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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정한 마음과 본성치유 - 2
고정혁기자2011년 03월 08일 17:31 분입력   총 880113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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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건 암대체요법 연구소 연구소장.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기억은 도대체 어디에 숨겨지는가?

그림치유를 통해서든, 음악치유를 통해서든 사람들은 각자의 오랜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같다. 대부분의 일상은 다 잊어버리면서도 왜 어떤 기억들은 계속 남아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기억들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되살아나는 것일까?

이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는 뇌가 기억을 담당하므로 뇌에 기억된다고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굳이 다른 말로 표현하고 싶다. 기억은 뇌를 포함한 몸 전체에 기록된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표현을 해야 하나님이 직접 빚어 만드신 몸의 놀라운 비밀을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몸이 말하는 언어의 비진실성을 이해하고 몸의 정직한 반응들에 좀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서이다.

사실 사람의 경험은 뇌가 하는 것이 아니다. 몸의 감각세포가 경험하는 것인 동시에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통합된 인격체로써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뇌를 포함한 온몸이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사건은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영(spirit)을 가진 한 생명체가 경험하는 영적경험이므로 각자의 영 깊숙한 곳에도 새겨지는 놀라운 경험일 수 있다. 그러므로 단지 ‘뇌가 기억한다’라고 한정 짓는다면 전인치유를 설명할 수 없고, 비록 설명을 들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아픈 기억, 두려웠던 기억, 감추고 싶은 치욕적인 기억이 다시 생각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물론 이것은 감정 혹은 느낌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 개인에게는 온몸과 마음(지·정·의의 통합체) 그리고 영이 다 같이 경험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사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방식은 “당신의 온몸의 세포가 모두 기억하고 있다.”이다. 왜 “당신의 온몸의 세포가 기억하고 있다”라고 표현하기를 원하는지를 모든 분들이 간절히 알기를 간절히 원한다.

기억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목소리가 큰 사람을 무조건 싫어한다. 지금 목소리가 큰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진짜 이유는 자신이 경험했던 목소리 큰 사람에 대한 나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억이 강한 사람은 다시 목소리가 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좋은 경험을 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관계를 통한 경험은 몸, 마음 그리고 영혼을 가진 전인격적 존재로써 또 다른 전인격적 존재를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쪽에서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에 몸의 일부 세포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면 두 사람은 전인격적인 관계 형성이 안 될 수밖에 없다. 비록 관계는 필요를 느낀 몸과 마음의 이끌림으로 인해 시작되었지만, 한쪽에 속한 사람의 몸이 다른 사람의 몸에 가까이 다가가 느껴보니 상대방 인격의 한 부분인 큰 목소리에 대하여 자신의 몸의 세포가 의외의 거부반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아마 이렇게 소리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슈퍼에 갔다가 주인의 큰 목소리에 영향을 받아 계속 마음이 쓰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게의 물건도 유통기간이 지나거나 수준 낮은 물건들일 것이라고 느껴져 정말 급히 꼭 필요한 물건 한 가지만 사거나 아니면 “제가 원하는 물건이 없네요”라고 말하고는 곧 돌아서 나올 것이다. 그러면서 가게가 지저분하다거나, 주인아저씨가 도둑놈처럼 생겼다거나, 친절하지 않다거나, 물건 하나의 값을 떠올리며 값이 너무 비싸다거나, 유통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물건을 판다거나 하는 등 여러 이유 중 하나라도 떠올리면서 불평하기 마련이다.

길을 가다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라면 어떨까? 당시 자신이 성폭행당했던 장소와 폭행자에 대하여 온몸의 세포는 기억과 감각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비슷한 옷을 입은 남자가 지나갈 때,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가 지나갈 때, 외진 거리를 갈 때 뒤에서 들리는 남자의 발소리, 비슷한 느낌을 주는 시간대와 거리 풍경을 대할 때, 갑자기 온몸의 세포가 신경질적으로 예민해지고 쭈뼛 곤두서기 마련이다. 그곳을 빨리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고 뒷골과 어깨가 움츠러들고 다른 것을 돌아보거나 판단할 여력이 없이 허둥대며 빠른 걸음으로 그 장소를 벗어나고자 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만일 결혼 후 시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계속 지적을 받으며 살아온 며느리라면 시어머니에 대한 그 몸의 반응은 어떨까 생각해보라. 시어머니의 말투, 몸짓 등을 떠올리게 되는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의 자신의 몸과 마음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그것이 생생하게 상상이 되는 분이라면 아마 틀림없이 비슷한 경험을 하였으리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항상 반대하던 부모 밑에서 성장한 자녀라면 어떨까? 자신은 꽃이 좋고 음악이 좋고 노래가 좋은데 공부만 하도록 강요하고 자신의 취미나 본성은 다 쓸모없는 것이라고 무시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아마 약한 자를 억압하거나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하는 사람을 대하게 될 때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고 상황이지만 괜히 흥분하며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항상 부모나 상관 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의견이 무시되며 자란 사람이라면 실제로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이 아님에도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적개심을 표시하기도 한다. 더욱 심하면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에 찬성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행동이나, 좀 더 생각해보자는 말조차 자신을 거부하는 것으로 느낄 수 있다.

