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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결정과 잘못된 결정 III
고정혁기자2011년 05월 31일 18:00 분입력   총 878237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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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건 | 연세대 의과대학 졸업. 암전문병원 행복한 병원장 역임.
현 성은실버요양원 원장
문의 | //www.silver100.kr/ 041-675-8879/ 충남 태안군 태안읍 남산리 32-4

암 투병에 관한 잘못된 결정

잘못된 결정 예1. 원하지 않는 항암치료를 강권에 의해 수용한 경우의 불행
자신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경우에 몸은 마음과 합하여 항암제의 독성을 이기고 면역력을 유지하면서 치료를 해 나갈 수 있다. 반면에 마음으로는 정말 하기 싫은데 가족들의 권유를 뿌리칠 용기가 없어 항암치료를 받는다면 몸은 마음에 순응하기 때문에 면역력이나 생명력이 발휘될 가능성이 없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항암치료의 부작용이 심하게 나타난다. 항암치료의 효과는 거의 없고 면역력은 전혀 발휘되지 않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환자 자신과 가족이 모두 원하지 않는 것이다. 의료진도 치료에 효과 없이 부작용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항암치료를 통해 반드시 치료하겠다는 자기 의지도 없는 환자를 계속 치료할 생각이 안 들기 마련이다.

이는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일 뿐이다. 이런 환자를 가족들은 도울 수가 없다. 항암치료를 두려워하고 적극적으로 감당해보려는 의지가 없으면서도 그런 마음을 비밀처럼 숨긴 채 항암치료를 하겠다고 수용하고서는 부작용이 나타날 때마다 너무나 괴로워하는 환자를 보면서 가족들은 죄책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저렇게 힘들어하는 항암치료를 공연히 권유하여 내 가족을 괴롭게 하였구나하는 죄책감은 환자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게 한다. 환자의 신음소리가 자신을 탓하는 소리로 들리기 마련이다.

민감한 암환자는 이런 보호자의 긴장을 무의식적으로도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그리고는 보호자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짜증을 내고 감당하기 어려운 분노와 화를 쏟아낸다. 모든 것이 남의 탓이고 자신은 피해자라고 울부짖는 환자 곁에서 도무지 간병을 도울 수가 없게 된다.
이런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다. 왜냐하면 환자가 자신이 원하지 않은 결정에 대하여 마음으로 거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몸으로도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가족들을 괴롭히기는 하지만 환자의 몸과 마음과 똑같이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면역력의 저하는 상대적으로 덜 나타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서는 치유를 경험할 수는 없다. 이제 몸과 마음이 모두 항암치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당연히 항암치료를 중단하여야 한다. 의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항암치료가 맞지 않는다는 말을 듣기 전이라도 스스로 항암치료를 중단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마음이 심약하고 가족에 대한 의존성이 큰 이런 분들의 경우에는 병원이 권유한 항암치료를 포기하는 것이 병원 진료 자체를 포기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더 나아가 자신이 병원의 진료를 포기했기 때문에 가족들이 더 이상 자신을 돕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의료진 특히 자신의 주치의가 자신의 진료를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생각들은 진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현대의학의 치료방법 중 하나의 방법이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방법으로 치료하면 된다. 병원 진료 자체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주치의도 이렇게 부작용이 심하게 나타나는 사람이라면 항암치료가 큰 효과를 보이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미 주치의는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환자와 가족들에게 항암치료가 효과를 보일 가능성이 10~30% 정도라고 말한바 있다. 그러므로 효과가 없어 안타깝지만 부작용이 너무 심해 감당하지 못하는 환자에게 죽을 때까지 해야 된다고 강권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정직한 의사라면 항암치료에 잘 반응하지 않는다며 항암치료를 중단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의사는 혹시 있을 기적과 같은 가능성을 생각하며 항암제의 종류를 바꾸어 다시 항암치료를 권유한다. 의사가 환자의 진료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실제적인 이유는 의사로서 자신의 환자에게 자신의 입으로 환자의 질병을 도울 방법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직면하여 말하기가 어렵다. 의사가 좀 더 빨리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환자뿐만 아니라 의사에게도 치료의 실패를 선언하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의사가 단지 선택하였던 하나의 방법이 환자에게 맞지 않은 것인데 인생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남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의사에게도 역시 자신을 직면할 용기가 필요하다.

