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에세이
[나눔의 자리] 나의 한글학교 학생들
고정혁기자2008년 09월 08일 13:56 분입력   총 879829명 방문
AD

글 | 박정미_(사)고려인돕기 운동본부 러시아 자원봉사자로 활동. 파르치쟌스크 문화센터 한글학교 선생님(고려인돕기 운동본부 www.koreis.com)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거주.

“가나다라마바사 아자차카타파하”~♬♪♩~

기타를 들라치면 여지없이 쪼르르 달려와 “뻬시니 하추 가나다라”(“한글노래 가나다라 불러요”)하며 말똥말똥 맑은 눈동자에 힘을 주며 내 주위를 둘러쌓는 나의 학생들.

빠르치쟌스크시 29번 학교의 한글교실 학생들 그들의 환하고 밝은 모습들이 한 컷의 필름이 되어 지금도 스쳐 지나간다.

나의 자원봉사의 첫 걸음은 한글학교부터 시작이 되었다. 고려인 2, 3세대들을 대상으로 한글교육과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우리 고려 사람이 고려 말을 모르오.”

“손자손녀들이 다 마우자(러시아 사람을 일컫는 말)가 되어가고 있소.”

나의 손을 꽉 잡으시며 우리나라 말과 문화를 꼭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하시는 고려인 1세대이신 최 마라나 할머니의 부탁의 말씀이시다.

이곳의 고려인 1세대 할머니 할아버님께서는 우리말도 능숙하시고 우리 민요, 세시풍속까지 잘 아실 정도로 우리나라 말과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데 반해 고려인 2, 3세대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고 따로 학습할 환경도 되지 못한다.

고려인들 사이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나라 말과 문화, 1세대의 고려인들의 수가 점차 줄어들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는데 최 마라나 할머니의 이런 부탁의 말씀이 더욱 애수 어리게 들리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한글 학교가 위치한 빠르치쟌스크시는 인구 6만의 중소도시다. 그중 우리 동포 고려인은 빠르치쟌스크시 인구의 10분의 1에 달하는 약 5천명으로 고려인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아리라~앙 아리라~앙 아라리요~”

가끔 최마라나 할머니께 몇 번 청해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할머님들의 아리랑은 정겨우면서도 그간에 세월의 고단함 때문일까 노래 종단에는 목이 메셨다. 더욱이 노랫가락에 맞추어 춤사위를 넣으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고국이 그리워 고국으로 날아가고픈 선녀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1937년 스탈린의 정권으로부터 강제이주 정책으로 나라 없는 서러움을 안고 화물기차에 몸을 실어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추위와 싸우며 배고픔과 싸우면서 도착한 곳은 한없이 넓은 중앙아시아의 벌판, 그리고 다시 연해주로 돌아오기까지, 이들에게는 참으로 질곡의 세월이었다.

‘내 나라가 있건만 나라 잃은 유랑민이 되어 떠도는 신세가 되어야 하다니….’

그 서러움은 눈을 감으면서도 치유되지 못할 아픔으로 남아 이들과 함께 묻힐 것이다.

때문에 “아리라~앙 아리라~앙 아라리요” 노랫소리가 이곳에서는 한없이 서글프게 들리는 이유다.

아마도 최 마리나 할머니께서도 한 평생 나라 없이 떠돌며 패인 깊은 상처들을 고국의 문화와 말을 재잘거리는 후손들에게서 위로 받으려 하지 않았을까.

이제 막 자원봉사를 시작하려는 나의 가슴이 연민과 사명감으로 뜨거워졌었다.

드디어 한글학교 첫 시간,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

서로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우리의 만남은 시작이 되었다.

한글교실은 두 시간으로 초급반(학생들 위주)과 중급반(희망하시는 어르신들)으로 나뉘게 되었다.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쏙 빨려드는 어린 학생들의 눈빛들이며, 호기심과 궁금증에 한국어 수업과는 상관없는 좋아하는 것이 뭐냐, 싫어하는 것은 또 뭐냐, 이것저것 질문들을 연신 되묻는다.

서툰 대화였지만 우린 이렇게 친해지고 있었다.

꽃과 동물, 노래를 좋아하는 이들.

어디에선가 노랫가락이 들려오면 몸부터 화답을 한다.

그래서인지 지루하지 않도록 노래로 한국어를 접하게 해주면 먼저 몸이 흔들린다. 음악에 몸이 익숙해지노라면 입이 열리고 노래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

기타 음악에 맞추어 “가나다라마바사 아자차카타파하” 노래를 신나게 부르는 우리 어린 학생들.

“곰 세 마리가 한집에 있어~” 이 노래의 속에 어린 곰들이 되어 신나게 춤추는 우리 한글학교 학생들.

이들의 순수하고 밝은 모습, 열심히 한국어와 친해져가는 모습에 바라보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가슴 뿌듯함을 전해준다.

이제야 비로소 지난날 고려인 1세대들의 마음속에 맺혔던 나라 잃은 설움과 아픔을 그분들의 손자손녀들, 우리 한글학교 학생들이 어루만져 주고 있는 것이다.

뒤로월간암 2007년 6월호
추천 컨텐츠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