실제로 사람들은 사실에 반응하기보다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느낌에 따라 몸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심리학이나 신경과학에서 모두 인정하고 있다. 꼭 학문의 검증을 빌어오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아마 이 부분이 이해되지 않는 분이라면 적어도 암에 관한 한 축복할 만한 일이다. 적어도 그런 분은 암에는 걸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쁜 기억이 어떤 경우로도 삶에 영향을 미치는 않는 사람은 언제나 새로운 경험을 주저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정말 부럽고 또 부러운 사람이다. 사실 그런 사람이 바로 필자였다.

기억이 어떻게 치유에 영향을 미치는가?

기억은 치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실 기억의 영향력은 앞에 언급한 대로 전인격체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온 창조세계의 각 차원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주제를 인격체에 제한하여 다루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나도 잘 모르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기억이 어떻게 치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앞서 설명한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세포는 경험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경험과 관련된 느낌이나 감정을 함께 기억한다. 어쩌면 세포가 기억하는 것은 경험 자체가 아니라 느낌이나 감정인 것 같다.

앞서 언급된 설명처럼 목소리가 큰 사람에게 좋지 않은 느낌과 감정이 기억된 사람은 목소리 큰 사람을 만나면 거부반응을 보이는데 이때 영향을 끼친 큰 목소리란 단지 세포에 제공되는 한 가지 자극일 뿐이다. 그런데 몸의 반응은 언제나 전인격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생명체는 기계가 아닌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몸의 아주 작은 부분인 청각세포가 받는 영향이 같은 한 생명체를 이루는 유기체 안에서는 느낌에 영향을 미치고, 감정에 영향을 미치고, 동시에 의지와 행동에 모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정말 크게 잘못된 것이다. 몸에 나쁜 경험을 주었던 뜨거운 불에 데인 세포가 다시 더 뜨거운 불을 만났는데도 전혀 걱정도 하지 않고 주의하지 않는다면 더 크게 화상을 입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져 수개월간 병원 신세를 진 사람이 훨씬 더 위험한 높은 난간에서도 조심하지 않는다면 큰 걱정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몸을 다른 생명체에 비하여 약하게 만드시면서 대신에 민감하고 지혜롭게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스스로 강한척하다, 곧 불에 데여 죽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허무하고 어처구니없이 죽도록 하지 않으셨다. 강한 육체 대신에 민감한 육체와 창의성 있는 지혜를 주셨다. 나는 이 사실이 너무 감격스럽고 기쁘다.

만일 우리 인간이 민감하지 못하고 터무니없이 용감하기만 하다면 전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고 곧 멸망하지 않겠는가? 민감하여 몸의 약함을 다룰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위해 시간과 노력과 돈을 투자할 만큼 지혜롭지 못했다면 의학이 발전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이런 예민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제발 그만 원망하라. 그리고 그분을 기뻐하기 바란다.

이야기가 옆으로 빠진 것 같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자. 세포가 기억하는 것은 경험 자체가 아니라 느낌이나 감정인 것 같다고 말했다. 만약 세포가 경험만을 기억한다면 또다시 불에 화상을 입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하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아! 이런 경험이 있었어”라고 말하고는 여전히 똑같은 경험을 반복할 것이다. (아내의 말을 빌리면 내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만사에 태평하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비슷한 느낌, 즉 위험성에 대한 느낌만 와도 스스로 주의하고 그 환경을 피해간다. 눈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위험 상황이 재현될 환경이나 상황이 아니어도 느낌만으로도 위험을 간파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쁜 기억도 그 자체로는 자신을 보호하도록 안배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배려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내 몸의 세포에 위험성을 느낄 수 있는 놀라운 센서(senser)를 주셔서 이전의 오랜 경험을 그 짧은 순간에 기억나게 하시고 스스로 돌보게 하신 것이다. 인간이 만일 눈으로 보고, 냄새 맡고, 듣고, 만져보고 할 수 있는 것만으로 판단하고 분석하여 의존한다면 위급한 상황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인간의 지혜에만 의존하다 보면 순간 대처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만성화된 스트레스가 암을 만들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감정과 느낌이 있다. 물론 감정과 느낌이 매우 민감한 사람과 매우 둔감한 사람이 있어 그 상대적인 차이가 매우 크다. 그리고 대개 만성병이나 암과 같은 불치의 병을 앓는 사람은 특히 현실에 대한 감각이나 감정에 매우 민감한 특징이 있다.

