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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癌)그렇지! - 방귀를 참지 마라!
고정혁기자2009년 03월 13일 12:01 분입력   총 889659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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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만|대장암 3기. 장로회신학대학원 샌프란시스코신학 대학원 졸업. 대한예수교장로회목사, 교회성장연구소 대외협력실장 재임. jesusn@naver.com

방귀를 참았다가 다시 방귀를 뀌면 어떻게 될까? ①더 독해진다. ②더 순해진다. ③상관없다.
답은 3번이다. 최근 텔레비전 어린이 과학 퀴즈대회에서 나온 문제였다. 대부분 어린이는 1번 ‘더 독해진다’를 택했다. 나 역시도 1번이 답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답이 3번 ‘상관없다’라는 것을 알고 매우 놀랐다.
참았다 뀌는 방귀가 독하지 않은 이유는 그때 나오려던 독가스(!)가 장에 머물렀다가 다음에 다시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란다. 그 독가스는 없어지지 않고 다른 장기로 퍼져서 흡수되어 버린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러기에 방귀를 참아도 더 독해지지 않는다.

<월간 암> 6월호에 해찬들님의 에세이 <내가 살아가는 방법>을 읽다 보니 직장암 환자로 방귀 때문에 가슴을 아리게 하는 이야기가 나와 있다. 대부분 암은 소화기 계통이라서 수술 후에 방귀가 많이 나온다. 특히 대장암이나 직장암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방귀가 나오며 또한 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우들이 많다.
나도 대장암 수술 후 초기에는 하루에도 수백 번의 독한 가스를 내 뿜은 적이 있었다. 최근에는 관장하면서 방귀가 줄어들고 냄새도 덜하지만, 음식을 잘못 먹었을 때나 과식을 한 경우나 고기 등을 먹었을 때에는 여지없이 방귀가 발사된다.

2년 전 중국 장가게로 여행 중에 상당히 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내가 마지막에 타고 엘리베이터 안내원이 뒤에 탔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강력하고 고약한 방귀가 나와서 당황하고 30여 명의 승객이 고통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얼마 전에는 오페라 관람을 하는데 20발이 넘는 방귀가 나오는 바람에 참을 수는 없고 소리 안 나게 발사하느라고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냄새가 조금 덜 심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분위기와 환경을 보아서는 방귀를 참아도 되지만 암 환우들이 방귀를 참는 것은 절대로 안 될 일이다. 방귀를 참음으로 인하여 다른 장기로 퍼진 독이 암세포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환자들과 방귀는 절대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수술을 하고 나면 의사나 간호사, 문병 온 사람이 ‘방귀가 나왔는가?’를 물어본다. 방귀가 나와야지 물이라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술 후에 2, 3일 만에 방귀가 나오면 다행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일주일이 지나서도 방귀가 안 나와서 애를 태우는 경우들이 많다. 심한 경우에는 장이 꼬여서 다시 개복을 하고 장의 위치를 정렬하거나 손을 봐야 하는 일도 있다. 그러기에 수술을 한 환자들에게는 방귀가 몹쓸 것이 아니라 너무나 귀한 “방귀님”이다.

암환자는 방귀를 절대로 참아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아무 곳에서나 방귀를 발사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아무튼, 가능하면 참지 말고 요령껏 방귀를 뀌어야 한다. 서양에서는 생리적인 현상이라고 방귀를 실례로 보지 않는다. 그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독한 방귀이다. 독한 방귀가 나오는 암 환우일수록 참지 말아야 한다. 적적한 대처를 통해서 참기보다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조치를 잘해야 할 것이다.

암 환자가 참지 말아야 할 것은 방귀뿐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속에서 끌어 오르는 화와 분노를 참으면 방귀와 마찬가지로 화와 분노가 가진 독이 온몸으로 퍼져 갈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화와 분노를 방귀처럼 아무 곳에서나 분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면 암환자에게 나타나는 화와 분노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암 환우의 특징 중의 하나가 화와 분노를 참기는 참는데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몸에 안 좋은영향이 미치게 한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참는데 속으로 못 참으면 진정한 인내가 아니다. 이렇게 인내하는 것은 방귀를 참는 것보다 더 큰 독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화와 분노를 다스리기란 참으로 어려운 과제이다. 그렇다고 안 생기게 할 수도 없고 방귀처럼 안 보이는 곳에서 발사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 이를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내가 깨져야 진정으로 내가 산다”라는 말을 종종 하거나 들을 때가 있다. 도대체 깨지는 것이 뭐란 말인가? 어떻게 깨지는 것이 그것도 내가 깨지는 것이 사는 것일까? ‘친구와 싸워서 깨졌다’라는 것은 졌다는 뜻이다. 그러면 지는 게 이기는 것이고 산다는 뜻인가? 그런 뜻도 있지만 좀 더 깊은 뜻을 찾아보자!

