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수다
나는 어떻게 안락사법 제정 추진자가 되었나? 선친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목격한 후, 존엄사법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법제정을 위해 일하게 된, 한 대한민국 남성의 이야기
이 글은 weglitter님이 2023년 01월 28일 12:47 분에 작성했습니다. 총 2471명이 이 글을 읽었습니다.
선친께서 흉부의 고통을 호소하며 서울 상계백병원에 입원하셨던, 2007년 가을, 저는 안락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흉막 삼출이 있어 삼출액을 빼기 위한 흉관을 삽입했습니다. 병실 복도에서 부축해 드릴 때, 아버지께서 튜브를 꽂는 것이 너무 아팠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며칠 후 의사가 저를 불러 진단 결과를 말해주었습니다.
폐암 말기입니다. 하시고 싶은 것 하시고, 드시고 싶은 것 드시게 하세요.
그날 밤, 집에 돌아가 아내의 곁에 누운 저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와 작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슬픔이 몰려왔습니다. 이 후, 아버지께서는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시며 항암치료를 받으셨습니다. 누구도 희망을 가지지 않았을, 그 고통스러운 방사선 치료에 아버지께서 필사적으로 매달리셨던 유일한 이유는, 아마도 당시 4살이었던 손녀가 커가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임종 전, 저희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에서,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00이를 더 못 보고 가는 것이 서글프다.
시간이 흐르고, 혹시 기적이 일어나 아버지께서 오래 사실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헛된 희망에 아버지의 임종에 아무런 대비도 없이, 일상 생활에 몰두하던 2008년 10월, 아버지께서 호흡곤란으로 상계백병원 응급실로 실려가셨습니다. 아버지는 호흡기로 힘든 호흡을 하고 계셨습니다. 모두가 직장생활을 했기에 간병인을 고용했고, 그렇게 아버지는 마지막 시간들을 차가운 병실에서, 낯선 타인들 가운데 외롭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흘러 보내셨습니다.
대한민국의 장교로서 오직 조국을 위하여 젊음을 바쳐 일하신 아버지
병실에 방문할 때마다 아버지는 점점 더 위독해졌고, 호흡기는 더 큰 것으로 교체되어 있었습니다. 임종 전 마지막 한 주를 아버지께서는 침대에 앉은 채로 보내셨습니다. 눕는 순간 영원히 깨지 못할 잠에 빠진다는 것을 아셨기에,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티고 계셨습니다. 항암치료로 면역이 약해져, 몸에는 대상포진과 욕창이 퍼졌습니다. 10월 21일, 둘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사진으로 아기의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5일 후인 10월 26일,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것 같다는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미 아버지는 사경을 헤매고 계셨고, 말씀을 하실 수도 없는 위중한 상태였습니다. 누워서 숨을 헐떡이며 고통스러운 얼굴과 몸짓으로 질식의 고통을 호소하실 뿐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가 있는 선산에 산소를 마련한다는 대화를 나눈 뒤 침대를 뒤로 눕히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잠에 들었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산소의 부족으로 의식을 잃었다 다시 깨어나기를 수차례 반복하시던 아버지는 결국 점점 더 깊은 혼수상태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심장 박동이 멈추었습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습니다. 이렇게 돌아가셔서는 안되었습니다. 마지막 인사도 드리지 못했고, 마지막 말씀도 듣지 못했습니다. 너무도 빨리 세상을 떠나가셨다는 것도 슬픈 일이었지만, 더 가슴 아팠던 것은, 아버지께서 너무도 끔찍한 고통 속에 임종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현대건설 안전관으로 3년 동안이나 젊은 아내와 어린 자녀들의 곁을 떠나 중동에서 피와 땀을 흘려 일하신 아버지
저는 이런 죽음을 전혀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것이 죽음인가 싶었습니다. 평생을 고생하셨는데, 죽을 때마저, 아니 죽을 때 그 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지옥같은 고통을 당한다니,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처참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수년 동안, 밤에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임종이 생각났습니다. 마치 제가 질식하는 것 같은 약한 호흡곤란도 자주 경험했습니다. 나도, 나의 가족도 그러한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2010년 여름이 되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던 저는, 우연히 161회 SBS 스페셜 [마지막 선택, 품위 있게 죽고 싶다]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보게되었습니다.
SBS 스페셜 "마지막 선택, 품위 있게 죽고 싶다" (안락사 입문을 위한 영상입니다.)
