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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항암분자, 50년 개발의 결실
고동탄(bourree@kakao.com)기자2026년 01월 29일 17:23 분입력   총 92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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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 속에서 발견된 미지의 분자, 반세기 만에 MIT 화학 연구팀에 의해 실험실에서 재탄생하다. 단 두 개의 산소 원자가 만들어낸 ‘화학적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이야기, 그리고 난치성 소아 뇌암 환자들에게 비치는 새로운 희망의 빛을 따라가 본다.

자연이 숨겨둔 난공불락의 요새
과학의 역사에는 수십 년간 연구자들을 괴롭히면서도 매혹시키는 난제들이 존재한다. 화학 분야에서 '버티실린 A(Verticillin A)'는 바로 그런 존재였다. 1970년, 곰팡이의 일종에서 처음 분리된 이 화합물은 발견 당시부터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곰팡이가 외부 병원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이 독특한 물질이 강력한 항암 및 항균 잠재력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은 이 강력한 무기를 쉽게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버티실린 A는 그 복잡하고 기괴하기까지 한 분자 구조 탓에 실험실에서의 인공적인 합성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겨졌다. 수많은 화학자가 이 분자의 복제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2024년, 마침내 그 견고한 빗장이 풀렸다. MIT 화학과의 모하마드 모바사기(Mohammad Movassaghi) 교수팀이 이끄는 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버티실린 A의 완전 합성에 성공한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이들이 만들어낸 합성 유도체가 치사율이 높은 소아 뇌암에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는 사실이다. 반세기의 기다림 끝에 찾아온 이 쾌거는 과연 어떻게 가능했을까?

단 두 개의 산소 원자, 그리고 나비효과
모바사기 교수팀에게도 이번 도전은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사실 연구팀은 이미 2009년에 버티실린 A와 매우 유사한 화합물인 ‘(+)-11,11'-디데옥시버티실린 A’를 합성하는 데 성공한 바 있다. 이 분자 역시 10개의 고리와 8개의 입체 중심(Stereocenter, 탄소 원자가 서로 다른 4개의 화학기와 결합해 3차원적 방향성을 갖는 지점)을 가진 복잡한 구조였지만, 연구팀은 이를 정복했다. 하지만 진짜 ‘오리지널’인 버티실린 A는 차원이 달랐다. 2009년에 성공한 버전과 버티실린 A의 차이는 놀랍게도 단 두 개의 산소 원자뿐이었다. 일반인의 눈에는 사소해 보이는 이 차이가 화학 합성의 세계에서는 천지개벽과도 같은 난이도 상승을 불러왔다.

모바사기 교수는 당시의 고충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 두 개의 산소 원자는 우리가 화학적 변형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를 극도로 제한했습니다. 산소 원자가 추가됨으로써 화합물은 훨씬 더 불안정하고 민감해졌죠. 우리가 지난 수년간 방법론적으로 큰 진전을 이루었음에도, 이 녀석은 끈질기게 난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구조적으로 미세하게 다른 이 산소 원자들이 합성 과정에서 분자의 거동을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기존의 성공 방정식을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다.

화학의 레시피를 다시 쓰다: ‘타이밍’의 미학
연구팀은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야 했다. 버티실린 분자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두 개의 반쪽이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이합체(Dimer)’ 구조다. 과거 연구팀은 합성 과정의 거의 마지막 단계에서 두 조각을 붙이고 탄소-황 결합을 형성하는 방식을 썼다. 하지만 버티실린 A에 이 방법을 적용하자 실패가 거듭됐다. 까다로운 산소 원자들 때문에 입체화학적 구조가 엉망이 되기 일쑤였다. 결론은 하나였다. 순서를 완전히 뒤집어야 했다.

“우리가 깨달은 핵심은 ‘사건이 발생하는 시점’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결합을 형성하는 순서를 과감하게 바꿔야만 했죠.”

연구팀은 ‘베타-하이드록시트립토판’이라는 아미노산 유도체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16단계의 공정을 설계했다. 핵심 전략은 ‘마스킹(Masking, 위장)’ 기술이었다. 연구팀은 공정 초기에 민감한 이황화 결합을 미리 도입하되, 후속 반응의 가혹한 환경에서 이것이 파괴되지 않도록 보호된 황화물 형태로 변환하여 숨겨두었다. 그리고 두 개의 반쪽을 결합하는 이량체화(Dimerization)가 성공적으로 끝난 뒤에야 비로소 이들을 원래대로 복원시켰다.

