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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렌지마트
구효정(cancerline@daum.net)기자2024년 12월 26일 04:52 분입력   총 317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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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철우(수필가)

정확하게 연도는 기억나지 않는다. 외국계 편의점이 난립하듯 국내 시장을 점령해 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국내산 편의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기며 시장을 재편하던 시기였다. 지금이야 국내 편의점 브랜드도 정리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신생 편의점도 저가 공세를 무기로 시장에 발을 내밀 때였다. 그렇게 집 근처에 생긴 편의점이 바로 ‘오렌지마트’. 오랜 시간 동안 철물점의 창고로 쓰이던 낡은 건물의 1층에 들어선 마트에 주변에서도 다들 반가워했다. 더구나 집에서 지척인 데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비슷한 모양의 주택들 일색인 근방에서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편의점의 문제가 간판이라는 것을 당시에는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편의점이 생긴 지 반년쯤 흘렀을까. 오전에 남북이산가족협회에서 연락이 왔다. 일전에 이산가족 찾기의 일환으로 DNA 검사를 했는데, 해당 계약서와 이산가족 찾기 신청서를 인편으로 보낸다는 전화였다. 오늘 방문할 예정이라면서 집 주소와 방문 시간 등을 확인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마침 저녁 시간에 모임 주최자로서의 약속이 있어서 5시까지는 꼭 방문해 달라는 부탁을 하며 전화를 마쳤다. 단순히 계약서와 신청서라면 등기우편으로 보내도 되는 것을 굳이 인편으로 보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협회의 일을 따지고 들 수도 없었다.

다섯 시가 다가오는데 아직 서류를 전달할 사람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일일이 전화를 돌려 참석을 독려한 주최자가 모임에 늦는다는 건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었다. 초조한 마음이 초시계 소리에 맞춰 점점 부풀어 올랐다. 다섯 시를 막 넘기는 시계를 본 순간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가 울렸다. 목소리는 이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젊은 청년의 그것은 공손했지만, 다급했다. 다섯 시까지 방문하지 못해 죄송하다면서 주소 근처까지 왔으나 집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헤매고 있다는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렌지마트 옆이었다. 오렌지마트를 찾는다면 그곳부터는 집을 찾기가 쉬웠다. 일단 오렌지마트가 보이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돌아온 의외의 대답. ‘오렌지요?’ ‘네, 간판이 크게 있잖아요. 오렌지마트라고.’ ‘간판은 보이는데…….’ 난감하고 답답한 대화가 오갔다. 어둑해지는 늦가을의 주택가에 불빛을 환히 밝힌 간판 앞에서 헤매다니……. 오렌지마트에서 집까지 오는 방법을 알려주고 다시 십여 분쯤 흘렀을까. 더는 지체할 수 없어 찾아보려고 현관문을 미는 순간, 산만한 덩치의 청년이 헉헉대면서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청년은 계절에 어울리는 정장 차림으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셔츠의 옷깃 부분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그것은 남극의 빙하처럼 녹아내릴 듯 쳐져 있었다. 남자의 자존심처럼 빳빳하게 목을 보호하던 기세는 오래전에 꺾인 듯했다. 늦었다는 원망보다 옷깃 바로 아래 단추라도 하나 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였다. 청년의 거친 호흡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무 늦었네요.’ 안쓰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나는 급한 일정을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구차한 변명 대신 청년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잘못을 인정하고 있었다. 뻔히 눈에 보이는 오렌지마트를 찾지 못해서 늦는 바람에 매우 곤란한 지경이 됐다는 불필요한 언사까지 얹었다. 더구나 젊은 분이 간판도 읽지 못하느냐는 말을 하는 순간, 선을 넘었다는 생각에 멈칫대는데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죄송하다는 말뿐이었다. 그리고 서류의 종류와 신청 방법 등을 설명한 후 또 전달해야 하는 집이 있는지 바쁘게 자리를 떴다.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한 시간이 길어봐야 삼, 사분쯤 될까. 청년이 떠난 후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하는데 왠지 개운하지 못한 감정이 뒷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뭐지? 뭐였더라. 구두를 신으면서 다시 한번 기억을 되살려보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생각난 것이 있었다. 아! 그 억양! 익숙한 사투리였다. 아버지를 통해 들었던. 그러고 보니 오늘 서류를 보낸다던 곳이 남북이산가족협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둘러 냉장고에서 시원한 음료수 하나를 꺼내 들고 청년의 뒤를 따라 뛰어나갔다. 필시 오렌지마트 주변으로 갈 것으로 생각하고 그쪽으로 길을 잡았으나,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길엔 가로등 하나가 깜박일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서는 길에 환한 불빛의 간판을 보자 혹시나 했던 마음이 확신으로 바뀌며 주저앉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오렌지마트’라고 적혀 있을 줄 알았던 간판은 영어로 쓰여 있었다. 그것도 필기체로. Orange Mart.

그는 자유를 찾아 사선을 넘어온 북한이탈주민이 틀림없었다. 남북이산가족협회에서 북한이탈주민 젊은이 가운데 남한을 경험할 기회를 주기 위해 단기 알바 형식으로 서류 전달을 시켰을 것이다. 복장이나 말투, 대응 방법 등을 보니 여러 교육을 받고 경험을 하기 위해 온 것 같은데 그에게 가슴에 상처가 될 말을 했으니….

아버지는 6.25 전란 중 1·4후퇴 때 남한으로 오신 실향민이다. 이북에서 영어를 배우지 않고 러시아어만 배운 터라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던 해에 내려오신 아버지가 남한에서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는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영어를 읽지 못한 북한이탈주민에게 모진 말을 했으니, 인간적으로 미안하고, 실향민 2세로서도 부끄럽기 짝이 없다.

편의점이 있던 자리는 다른 메이저 편의점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지금은 사무실 건물이 들어서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지금도 오렌지마트가 있던 자리를 지날 때면 기억의 계단에서 잠자던,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던, 청년의 모습이 깨어나 미안한 마음이 꿈틀댄다. 어떤 인연이 되었든 그를 꼭 다시 만나 그날의 무례를 사과할 수 있으면 좋겠다. 청년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이곳에서 잘 적응하여 부디 행복하길 바란다.
뒤로월간암 202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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