2009년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안락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벌써 10년이 다 되어갑니다. 죽음이란 것이 체감...
blog.naver.com
충격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치료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환자가 원할 경우 안락사 약물을 처방하여 고통없이, 편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가운데 말입니다. 여러가지 생각과 감정들이 폭풍처럼 회오리쳤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죽음의 방법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저의 선친께서는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셔야 했다는 사실에 후회와 분노와 아쉬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결심했습니다.
나를 비롯하여, 나의 가족, 그리고 세상의 어느 누구도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지 않게 하리라!
이 모진 세상에 영문도 모른채 태어나, 한 평생 조국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고 가신 아버지
이 때부터 대한민국 안락사법 제정을 위한 저의 기나긴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초기에는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죽음도 서서히 잊혀져갔고, 생업은 바쁘며, 아이들 키우는데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14년 겨울이 되었고, 이렇게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을 만들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보았고, 근거가 되는 헌법의 조항들을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는 어떻게 법을 만들었고, 시행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법조문들을 분석했습니다.
입법청원을 위해 법안을 미리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2015년 1월 16일, 몇 가지 기본 조항들로 구성된 안락사 법안 초안을 작성하였습니다. 인터넷으로 안락사법 제정을 위한 청원을 몇 차례 올리고, 광화문 광장에 나가서는 피켓을 들고 안락사법 제정의 필요성을 담은 메시지를 외치며 서명을 촉구해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국회의원들에게 수차례 안락사 법안의 발의를 요청하는 이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입법 청원을 위해 국회의원의 동의가 필요하기에 저의 주소지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던 박홍근 의원 사무실을 찾아가 법제정의 필요성에 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벽에 대고 외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법안 청원을 위해서는 국회의원의 후원이 있어야 하나, 당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회의원 중 안락사에 찬성하는 의원은 불과 다섯 명 뿐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안락사 법안이 대한민국 국회에서 한 번도 발의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2016년부터는 트위터와 블로그에 다른 나라의 안락사법 제정 소식과, 실제로 어떻게 안락사가 이루어지는지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2017년 12월 13일에는 기존에 작성한 안락사 법안 초안을 보완하여, 국회 입법 청원 시 첨부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입법청원에 앞서 국회에 입법의 근거를 보다 굳게 다져주기 위한 목적으로, 2017년 12월 18일, 헌법재판소에 “국회가 안락사 시술에 관한 절차와 조건을 법률로 규정하지 아니한 부작위는 청구인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위헌임을 확인한다.”라는 결정을 구하는,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습니다.
제가 서명을 모아서 국회의원들과 함께 안락사법 입법 청원을 하는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에, 입법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기 위한 전략으로 내린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2017년 12월 26일, 심판청구는 각하되었습니다. 이후 청구서를 수정하여 두 차례 다시 제기 하였으나 역시 각하되었습니다. 매우 실망했습니다. 어쨌든 당시 헌법재판소가 심판의 의지가 없음을 확인하였기에, 새로운 헌법재판관들로 교체될 때 변호사와 함께 다시 제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국회 입법청원을 준비하는 가운데, 우선 블로그 하나에 집중하여 국민들에게 안락사를 알리기로 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다른 이들의 노력을 통해 안락사를 알게되었던 것처럼 우리 국민들이 안락사를 제대로 알러주고 싶었습니다. 인터넷과 방송에 다른 나라들의 안락사가 많이 소개되고 있었지만, 논란을 일으키는 위험한 주제 정도로 다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보다 앞서 가는 다른 나라들의 입법, 시행 사례를 소개하면서 우리가 미래에 경험하게 될 안락사의 모습들을 우리 국민들의 마음 속에 생생히 그려주고자 했습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글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알 수 없는 안개 속과 같은 일이었기에 열정과 확신을 유지하는 것은 각고의 노력없이는 되지 않았습니다. 노력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확신과 믿음 때문입니다. 반드시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저는 하루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안락사법을 제정하는 뜨거운 감동의 그 현장 속에 제가 있는 것처럼 기뻐하며, 대한민국에서 곧 이러한 날이 올 것을 기대하고, 또 확신하며, 여기저기에서 울려퍼지는 부정적인 목소리와 싸웠습니다.
될 때까지 한다!