이때 환자 자신이라도 정직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항암치료 방법의 중단을 선언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암 투병 자체의 포기가 아니다. 단지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은 항암치료를 중단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효과도 없고, 설사 효과는 있더라도 견뎌낼 육체적 능력이 없는 치료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 자신이 죽어야 암이 낫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항암치료 방법을 중단한다고 치료 자체가 포기된 것은 아니다. 한의학적 치료방법과 대체의학적 치료방법 등 아직도 자신이 선택할 많은 방법들이 있다. 현대의학적 치료방법은 실패했어도 현대의학적인 검사 능력은 아직도 유용하다. 그러므로 지속적으로 관계를 가져야 한다.

공연히 자신이 주치의가 자신을 더 이상 진료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릇된 착각이다. 의사는 다만 자신이 선택한 치료가 환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의사는 환자의 진료를 거부할 수 없다. 환자가 항암치료를 중단한다 하더라도 "더 이상 내 진료를 받을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말 할 의사는 없다. 그럴 권리도 없다. 아마 환자의 주치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안타깝습니다. 부작용이 약한 다른 항암제를 이용해 다시 시도해 볼 수 있는데 중단하시겠다니! 그래도 2~3개월 간격으로 검사는 받으셔야 합니다. 어디서 무슨 치료를 하시든지 저에게 오시면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의사는 신이 아니고 무슨 권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단지 의학적 전문성을 가지고 아픈 환자를 돕기 원하는 선량한 사람이다. 그도 한계가 분명한 사람일 뿐이다.

항암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투병의 중단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주치의와 가족에게 용기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치료가 무엇인지 큰 소리로 용기 내어 말하라. 그리고 자신의 결정을 도와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하라. 자신에게 맞지 않는 치료를 억지로 받다가 괴로워하며 죽거나 좀 더 사느니, 좀 더 시간이 걸리거나 혹은 암을 갖고 사는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받아들일만한 치료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여야 한다. 그래야 살 희망이 생긴다.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용기 있는 믿음의 결단이 생명력의 불씨를 타오르게 한다. 더 이상 살 희망이 사라졌다고 속삭이는 감정의 속삭임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죽기를 결심하고 선택한 결정이야말로 자신을 살리는 선택이다.

잘못된 결정 예2, 도피의 수단으로 치료방법을 결정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
어떤 분은 스스로 선택하여 항암치료를 중단하거나 포기하고 찾아오지만 도무지 치료의 나머지 영역에서 전념하지 않는 분도 있다. 이들 중 일부는 항암치료를 받던 중 부작용이 너무 심하여 스스로 가족을 종용하여 내원한 경우인데도 정작 자신이 선택했다는 치료에는 항상 뒷전인 사람이다. 이런 분이 많지는 않지만 대부분 일정한 양상을 보인다.

이들의 독특한 양상은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이다. 이들은 항암치료를 중단하였지만 대부분 항암치료를 선택한 것은 장본인이다. 하지만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부작용이 심해지자 곧 주치의를 탓하기 시작한다. 항암치료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들었고 주치의나 가족들 앞에서 최선을 다해 항암치료를 받고 꼭 암을 이겨내겠다며 장담하였다. 그런데 자신의 예상보다 항암제의 부작용이 자신의 삶에 미치는 부분이 너무 큰 것이다.(그러나 실제로 다른 사람들이 감당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심한 것이 아닌 경우다).

누구보다 멋있고 품위 있게 항암치료를 이겨내는 모습을 상상하였고 그런 대단한 사람으로 남들에게 비쳐지길 소망하였다. 하지만 암을 태워 죽이는 항암치료가 그렇게 쉬운 것인가? 2차, 3차 항암치료가 진행되면서 자신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특히 도저히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는 품위 있는 투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극심한 부작용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항암치료를 감당할 능력이 안 된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항상 남 탓을 하여야 자신의 자존심이 깨지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주치의가 불성실하다거나, 간호사가 자신에게 무례하다는 등 다른 이유를 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도저히 이 병원에서 있을 수 없다며 가족들을 들볶게 된다. 그래야 항암치료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현대의학적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하겠다고 말한다. 자신에게는 병원이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면서 더불어 항암치료도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조용히 항암치료에 대한 거부감을 표현한다.

