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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길 위에 서서 길을 생각하다
고정혁기자2008년 09월 09일 14:08 분입력   총 878876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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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재일(60)_사찰생태연구소장(//cafe.daum.net/templeeco). 사단법인 보리 이사장. 사찰의 생태를 지키기 위해 사찰생태연구소를 설립하였으며 암투병중에도 쉬지 않고 ‘108 사찰 생태기록 남기기’ 등의 사업을 벌이고 있다.

내 차도 없이 여행을 다닌 지 10년이 넘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눈을 감고도 마을의 세상살이를 다 안다. 신새벽 완행열차를 타고 길을 나서보면 간이역마다 사람들이 오른다. 열차가 역 하나를 자나갈 때마다 타는 사람들의 말소리도 달라지고 세상사는 이야기도 달라진다.

당골 이장댁 며느리는 삼신을 미신이라고 욕하더니만 기형아를 낳았고, 박달재 동신제에 누구 애비가 돈을 얼마 부조했으며, 장가 못가 죽은 뱀골 김총각 넋건지기가 며칠 날 있고, 한산호 김선장은 청춘다방 아가씨와 붙어서 며칠 째 바다에 안 나가고, 박실댁 맏며느리는 신병나서 집 나간지 열흘이 넘었고, 담뱃골 문총대는 도깨비에게 홀려 발가벗고 집에 왔고…

차창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 냄새만으로도 그 동네가 풍년인지, 흉년인지 안다. 여행의 묘미는 목적지에 가서 보는 풍광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함께 달리는 산수와 마을들을 바라보는 것도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을 준다. 그 즐거움은 정겨움과 평화로움에서 온다.

우리네 옛집들은 어딜 가나 배산임수(背山臨水)가 기본이다.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 연이어 있고, 그 산자락을 밟고 「백양숲 사립을 가린 초가집」(김상옥 <사향(思鄕)>)들이 그림같이 어깨를 맞대며 점점이 또는 기다랗게 연이어 달린다.

집들은 어우러져 동네가 되고, 동네는 어우러져 마을을 이룬다. 집과 집 사이에는 정겨운 고샅길과 고불고불한 골목길이 나있다. 경상도 하회마을이나 전라도 낙안마을에는 옛 정이 묻어있는 그런 길이 아직도 남아있다.

어디 거기뿐이랴. 사람들은 그 작은 길을 통해 내 집으로 들어오고 나간다. 이 작은 길들은 열림과 닫힘의 기능을 절묘하게 해낸다. 골목길에 있는 동네우물은 담장에 둘러싸인 집과 집, 사람과 사람들 사이를 열어놓는 또 다른 길이다. 그래서 우물은 우리의 옛 마을에서 전형적인 이웃 문화를 형성해온 정보의 로터리이다.

우리네 길은 끊어지는 법이 없다. 심지어 마을 뒤 산으로도 길은 나있다. 암자로 가는 오솔길이 나있고, 성묘길도 집 뒤로 나 있다. 삶이 힘에 부대낄 때 사람들은 쌀을 이고 불당을 찾았다. 거기에 가면 또 극락으로 가는 보이지 않는 신앙의 길이 있었다.

고을마다 서는 장(場)은 또 다른 길이다. 장은 글자 그대로 ‘모이는 곳’이다. 조선시대의 5일장은 하루 걸어서 왕복할 수 있는 30~60리 간격으로 생겼다. 처음에는 물건을 사고파는 단순한 상행위의 장으로 시작되었겠지만, 서로 만나 안부를 묻거나 새로 사귀거나 하는 만남의 광장으로 차츰 바뀌었다.

새로 나온 물건들을 사고팔거나 새로운 일거리도 찾는 생활정보의 광장이다. 삼남의 물산이 모였다는 안성장이 그랬고, 김천의 소시장도 그랬다. 이렇듯 모든 길은 장으로 이어져 있다. 그래서 지금도 시골장은 대개 버스터미널 부근에 있다.

장날이 있어서 농사일을 잠깐 쉬기도 한다. 각설이나 약장수들의 구수한 재담과 노래가 있고, 반가운 사람과 만나 먹고 마시는 즐거움이 있어서 장은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유흥의 광장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장에 가서 보고 듣는다. 일제가 전통장을 폐쇄하려고 안간힘을 쓴 것도 연결의 고리를 끊어 어진 백성들을 우민화시키고자 함이었다.

경상북도 문경은 전형적인 소백의 산간마을이다. 그 옛날 삼국시대 때 소백은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이었다. 문경에 새재가 생기기 전에 그 옆에 계립령이 있었다. 고구려로 보면 남하정책의 최전방이었고, 신라로 보면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가는 일선이었다. 두 나라 사이가 나쁘면 그 고갯길이 막히고, 사이가 좋으면 길이 열렸다.

평화는 길이 열린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길은 끊임없이 새로 생긴다. 사회구조의 산업화로 날이 갈수록 더욱 많은 길이 생겨나고 있다. 옛날보다 더 넓고 빠른 길이 자꾸만 늘어나고 있다. 그러면서도 길은 또 끊임없이 사라져간다. 특히 이농현상으로 사람들이 떠난 마을이 점차 늘어나면서 옛길은 가시덤불 속에 묻혀 사라져가고 있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사람들 사이에 사연은 없어지고 용건만 오고가는 시대가 되어간다.

요즘 사람들은 용건이 없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길을 만들지 않는다. 길이 없으면 마을이 생기지 않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길이 없으면 정이 메마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가는 사람들이 더욱 낯설게 보이는 오늘날이다. 사람들 사이에 길을 만들고 다리를 놓아야 한다.

뒤로월간암 2007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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