그리고 2022년, 안규백 국회의원을 통해 대한민국 최초의 안락사 법안인, 의사조력존엄사법안이 발의되었습니다. 그 순간 2008년부터 2022년까지의 일들이 마음속에 주마등처럼 흘러갔습니다. 선친의 고통스러운 몸부림, 광화문에서 외치던 기억, 인터넷 청원을 위해 올린 호소의 글에 달린, 법을 만드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인줄 아냐는 비아냥거림의 댓글 등... 저의 노력이 보상을 받은 듯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2022년 8월 24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조력존엄사 토론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장면들, 부러워하며 지켜보던 그 장면들이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서있는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마치 꿈을 꾸는 듯 했습니다. 환희에 젖고, 감동에 젖으며 가슴 뭉클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토론회에 참석하면서 제 마음 속에는 된다, 반드시 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마음의 짐을 벗고 홀가분한 마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 일입니다. 될 때까지 해야 하며, 최선을 다하여 입법의 시간을 앞당겨야 합니다.
1906년, 미국 오하이오주 의회에 세계 최초의 안락사 법안이 발의 되게한 미국 여성이 있었습니다. 애너 소피나 홀(Anna Sophina Hall), 그녀는 어머니를 간암으로 고통스럽게 떠나보낸 후, 그 누구도 어머니와 같은 고통을 겪게하지 않으리라는 일념으로 안락사법 제정운동에 투신했습니다. 수년 동안 각계의 유명인사들에게 안락사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노력으로 법안이 발의되기에 이릅니다. 법안은 부결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100년이 지난 후 미국에 안락사 법안이 통과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그 때 더 시도했더라면, 더욱 더 밀어붙였다면, 끝까지 포기하지않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가며 계속하여 앞으로 나아갔더라면 100년을 앞당길 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기필코 우리의 때에 이루어 냅시다!
공감이 가는 성서의 한 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야훼께서 시온의 포로들을 풀어주시던 날, 꿈이든가 생시든가!
그 날 우리의 입에서는 함박 같은 웃음 터지고 흥겨운 노랫가락 입술에 흘렀도다. 그 날 이교 백성 가운데서 들려오는 말소리, "놀라워라, 야훼께서 저 사람들에게 하신 일들!"
야훼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 하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야훼여, 저 네겝 강바닥에 물길 돌아오듯이 우리의 포로들을 다시 데려오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뿌리는 자, 기뻐하며 거두어들이리라.
씨를 담아 들고 울며 나가는 자, 곡식단을 안고서 노랫소리 흥겹게 들어오리라.
시편 126편
https://blog.naver.com/weglitter/222964732059
폐암 말기입니다. 하시고 싶은 것 하시고, 드시고 싶은 것 드시게 하세요.
그날 밤, 집에 돌아가 아내의 곁에 누운 저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와 작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슬픔이 몰려왔습니다. 이 후, 아버지께서는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시며 항암치료를 받으셨습니다. 누구도 희망을 가지지 않았을, 그 고통스러운 방사선 치료에 아버지께서 필사적으로 매달리셨던 유일한 이유는, 아마도 당시 4살이었던 손녀가 커가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임종 전, 저희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에서,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00이를 더 못 보고 가는 것이 서글프다.
시간이 흐르고, 혹시 기적이 일어나 아버지께서 오래 사실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헛된 희망에 아버지의 임종에 아무런 대비도 없이, 일상 생활에 몰두하던 2008년 10월, 아버지께서 호흡곤란으로 상계백병원 응급실로 실려가셨습니다. 아버지는 호흡기로 힘든 호흡을 하고 계셨습니다. 모두가 직장생활을 했기에 간병인을 고용했고, 그렇게 아버지는 마지막 시간들을 차가운 병실에서, 낯선 타인들 가운데 외롭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흘러 보내셨습니다.