이분들이 표현하는 방식은 덜 중요한 문제를 부각시키면서 실제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항상 뒤에 옵션처럼 넣는 방식이다. 물론 다른 구체적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현대의학병원과 항암치료를 신중히 고려하여 선택한 것이 아니다. 현대의학의 대형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이 가장 최고의 치료이고 또 품위 있는 치료라고 단순히 느꼈기 때문이다. 항암치료도 그 기대효력과 부작용에 대하여 신중한 고려 없이 선택하였듯이 이분들이 원하는 다른 대안적인 치료방법도 자신이 스스로 알아보고 신중히 선택한 치료방법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품위를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드는 현재의 병원을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이들은 남 탓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임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항암치료의 고통과 부작용이 줄어들 가능성이 거의 없다. 항암치료 자체의 효과나 부작용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여 생기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이 남을 탓하는 것은 남을 용서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치료를 품위 있게 감당해내지 못하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여 가중되는 고통이 문제인 것이다.

이런 분들의 전인치유는 모든 것을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시작이 된다. 자신의 몸에 대한 불평불만을 내려놓고, 질병에 걸린 몸에 대하여 사과해야 한다. 자신이 몸을 사랑하고 아끼고 관리하지 못한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몸을 자신의 내재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포장으로 사용하지 않고 몸 자체의 생리적 욕구를 이해하며 관리하기로 결심하여야 한다. 그리고 몸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정성을 다해 표현해야 한다.

보호자가 가장 우선으로 할 것은 이들이 삶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자존심을 세워주는 일이다. 그들은 사람 앞에서의 자존심이 세워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의 모든 선택들이 그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당신은 항상 최선을 다했다'라고 칭찬해 주어야 한다. 당신이 아닌 누구라도 당신처럼 똑같이 힘들어 했을 것이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잘못된 결정 3, 자신이 원하는 치유방법이 없고 의존성만 있는 사람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이 원하는 치유의 방법이 있지만 그 방법을 주장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암환자는 대부분 일반인이 보기에 마음이 선량한 착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결정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시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몸의 반응을 맞추는 식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한 경우에는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한 경우가 적다보니 무엇이 자신의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조차 모르고 사는 분들도 많다.

이런 분들은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자신의 의도를 감추고, 자신의 생각을 감추고 생활한다. 물론 이런 것이 그들이 원하는 삶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주장 앞에서 자신의 다른 주장(생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큰 결례이며 예의가 아니라고 배웠고 또 그렇게 행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을 경험하였으며 상대방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지 않는 안전한 방법인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쉽게 자신의 단점을 안전하게 감추는 방법 뒤로 자신은 숨어버린 경우다.

이런 경우 무슨 치료를 한다고 설명하여도 별 관심이 없다. 치료에 대한 저항도 없다. 죽음에 대한 생각도 별로 없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실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며, 없을 수도 없다. 다만 모든 감정을 감추는 것이 익숙하다보니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르고 사는 것이다.

이 분들은 치료 자체보다는 가족들의 반응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가족들이 권하면 항암치료를 한다. 반대로 가족들이 다른 방법을 권하면 또 저항 없이 그대로 하겠다고 결정하고 따른다. 문제는 스스로 최선의 방법을 배우려고 하고, 스스로 잘 하겠다는 결심을 하거나 의지를 굳게 하고 일관된 투병 패턴을 유지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일련의 과정들이 투병하는 환자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혼자서는 필요한 처방약이나 영양제 혹은 고가로 구입한 면역보충제마저 먹지 않는다. 보호자가 일일이 다 챙겨서 먹으라고 하면 마지못해 먹는다. 보호자가 운동하자고 말해도 혼자서는 운동을 하지 않으려 한다. 꼭 가족이 동행하여야만 운동을 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투병 가이드를 받아도 자신은 잘 모르니 가족에게 말해주라고 말한다. 모를 일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반응하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마치 자신의 투병이 아니라 가족의 투병인 것처럼 반응한다.

