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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암을 이기고 새삶을 꿈꾸다
고정혁기자2012년 02월 20일 22:14 분입력   총 838572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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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19) | 골육종
19살. 또래는 고등학교 3학년이다. 수능을 마치고 대학교 입학 준비에 한창인데 내내 고1. 암으로 휴학 중.

2009년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왼쪽 다리가 욱신욱신 바늘 같은 것으로 쑤시는 느낌이 들었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 계단을 오르기도 힘들고, 뛰는 일은 더 힘들었다. 더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심해져서 동네 정형외과를 찾았다. 정형외과에서는 인대가 늘어났다는 진단을 했다. 꾸준히 물리치료를 받으면 좋아진다고 하여 며칠 물리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나아지지는 않고 통증이 너무 빨리 더 심해져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큰 병원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여, 동네에 있는 세란병원이란 곳을 방문하여 진찰을 받았다.

세란병원에서는 X레이와 MRI를 비롯한 각종 검사를 진행했다. 검사를 진행하면서 담당 의사선생님이 뭔가 심상치 않으니 하루라도 빨리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권유를 했다. 내심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어머니와 함께 대학병원을 방문했다. 대학병원에서 검사가 끝나고 어머니만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서 나보고는 밖에 나가 있으라 했다. 복도에서 가슴을 졸이며 기다리는데 어머니가 문을 열고 나와서는 하늘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너무 무서웠다. 영문도 모르고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눈물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내 손을 잡고 집으로 왔다.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정확히 일 년 후에 내게도 암이 생겼다.
아버지는 간암이셨다. 어머니의 마음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아직 가득할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다시 암에 걸린 것이다. 내 몸에 생긴 암은 뼈에 생기는 것이며 정확한 진단명은 골육종이었다. 청소년기에 키가 크면서 성장판에 이상이 생겨 암으로 진행하는 병이었다. 그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고 당시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학교를 휴학하지 않고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나의 학교 성적은 전교에서 열 손가락에는 못 들었지만 열 발가락 안에는 들 정도였다. 그 당시 암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로 두 번의 항암치료와 두 번의 수술을 받았다. 항암치료하고 수술하고 항암치료하고 수술을 하는 식이었으며, 덕분에 나는 동사무소에서 장애인 등록도 하게 되었다. 왼쪽 다리를 온전히 구부릴 수 없기 때문이다. 걸을 때도 부자연스럽다. 이렇게 처음의 치료과정은 고등학교 올라가서 3월까지 이어졌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그동안 못한 공부를 만회하고자 싶었다. 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가 심했지만 견딜 만 했다. 그러나 여름방학이 되어서 나는 다시 재발되었다. 이번에는 다리뿐만 아니라 폐에도 같이 재발되었다.
의료진은 폐에 있는 암덩어리는 시급하게 제거해야 된다는 판단을 했는지, 폐 수술을 먼저 했다. 다행히 요즘의 의료기술이 발전하여 폐를 절개하지 않고 흉강경 수술이란 기법을 통해서 큰 무리 없이 폐에 전이 되어 자리 잡은 종양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수술에 수술이 계속해서 진행되면서 나의 몸도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항암을 했다. 다행히 이번에 시도했던 항암은 나에게 맞는지 다리에 자리 잡은 종양들이 작아지는 것이다. 기뻤지만, 기쁨도 잠시 암은 다시 커졌다. 어쩔 수 없이 다리 수술을 하게 되었다. 다리 수술만 3번째였다.

너무 아프고, 너무 슬펐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장난치며 뛰어 다닌다. 서로를 놀리고서 막 뛰어 도망가고 그 뒤를 뛰어 쫓아간다. 까르르르 웃는 소리. 나는 항상 그런 장난에서 멀찍이 빠져 바라보아야만 했다. 겨울에는 스키도 타고 싶고 스노보드도 타고 싶은데 이젠 볼 수밖에 없다. 무릎에 인공관절을 넣었는데 무릎이 꺾이질 않는다.

그때까지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내 병명에 대해서 말이 없었다. 몸은 수술과 약물 때문에 점점 기운을 잃고 있는데 정작 내가 무슨 병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병원에서 준 차트를 보게 되었는데, 영어로 오스티오사코마(osteosarcoma)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옆에 있던 어머니 핸드폰 사전으로 검색해보니 전이성 골육종이라고만 나온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다. "악성종양으로 다리를 잘라야 된다."고 한다. 하늘이 무너지고,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너무나도 놀랐다. 울면서 어머니에게 다리를 잘라야 되냐고 여쭤보니 어머니는 나를 안심시킨다. 다행히 요즘에는 의료기술이 발달해서 다리를 잘라야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예전에는 진단과 동시에 진단 부위를 절제하였다고 한다.

병원을 다니면서 나와 비슷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몇 명 만났다. 그 중에 한 언니는 2004년에 나와 비슷한 병을 진단받았는데 팔을 잘라내는 수술 후에 의수를 해야 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폐와 무릎에 재발하면서 너무 힘들었는데 그 언니를 생각하면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나도 다리 절제 수술을 하면 다시 재발하지는 않을 텐데….'
그러나 아직까지는 불편하지만 다리는 아직 나의 다리이다.

절망의 가운데서 조그만 삶의 한 조각을 부여잡고자 노력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많은 것들을 준비하였고, 또 나를 위해서 많은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수소문하여 좋은 의사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중에 황성주 박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절망 속에 있었지만 희망의 빛과 영적인 메시지를 접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나에게 걸린 병에 대해 원망의 마음이 컸다.
'왜 하필이면 내가 이런 병에 걸렸을까!'
'저기 아이들이 저렇게 많은 데 왜 이런 병이 나에게만 생겼을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나를 괴롭혔다.

황성주 박사님을 만나면서 나의 생각에 많은 변화가 왔다. 또한 나에게 있는 암은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생각하셔서 나를 하나님과 만나게 하기 위해서 보내준 병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이런 마음의 변화는 나에게 감사하다는 생각을 주었고 지금은 아프지만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그래서 지금의 생활이 좋아졌다. 친구들은 학교에 가지만 나는 아파서 학교에 가는 대신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한다. 기타와 손글씨를 배우고 있다.

또, 아프면서 내 또래의 친구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친구들은 공부를 하면서도 왜 그 공부를 하는지, 해서 어떻게 쓰려는지 아는 친구는 없었다. 그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만 공부를 한다. 좋은 대학을 나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오로지 좋은 대학이 우선이다. 나도 아프기 전에는 공부는 그냥 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남들과 같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암은 내게 휴학과 고통과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주었다. 나는 오랫동안 생각하고 고민하고 나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았다.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나를 지켜주는 부모님과 가족의 사랑도 알게 되었고, 경제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또 그렇지 못한 나와 같은 아이들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래보다는 뒤쳐져 있다는 생각에 힘들었지만 이제는 내 자신의 속도로 내 인생을 그려나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되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앞으로 나는 나와 같이 암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면서 살 것이다. 어떤 모습과 어떤 상황에서든.

뒤로월간암 2012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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