2007년 봄에 한 자매가 병원에 입원하였다. 관례대로 입원 전에 외래에서 환자인 자매와 남편의 MBTI 성격유형을 검사하였다. 자매는 ENFP 유형(스파크형)으로 아주 외향적이고 창의적이며 감성적인 성격이었고 남편은 ISFJ 유형(임금뒤의 권력형)으로 차분하고 세심하며 사리분별력이 뛰어나고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매의 병력은 정말 대단했다. 5년 전에 우측 유방암의 2기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수술과 방사선치료를 하고 예방적 항암치료도 잘 마치고 약 1년간은 건강하게 지내었다. 1년 후 반대편 유방에 종괴가 만져져 역시 수술을 하고 다시 항암치료를 하였다. 그리고 다시 어렵게 건강을 회복하자 이젠 난소와 간 그리고 인접한 대장 일부에서 새로운 종양이 발견되었다. 아마 항암과 방사선치료로 면역력이 현저히 떨어지자 다시 암이 생긴 것 같다. 항암치료를 반복하는 많은 환자에게서 이런 일들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다시 수술로 한쪽 난소와 자궁을 적출하는 수술과 간과 대장의 일부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하였다. 그리고 또 더 독한 항암제치료를 받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복수가 생기고 간 수치가 높아져 이 상태로는 병원에서 치료할 수 없다고 하며 체력을 보충한 후 다시 병원으로 오라는 사형선고를 받고 퇴원하였다.

사실은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받을 때마다 체력과 면역력을 유지하려고 이들 부부가 쏟은 노력은 대단했다. 경희대 한방병원을 비롯하여 여러 용하다는 한방병원의 처방을 병행하였기에 그 지독한 치료과정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한방의 처방도 전혀 효과가 없을 정도로 몸의 신진대사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이다.

남편은 직감적으로 이젠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왔다고 한다. 그래서 수소문을 하여 <행복한병원>에서는 의사가 대체요법으로 치료한다는 것을 알고 진료상담을 하러 왔던 것이다.

한데 나는 두 부부의 성격유형과 남편의 실천적인 행동을 보고 이들에게 소망을 보았다. 이는 순전히 MBTI라는 성격유형을 오랫동안 이용하여 사람들의 천성적 선호경향을 파악하여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한 달 동안 직장을 포기하고 아내 곁에서 간병하며 치료를 도울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남편은 무슨 일이든 자신이 도움될 수 있는 일이라면 돕고 싶다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양가 집안의 어른들이 열과 성을 다하고 있어서 받아들일지 모르겠다며 걱정하였다.

나는 양가 집안에 발언권 있는 모든 분들을 모시고 다시 상담을 위해 내원하라고 말하고 부부에게는 내가 양가 어른들을 설득할 테니 염려 말라며 서울로 올려 보냈다. 이틀 후, 양가의 집안사람들이 함께 상담하러 왔는데 무려 20명이나 되었다. 한 사람의 입원 여부를 결정하려고 내원한 가족 중 가장 많은 숫자였다. 이들의 방문 목적은 서울의 유수한 대형병원이 아닌 시골의 작은 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진료실은 애초부터 가족 상담을 이유로 해 꽤 넓은 편인데도 10여 명이 들어오자 꽉 차고 나머지는 문을 열어놓고 밖에서 나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환자의 5년 동안의 병력을 이야기하면서 이만큼 지내온 것은 가족들의 사랑과 배려 때문이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지난 5년 동안의 치료에도 계속 재발과 전이를 하고 이제는 국내 최고의 병원과 한방병원에서도 진료를 포기한 환자인데 마지막으로 환자가 원하는 진료를 하도록 도와달라고 말하였고 가족들의 동의와 함께 사랑과 정성이 하나로 뭉칠 때 치유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하였다.

아울러 치유는 환자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니만큼 환자가 몸으로, 마음으로 그리고 영혼 깊숙한 곳까지 원하는 치료야말로 치유를 일으키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는 가족들이 로비에서 모여 결정을 한 후 진료실로 들어와 결정한 것을 말해달라고 하고 밖으로 내보내 가족회의를 하도록 하였다. 감사하게도 현명한 가족들은 자신들은 원하지 않지만 부부의 소원이니 행복한병원에서 입원·진료하는 것을 허락하였다며 꼭 치료가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부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가족들에게 몇 가지 협조할 사항을 일러주었다. 일단 행복한병원의 진료를 맡겼으니 누구도 다른 말을 하여 환자와 남편의 사기를 꺾지 말 것, 면회는 환자의 주말의 낮에만 허용하며 3시간을 넘지 않을 것, 양가 가족들이 매일 한 분 이상씩 환자에게 좋은 내용만 쓴 사랑의 편지를 보낼 것, 병문안시에는 최고의 유기농 과일과 채소를 충분히 가져올 것 등을 주문하였다. 이 가족들은 이를 훌륭히 지키기로 약속하였고 실제로 너무나 훌륭하게 사랑의 약속을 실천하였다.

뒤로월간암 201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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