계란이 하나 있다. 그리고 계란의 껍데기가 깨지면서 속에서 병아리가 나온다. 속에서 병아리가 나오는 것은 껍질이 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있는 병아리가 때가 되어서 밖으로 나오려고 움직이기 때문에 껍질이 깨지는 것이다. 내가 깨져야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는 내가 진정으로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껍질이 깨어지는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껍질을 깨야 한다. 그 깨어짐이 화와 분노처럼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이 깨어짐은 내가 살기위한 영혼의 깨어짐이요, 생명의 소리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에게 폭력적인 행동이 나타나는 것은 그동안 눌려왔던 것이 폭발되는 때도 있다. 이는 치료의 단계로 볼 수 있다. 우리는 화가 나면 상대에 의해 반영된 나의 행동이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분노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이미 내 안에 내재한 분노와 억울함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남에게 욕을 먹고 그 결과로 마음이 상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원래 상한 마음의 기운이 내게 먼저 있었고, 그 기운이 상대방에게 욕을 하게 시킨 것이다. 모든 기운의 근원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내 안의 기운이 바깥의 일들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고통과 즐거움이라 하는 것은 내 영혼의 작용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환경의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를 화나게 하고 분노케 한 대부분의 일이 내 안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면 지난 일이 억울하지도 화가 나지도 않게 된다. 지난 일을 담담히 바라볼 수 있게 되며 현재가 좋을 뿐이다. 내가 암에 걸린 것은 누가 준 것이 아니고 내가 가져오도록 작용을 한 것이다. 그러기에 암을 저주하거나 환경을 탓하거나 가족들과 모든 관계를 원망할 필요가 없다. 상대를 바라볼 틈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내재한 요소들을 통해서 나의 ‘에고’를 깨뜨리어 정화해 성숙시켜 나가기에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은 약 8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그 세포 하나하나에 ‘선과 악’, ‘화와 분노’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나도 모르는 잠재의식의 가장 밑바닥에는 ‘욕망과 집착’의 뿌리가 남아있다. 이를 깨뜨리고 나오기가 쉽지가 않다.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주변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화와 분노를 안겨 줄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겨누는 독화살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의 감정은 몸과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 그래서 화가 날 때에 밥을 먹으면 안 된다. 화가 혈관을 수축하기 때문에 혈압이 오르고 호흡이 가빠져 체하기 쉽기 때문이다.

임금이 어느 젊은이에게 성을 하나 주겠다고 했다. 조건으로 물이 가득 담긴 컵의 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을 돌아올 수 있으면 줄 수 있으나 대신 한 방울의 물이라도 흘리는 날에는 그 자리에서 사형이라고 했다. 청년은 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긴장하고 조심하면서 성을 돌았다. 땀으로 온몸을 적시고 돌아왔다. 그 젊은이에게 임금님은 물었다.
그래 돌면서 무엇을 보았느냐? 무슨 생각을 하였느냐? 모퉁이의 가게는 보았느냐? 장터에는 사람이 많더냐? 젊은이는 화가 나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컵만 보고 오느라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니까요!

암 환우가 살려면 우선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자신에게 병이 오기까지의 지난 과정을 세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자신이 주어진 일에 집중하다 보면 다른 곳엔 신경을 쓸 수 없다. 암 환자가 가야 할 길은 이기적으로 자신에게만 신경을 써야 한다. 다른 어느 곳도 쳐다볼 여유가 없다.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염려하며 스트레스 받으며 힘들게 살 필요가 없다. 자신을 온전히 정화하는 길(자신의 에고를 깨뜨리는 일)만이 자신을 살리는 길이고 자신을 다스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사소한 일과 감정에서부터 행복을 느끼는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해보라! 행복해 질 것이다. 그 행복을 하나씩 둘씩 느끼다가 보면 어느 순간 병은 떠나가고 있을 것이다. 찰리 브라운과 강아지 스누피가 행복을 느낀 순간은 연필을 찾았을 때, 휘파람을 부는 방법을 배웠을 때였다. 소소하고 일상적인 모습 속에서 얼마든지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자신에 대하여 조금은 둔감해 질 필요가 있으며 남과 비교할 이유도 없다. 그러는 순간에 어느덧 내(에고)가 깨어지고 내 안의 ‘화와 분노’가 사라지고 있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암 환우들이여! 자신 있고 신나게 방귀를 뀌어라! 그리고 나를 깨뜨리고 내 안에 있는 참 행복을 찾아라!

뒤로월간암 2008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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