이들은 가족들이 열심과 성의가 있는 경우라면 비교적 치료에 저항 없이 잘 순응한다. 하지만 가족이 돕지는 않으면서 자신에게만 노력할 것을 강요하면 저항하기 시작한다. 가족에게 도와주지 않거나 무성의하다고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는다. 다만 먹지 말라고 한 것들만 골라 먹고 치료 프로그램에 가지 않겠다고 짜증을 부린다.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 인생을 살아왔는지에 대하여 토로하며 동정을 구한다. 부모 탓, 남편 탓, 자녀 탓 등등으로 자신의 지난 인생을 불쌍한 인생, 피해자 인생, 동정과 자비가 필요한 인생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이런 가족을 간병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특히 내향적이고 순종적이며 가정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하여 관한한 투철한 책임감이 있었던 좋은 부모 혹은 배우자의 성품과 희생을 잘 아는 가족으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족에게 헌신하셨던 분이 중한 병으로 투병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것도 힘들지만, 이전까지는 가족들을 위해 헌신적이었던 가족이 암환자가 되자 어린아이처럼 심한 의존성을 보일 때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이 분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부분은 이들이 가족 의존적인 상황으로부터 독립적이 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독립적으로 투병하도록 도우라고 하면 환자에게 간병하던 부분을 멈추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환자에게 냉정하게 대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사람이 독립적이 된다는 의미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정도로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상황을 조절할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의존적이란 의미는 자신이 아직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환자가 가족 의존적이거나 의사에 대한 의존성이 강한 상태라면 이들이 곁에 있어주고 지지와 격려를 하면서 작은 변화에 대하여 칭찬해 주어야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히 성장할 때까지 인내하며 도와야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가 스스로 성장하고 독립적이 될 것이란 것을 소망하여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가족들은 곧 간병에 지쳐 환자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왜 그렇게 의존성이 많으냐." "스스로 이 과정을 이겨내고 승리하겠다는 용기를 가져라" "자신이 스스로 투병하지 않으면 누구도 당신을 도울 수 없어. 반드시 이기겠다는 용기를 가지고 끝까지 스스로 최선을 다하자"

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자기 책임감을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가족들이 정색을 하며 긴장을 하고 의료진이 엄포를 놓으면 더 깊은 두려움 속으로 들어갈 뿐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같이 있든 떨어져 있든 상관없이 항상 당신과 함께 하겠다는 진심을 보이는 것이다. 언제든 자신이 도움이 필요하다면 달려가겠다는 깊은 애정과 믿음이 필요하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암 투병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하겠다는 동반자가 필요한 것이다. 가족 중에 자신만 암이 발병하여 외톨이가 된 느낌이 없도록 해 줄 필요가 다른 것보다 우선한다.

두려움은 감정의 문제이므로 감정의 방식으로 풀어내야 한다. 감정은 해소하는 가장 탁월하고 항상 성공하는 방법은 진심으로 그 감정에 공감하는 것이다. 환자가 경험하고 있을 두려움과 염려를 억누르지 말고 표현되도록 도와야 한다. 이런 영역은 이전에 비슷한 아픔을 경험한바 있는 건강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 적당하다. 가급적 섬세한 감정적 반응에 동조할 수 있는 건강한 믿음의 사람이 훌륭한 위로자가 될 수 있다. 진정으로 공감하여 잠재되어 있던 두려움이 표현되고 나면 자연스럽게 두려움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이 과정 없이 의도적으로 두려움을 용기로 조정하려하면 치유의 관계는 깨어지고 만다. 반대로 이 과정에 성공하면 치유의 관계회복에 성공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가족이나 의사에게 의존적인 사람도 독립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감정적 욕구를 채워주고 현실적인 도움을 변함없이 주면서 지지해 준다면 이들도 훌륭한 예외적인 사람들이 될 수 있다.

뒤로월간암 2011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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