물만 쭈룩쭈룩 먹여주면 쑥쑥 자라나는 소박한 존재. 검은 보자기를 열면 콩 껍질 속에서 터져 나와 자란 노오란 콩나물 머리가 조밀하게도 탐스럽게 들어차 있었다.
그 상투를 한줌 쥐고 살짝 뽑으면 쏘옥 하고 희고 날씬한 몸체가 드러났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 방에서 들리던 ‘졸졸졸’ 흐르던 그 물소리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창호지 문에 어리던 외할머니의 그림자까지... 콩나물하면 깨끗하고 소박한 한국 여인의 얼굴과 같이 떠오른다.

흔히 고사리는 고집이 센 사람에게 주는 별명이고, 콩나물은 알뜰하고 정감있는 여인에게 주는 별명이다.
난 그 여자를 ‘장미 같은 콩나물’이라고 이름 짓고 싶어진다. 음전하고 도발적인 모습은 장미 같고, 순박한 모습은 콩나물 같기도 해서이다.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부터 언제 올 거냐고 핸드폰 문자가 울려대는데, 아마 이 여자 내가 온다고 전날 밤 잠을 설쳤을 것이다.
그쪽에 사는 한사람 잡아서 자동차를 타고 산 아래 꼬불꼬불, 그 여자 집으로 갔다. 그 여자, 인절미 같은 엉덩이를 흔들면서 시골 여자답지 않게 눈부시게 하얀 백 바지에 뾰족 구두를 신고 분가루를 날리며 우리를 반긴다.
여자, 푸른 산을 닮아 나눠주고 싶어 못 견디는 성품을 가졌다. 미리 옹기종기 준비해둔 보따리를 옮기는데 한나절이나 걸린 것 같다. 이 여자, 아낌없이 주고도 더 못 줘서 한이 된 친정엄마처럼 애틋하다.

직접 키운 열무와 잎채소, 호박잎사귀, 파, 시골 된장, 태양에 직접 말려 색깔이 고운 어른 머리통만한 고춧가루 두 봉지, 방금 도정한 햅쌀 한 자루, 통깨, 누런 호박덩이 몇 개. 거기다 간장에 삼삼하게 절인 깻잎 김치까지... 다 기억도 안나네.

받아든 사람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된 듯하다. 멀쩡한 그 여자, 텃밭에 있는 거 없는 거 다 갈고, 심고, 메고, 뽑고 나눠주느라 마음이 아프고 온 몸이 아팠을 거다.

바보 같은 그 여자, 내 인생에 봄이 없다고 동굴 속에 버려진 듯 홀로 외롭다더니 눈물로 열무를 키우고, 따가운 태양에 마음을 말리듯 붉은 고추를 말렸으리라.
여자의 텃밭엔 한 번의 눈물로 못다 씻은 슬픔이 밤새 이슬로 모두 내려앉았으리라.
그래서 여자, 밤사이 내린 이슬이 발끝에 채이면서 열무를 뽑았으리라.
삽시간의 어둠은 운명 같은 거라고, 허기진 걸음걸이로 낮과 밤을 헤매며 어머니를 떠올리고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며 혼자 눈물짓기도 했으리라.

돌아와 열무를 다듬어 김치를 담고, 하나도 버리지 않으려고 겉 가지 잎사귀를 삶아 먹을 만큼 봉지를 만들어 냉동실에 넣어두고, 된장은 빈병에 덜어 넣고 고춧가루도 커피 병에 나눠 덜어 넣으면서 나, 콩나물처럼 물만 먹고도 행복을 빼곡하게 자라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연구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 여자 콩나물엔 평생 방부제가 없을 거야. 그러나 장미처럼 매력적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누런 호박 중에 예쁜 놈을 골라 신문지를 둥글게 뭉쳐 방석을 만들어 티브이 위에 장식으로 올려두고, 한 덩이는 씨를 빼내고 그 중 4분의 1은 채 썰어 죽을 만들고, 나머지는 길쭉하게 썰어 가을볕에 내다 말리면서 또 생각한다.

‘나도 콩나물 같은 여자야. 조금 시들하지만 물만 잘 주면... 계속 콩나물이 되는 연습을 해야 해.’

낡은 가옥을 허물어 얻은 썩은 목재라도 대패로, 말간 나뭇결이 나올 때까지 밀고 밀어, 넓고 편안한 평상 하나 만들어, 착하고 좋은 그 여자 불러 가볍게 소주나 한잔하며 살고 싶다.
그렇게 살다 산속으로 들어가 짐승의 먹이가 된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서로의 허무를 측은하게 안아주면서 살고 싶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누가 나를 썩은 목재라 여겨 몇날 며칠을 대패질하더라도 참고 참을 일이다.
또 그런 대패 하나 내 마음에 지녀 마음에 닭살이 오르거나 썩은 정신이면 평생을 밀고 밀어야겠지. 가슴에 감기는 졸속한 문구(文句)를 빨면서 묘한 꿈을 꾸는 듯 나는 또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장미와 콩나물…. 그 둘이 섞이면 참으로 아름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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