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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어둠은 절망이 아닙니다.
고정혁기자2008년 09월 09일 14:10 분입력   총 878095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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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 영_시인이며 수필가. 남편 백혈병 2년 투병 중. 보스턴에 살고 Boston Korea신문에 칼럼연재. 저서 시집『하늘』, 수필집『나는 ‘춤꾼’이고 싶다』등.

맑고 고운 아침 햇살이 창가를 찾았습니다. “찾아온 길목이 어찌 쉬웠을까” 생각을 만나보는 아침입니다. 그 길에서 어둠을 뚫고 새벽이슬 맞으며 그렇게 왔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는 늘 좋은 일, 기쁜 일, 행복한 일, 신바람 일렁이는 일들만 있지 않음을 깨닫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는 내가, 내 가족이, 내 친정 부모 형제가 내 친구가 이렇게 팔을 벌려 닿은 사람들에게만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이 모두가 내 행복인 줄 알았습니다.

몇 년 전, 우연하게 친구 하나를 만났습니다. 처음 만났던 그 여인은 너무도 아련한 빛으로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건네야 할 텐데 입 밖으로 속의 말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말았던 기억입니다. 아는 분으로부터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의 친구입니다. 이 친구가 아이들 셋을 데리고 엊그제 다니러 와서 하룻밤을 묵고 돌아갔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만남이었습니다.

    이 친구를 처음 만난 것은 5~6여 년 전이었습니다. 아마도 날씨가 추웠지 않았나 싶습니다. 겨울이었다는 생각이 어렴풋 스칩니다. 얼굴색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 삶을 다 포기한 사람처럼 시들시들 앉아있던 한 여인, 그 모습은 정말 애처롭기보다는 삶의 문지방에서 죽음으로길 문턱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젊고 유능한 한 남자의 아내였고, 세 아이들의 엄마였던 여인이었습니다. 똑똑하고 자상한 한 남자의 아내는 늘 사랑 속에서 부족함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유능한 젊은 목사의 아내로 말입니다. 처음 유학길에 올라 남편(목사)이 공부를 다 마치게 되어 보스턴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 목사부부는 ‘이민 교회’의 꿈을 키우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위로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셋째 아이를 더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친정어머님이 아이의 산후조리를 위해 와 계셨던 상황이었습니다. 아이가 한 달을 보내고 두 달 정도를 맞이할 즈음, 친정어머님도 한국으로 돌아 가셔야 하겠기에 운전을 하고 여행을 시켜드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잠을 자고 아침이 되어 사람을 깨우니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얘길 들으며 너무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늘이 무너졌을 그 ‘恨의 날’을 말입니다. 세 아이들과 함께 남은 여인, 떠남과 이별 그리고 남은 사람들의 슬픔은 말 할 수도 없는 아림이었던 것입니다. 엊그제 와 이런 저런 얘길 하다가 그런 말을 해옵니다. 지금도 늘 남편(목사님)의 꿈을 꾼다고 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친구를 보며 하늘이도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꿈속에서도 늘 찾아왔다가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꿈을 늘 꾼다고 말입니다.

    너무도 갑작스런 죽음에 ‘恨이 되었을까?’하면서 제게 말을 해오는 것입니다. 어찌 그 아픔을 알 수 있을까. 다만 들어주는 일 뿐인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내겐 아무 것도 없음을 또 알고 마음으로 기도만 드립니다. 그 아리고 슬픈 마음에…

    그 사모 친구와 가까운 마음을 주고받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여름방학을 하면 아이들이 우리 집에도 놀러와 며칠씩 묵고 가곤 하였었는데, 요즘 한참 동안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내 일이 너무도 바빴다는 말은 이유도 되지 않는 핑계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이 친구를 만나며 많은 생각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그리고 인간과 신에 대해서 물음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종교인들의 물음이기도 할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목사가 목사의 가정이 어려운, 힘겨운, 고통스런, 슬픈 일들을, 그런 일들을 당해야 하지? 하고 묻는 물음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처음의 물음이 시작되면서 많은 ‘자유’를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 안에서의 자유를, 그 동안 내 안에 가둬두었던 좁은 생각들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매일의 생활 속에서 많은 일들을 바라보고 만나고,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을 그 사모 친구를 통해 알아 가는 것은 감사이고 축복임을 알았습니다. 더욱 더 깊은 생각을 만날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 친구를 만난 이후부터 더욱이 살아가는 일에 대해,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그 가치와 존재로서의 감사가 여느 때보다도 더 깊어졌습니다. 또한 살아있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깊은 생각을 만나며 그것은 나만을 위한 삶만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만남과 만남을 통해서 그려지는 큰 그림이 궁금해지고 그 속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보이는 작은 그림들에 대해서도 찾아 나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부터 바라보는 사물이, 느껴지는 마음의 일렁임이 내게 무슨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었습니다. 그 사모 친구의 엄청난 슬픔이, 헤쳐나가야 할 앞의 길에서 그 여인을 바라보며 그녀의 아픔이, 슬픔이 내 것이 되어 내 가슴을 찢으며 도려내는 고통과 상처가 되어 내 가슴에 남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속에서 내 자신을 바라보며 깊은 묵상을 시작했습니다. 그녀를 위해서가 아닌, 그녀 속에서 내 자신을, 삶이라는 우리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공부가 시작된 것입니다. 언제나 남편의 그늘에서 걱정 없이 살아가던 나는 충격이었습니다. “만약 나라면?”, “엄청난 일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할까?” 물음을 내 자신에게 던져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오늘에 내가 있기까지는, 깊은 생각을 만나게 된 시작은 아마도 이런 일들이 복합적인 이유였을 겝니다.