이것은 마치 정교한 시계 부품을 조립할 때, 가장 약한 부품을 보호 캡으로 감싸 조립한 뒤 마지막 순간에 캡을 벗겨내는 것과 같은 치밀한 전략이었다. 이로써 연구팀은 50년 만에 처음으로 버티실린 A의 완전한 구조를 실험실에서 재현해 내는 데 성공했다.

실험실을 넘어 환자에게로: 소아 뇌암과의 전쟁
화학자들의 승리는 곧바로 의학자들의 희망으로 이어졌다. 이번 연구는 단순한 화합물 합성을 넘어, 실제 질병 치료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다나-파버 암 연구소(Dana-Farber Cancer Institute) 및 하버드 의과대학의 준 치(Jun Qi) 교수팀과 긴밀한 협력을 진행했다.

연구팀이 주목한 질병은 미만성 중추신경계 교종(Diffuse Midline Glioma, DMG)이었다. 이는 주로 소아에게 발병하며, 현재로서는 마땅한 치료 옵션이 없는 매우 치명적인 뇌종양이다. 준 치 교수와 공동 연구진은 모바사기 연구실에서 갓 합성된 버티실린 A와 그 유도체들을 DMG 세포주에 투여했다. 결과는 고무적이었다. 특히 ‘EZHIP’이라는 단백질을 과다 생성하는 암세포에서 탁월한 효과가 나타났다.

작용 원리: 버티실린 유도체는 EZHIP 단백질에 영향을 미쳐 암세포의 DNA 메틸화를 증가시킨다. 이는 암세포의 유전자 발현 패턴을 교란해 스스로 사멸(Apoptosis)하게 만든다.
최고의 선수: 개량된 버전인 ‘N-설포닐화된 버티실린 A’ 유도체는 천연 상태의 분자보다 안정성이 높으면서도 강력한 항암 효과를 보였다.

준 치 교수는 이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 화합물들의 잠재적 표적을 식별해 낸 것은 작용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바사기 교수팀의 합성 기술을 이용해, 암세포만을 더 정밀하게 타격할 수 있는 최적화된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다
이번 연구의 의의는 단순히 하나의 분자를 합성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모바사기 교수팀은 난공불락이라 여겨졌던 복잡한 알칼로이드 구조를 자유자재로 변형하고 합성할 수 있는 ‘플랫폼 기술’을 확보했다. 이번 논문의 제1 저자인 워커 크나우스 박사(MIT, 24학번)를 비롯해 시우치 왕, 마리엘라 필빈 박사 등 수많은 연구자의 땀방울이 모여 이뤄낸 성과다. 연구팀은 이미 800개 이상의 암세포주에서 후보 물질들을 분석했으며, 이제 다음 단계인 동물 모델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곰팡이가 만들어낸 미세한 분자가, 이제는 인간의 아이들을 암으로부터 보호하는 강력한 방패가 되려 하고 있다. 50년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다. 과학은 다시 한번 불가능의 영역을 가능의 영역으로 옮겨 놓았다.

용어 설명
입체 중심 (Stereocenter): 분자 내에서 원자가 연결된 방식은 같지만, 3차원 공간에서의 배열이 달라지는 지점. 의약품 합성에서 이 배열이 바뀌면 약효가 없거나 독성이 될 수 있어 매우 중요하다.
이합체 (Dimer): 동일하거나 유사한 두 개의 분자(단량체)가 결합하여 형성된 화합물.
EZHIP: 미만성 중추신경계 교종(DMG)에서 과발현되어 종양의 성장을 돕는 것으로 알려진 단백질. 이번 연구의 주요 표적이다.

참조:
Walker Knauss, Xiuqi Wang, Mariella G. Filbin, Jun Qi, Mohammad Movassaghi. Total Synthesis and Anticancer Study of ( )-Verticillin A. Journal of the American Chemical Society, 2025; 147 (50): 46430 DOI: 10.1021/jacs.5c1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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