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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자리] 블라직의 꿈
고정혁기자2008년 09월 10일 14:41 분입력   총 878515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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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정미_(사)고려인돕기 운동본부 러시아 자원봉사자로 활동. 파르치쟌스크 문화센터 한글학교 선생님(고려인돕기 운동본부 www.koreis.com)

빠르치쟌스크시 29번 학교 한글교실에서 처음 6개월간은 금방이었다.

분명 낯선 외국이고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마냥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세월 가는 소리마저 들을 수 없었나 보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 하지 않던가!

게다가 가까운 데도 아니고 먼 이국땅에 봉사하러 왔으니 사실 어려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시간이 되면 작은 키로 삐걱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발그레한 미소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국땅에서 겪는 고된 시간들이 물안개처럼 사라졌다.

지금은 한글학교를 떠나 다른 지원업무를 담당하고 있어서 다시 만나 볼 수 없지만 한글학교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6개월간을 되짚어 본다. 때때로 아이들 모습을 붓 가는 대로 기록해 놓은 것들 중에, 지금도 이따금씩 떠오르는 감상들을 한두 장 떼어내어 실어본다

우리나라에는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놀이터도 많고, 초등학교 운동장에도 운동기구와 놀이기구가 많이 있지만 러시아 연해주는 그런 시설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학교 운동장에도 철봉 몇 개 정도에 운동기구는 보여도 유년에 아이들이 동심을 키워갈 놀이터는 없다.

도시 사정이 이러한데 시골 고려인 정착촌 사정은 더 할 수밖에 없다. 정착촌 아이들은 주로 마을에 큰 나무와 공터를 놀이터 삼아 그네를 매달아 놀거나 숨바꼭질도 하고 흙 놀이도 한다. 공터가 아이들에게 천혜의 놀이터가 되어주고 있다.

처음에 정착촌에 와보니 러시아 아이들은 그나마 공터에서 활개를 치면서 잘 뛰어노는데 고려인 아이들은 한쪽에서 자기들끼리 조금 놀다가 들어가거나, 아예 밖에 잘 나오지 않았다. 자기들 형편에 스스로 주눅들은 모습을 보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봉사단일행이 한국에서 가져간 줄넘기와 공들을 선물로 주고 러시아 아이들과 고려인 아이들을 함께 놀게 했다. 마땅한 놀이기구가 없는 이들에게 줄넘기 하나도 좋은 놀이기구가 되고 공 하나라도 있으면 그건 ‘오친 하라쇼’(너무 좋아요!)다.

선물 받은 줄넘기와 공으로 러시아 아이들과 고려인 아이들끼리 서로 돌아가면서 시합도 하고. 팀을 나눠서 하는 줄넘기 놀이도 하면서 금방 친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글학교 자원봉사를 시작한지 한 달이 좀 안됐을 때인가 우리 반 학생 10살 난 블라직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톡 외곽에 위치한 면단위 정도의 노보네즈너에 블라직의 집까지 가려면 차로 2시간을 가야 하는데 가는 길에 참으로 안타까운 장면을 목격했다.

냇가에 앉아 네 살 된 어린 꼬마 아이가 당근을 씻고 있었다. 한 두 개라면 지나칠 수도 있지만 큰 광주리에 제 키보다 훨씬 높이 쌓아 놓고 부지런히 씻어 내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또 어떤 10살 된 남자아이는 넓디넓은 오이밭을 활보하며 오이를 수확하고 있었고, 밭 한 가운데 검게 그을린 얼굴에 한 16세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이 16세 소년은 병약하신 어머니를 간호해야 하는 아버지의 몫을 대신해 이 넓은 오이 밭에 디렉터(책임자)가 되어 관리하고 책임을 맡고 있었다.

더 안타까운 현실은 농사지을 농토가 없는 가정의 아이들은 임노동자들이 되어 떠돈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이 아이들은 공터에서 뛰어놀 여유조차 없는 아이들인 셈이다. 맘껏 뛰놀고 실컷 웃으며 보내도 부족할 아이들이 척박한 삶의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들 보니 가슴 한쪽이 뜨거워지면서 시야가 흐려졌다.

차창 풍경을 잠시 스치는 사이 블라직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점심시간이었다.

참고로 블라직이 사는 노보네즈너는 소비에트 시절 군사지역이었다. 때문에 군막사로 사용되었던 건물들이 많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던 고려인들은 러시아로 재이주 해오면서 버려진 이곳에 군막사로 한 가정 두 가정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러시아 정부도 1937년 강제이주 보상차원에서 이 건물을 무상으로 임대해 주고 있었다.

아빠, 엄마, 형 지마와 함께 4식구인 블라직네 가족의 경우도 무상임대 군 막사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블라직네 가정 역시 2천 5백 평의 오이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자연히 블라직도 앞서 본 아이들처럼 턱없이 부족한 일손을 거들고 있었다. 어찌나 일을 많이 했는지 일하는 솜씨가 아이 답지 않았다.

오히려 내손을 잡고 다니며 나에게 가르쳐 준다. 오이를 딸 때는 조심스럽게 옆에 꽃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며 말이다.

블라직네 군 막사 살림살이를 보면 방 두 개에 목욕탕, 부엌이 있고 부모님 방에는 침대, 거울, 흑백텔레비전, 소파, 애들 방에는 침대, 장롱반쪽, 카세트, 책상… 언뜻 보기엔 꽤 갖춘듯하지만 너무나도 낡은 것들이었다.

이렇게 부족한 살림인데도 봉사단 일행이 온다고 하니 닭조림과 감자반찬, 가지반찬, 된장국 등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맞아 주었다.

블라직도 오랜만에 보는 맛있는 음식들 앞에 어찌나 좋아하던지 밝게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는 가장 좋아하는 계란반찬과 고기반찬에 제일 먼저 손이 간다. 먹는 모습이 얼마나 예쁘던지. 보는 이마저 행복하게 만들 정도다.

식사를 마치고 나중에 꿈이 뭐냐고 블라직에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단숨에 대답한다.

“엄마, 아빠 편하게 모시는 거요!!!”

이제 10살 난 아이의 대답치곤 너무도 어른스러웠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부모님께 응석부릴 나이인데도 불평도 않고 묵묵히 일하는 블라직을 보면서 소박한 그 꿈이 지금 어려움에 처한 모든 고려인들과 함께 반드시 이뤄질 거라는 분명한 희망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행복이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뒤로월간암 2007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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