    이렇듯 슬픔이 꼭 남의 것이 아님을 가슴으로 느끼면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게 힘겨운 일이, 아픔이, 슬픔이, 고통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가슴을 주신 것이 감사하다고 저 아픔의 마음을 슬픔의 가슴을 내 가슴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심은 은혜임을 알았기에 하루의 생활이 더욱 기쁨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모 친구를 만나면 늘 용기의 말, 희망의 말, 소망의 말, 꿈의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때의 그 친구의 상황에서 얼마만큼의 힘이 되었는지는 난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힘겨움에서 벗어나고, 일어서서 아이들과 걸어갈 수 있는 일이 우선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로는 호되게 모진 말도 던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 날까지 ‘사모’로 있을 거냐?”고, “그 사모의 이름을 벗어 던지지 못하면 영영 이 아픔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그렇게 모진 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이 친구의 말뜻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며 그 친구는 얼굴색이 환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하고도 그리고 옆의 미국친구들과의 생활도 잘 견디고 있었습니다. 마음으로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몇 번인가를 기도를 했습니다. 너무도 엄청난 절망의 굴레에서 친구는 그렇게 꿋꿋하게 잘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거의 없는 도시에서 살기에 영어를 익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미국인들의 따뜻한 배려도 학교도 나라에서 도움을 받고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 둘 힘든 것들을 내려놓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이기에 더욱 단단해지고 견고해진 보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뜨거운 풀무에서 정금이 되어 나온 것입니다. 이제는 그 어둡던 고통에서 캄캄하던 슬픔에서 환한 빛으로의 행진을 시작한 것입니다. 환한 웃음이 고마운 날이었습니다.

    그녀의 웃음을 만나며…

    우리는 또 서로의 마음이 맞아 2002년도부터 “한국전통문화와 전통춤”을 입양아들과 그의 양 부모님, 미국인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전통문화/전통춤] 알림이 역할을 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친구와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녀가 멀리 떨어져 살고 있고 또한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함께 활동하는 것이 아직은 쉽지 않지만, 내년 봄부터의 계획을 나누고 갔답니다. 입양아들과 미국 양 부모님들께 전통문화와 전통춤 그리고 한글과 붓글씨를 알리고 가르쳐 주는 얘기들을 나누고 돌아갔습니다. 바로 꿈이 또한 일렁이니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는 힘들지만 함께 하면 더욱 쉬워짐을 또 알기에 감사하다고 말입니다. 또한 귀한 친구로 있어주니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입니다.

    어려운 일, 감당하기 힘든 일이 꼭, 남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내 일이 되어 일어날 수 있음을 안다면 남의 슬픔이, 아픔이, 고통이 꼭 남의 것이 아님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게 닥쳐오는 슬픔이나 어려움, 고통들이 가벼워지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어디에선가 내 이 슬픔을, 아픔을, 고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캄캄함이, 어둠이 꼭 절망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깊은 어둠의 터널을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걸어야 하고, 또 넘어지더라고 일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새벽이 시작되기 전 그 어둠이 가장 어둡고 캄캄하다 들었습니다. 소낙비가 한차례 지나간 후의 나무들을 보십시오. 햇살에 반짝이는 푸른빛의 이파리들을 보십시오. 비온 후의 땅이 굳어진다 들었습니다. 바로 이것은 절망이 아니고 희망으로의 옮김입니다. 바로 꿈이고 희망이고 소망인 것입니다. 어둠은 그래서 꼭 절망만은 아닌 것입니다. 꿈의 시작이고, 희망의 시작이며 소망의 시작인 것입니다. 귀중한 만남에 감사를 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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