대한민국의 장교로서 오직 조국을 위하여 젊음을 바쳐 일하신 아버지
병실에 방문할 때마다 아버지는 점점 더 위독해졌고, 호흡기는 더 큰 것으로 교체되어 있었습니다. 임종 전 마지막 한 주를 아버지께서는 침대에 앉은 채로 보내셨습니다. 눕는 순간 영원히 깨지 못할 잠에 빠진다는 것을 아셨기에,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티고 계셨습니다. 항암치료로 면역이 약해져, 몸에는 대상포진과 욕창이 퍼졌습니다. 10월 21일, 둘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사진으로 아기의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5일 후인 10월 26일,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것 같다는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미 아버지는 사경을 헤매고 계셨고, 말씀을 하실 수도 없는 위중한 상태였습니다. 누워서 숨을 헐떡이며 고통스러운 얼굴과 몸짓으로 질식의 고통을 호소하실 뿐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가 있는 선산에 산소를 마련한다는 대화를 나눈 뒤 침대를 뒤로 눕히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잠에 들었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산소의 부족으로 의식을 잃었다 다시 깨어나기를 수차례 반복하시던 아버지는 결국 점점 더 깊은 혼수상태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심장 박동이 멈추었습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습니다. 이렇게 돌아가셔서는 안되었습니다. 마지막 인사도 드리지 못했고, 마지막 말씀도 듣지 못했습니다. 너무도 빨리 세상을 떠나가셨다는 것도 슬픈 일이었지만, 더 가슴 아팠던 것은, 아버지께서 너무도 끔찍한 고통 속에 임종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현대건설 안전관으로 3년 동안이나 젊은 아내와 어린 자녀들의 곁을 떠나 중동에서 피와 땀을 흘려 일하신 아버지
저는 이런 죽음을 전혀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것이 죽음인가 싶었습니다. 평생을 고생하셨는데, 죽을 때마저, 아니 죽을 때 그 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지옥같은 고통을 당한다니,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처참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수년 동안, 밤에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임종이 생각났습니다. 마치 제가 질식하는 것 같은 약한 호흡곤란도 자주 경험했습니다. 나도, 나의 가족도 그러한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2010년 여름이 되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던 저는, 우연히 161회 SBS 스페셜 [마지막 선택, 품위 있게 죽고 싶다]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보게되었습니다.
SBS 스페셜 "마지막 선택, 품위 있게 죽고 싶다" (안락사 입문을 위한 영상입니다.)
2009년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안락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벌써 10년이 다 되어갑니다. 죽음이란 것이 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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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치료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환자가 원할 경우 안락사 약물을 처방하여 고통없이, 편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가운데 말입니다. 여러가지 생각과 감정들이 폭풍처럼 회오리쳤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죽음의 방법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저의 선친께서는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셔야 했다는 사실에 후회와 분노와 아쉬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결심했습니다.
나를 비롯하여, 나의 가족, 그리고 세상의 어느 누구도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지 않게 하리라!
이 모진 세상에 영문도 모른채 태어나, 한 평생 조국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고 가신 아버지
이 때부터 대한민국 안락사법 제정을 위한 저의 기나긴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초기에는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죽음도 서서히 잊혀져갔고, 생업은 바쁘며, 아이들 키우는데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14년 겨울이 되었고, 이렇게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을 만들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보았고, 근거가 되는 헌법의 조항들을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는 어떻게 법을 만들었고, 시행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법조문들을 분석했습니다.
입법청원을 위해 법안을 미리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2015년 1월 16일, 몇 가지 기본 조항들로 구성된 안락사 법안 초안을 작성하였습니다. 인터넷으로 안락사법 제정을 위한 청원을 몇 차례 올리고, 광화문 광장에 나가서는 피켓을 들고 안락사법 제정의 필요성을 담은 메시지를 외치며 서명을 촉구해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국회의원들에게 수차례 안락사 법안의 발의를 요청하는 이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입법 청원을 위해 국회의원의 동의가 필요하기에 저의 주소지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던 박홍근 의원 사무실을 찾아가 법제정의 필요성에 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벽에 대고 외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법안 청원을 위해서는 국회의원의 후원이 있어야 하나, 당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회의원 중 안락사에 찬성하는 의원은 불과 다섯 명 뿐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안락사 법안이 대한민국 국회에서 한 번도 발의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2016년부터는 트위터와 블로그에 다른 나라의 안락사법 제정 소식과, 실제로 어떻게 안락사가 이루어지는지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2017년 12월 13일에는 기존에 작성한 안락사 법안 초안을 보완하여, 국회 입법 청원 시 첨부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입법청원에 앞서 국회에 입법의 근거를 보다 굳게 다져주기 위한 목적으로, 2017년 12월 18일, 헌법재판소에 “국회가 안락사 시술에 관한 절차와 조건을 법률로 규정하지 아니한 부작위는 청구인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위헌임을 확인한다.”라는 결정을 구하는,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습니다.
제가 서명을 모아서 국회의원들과 함께 안락사법 입법 청원을 하는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에, 입법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기 위한 전략으로 내린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2017년 12월 26일, 심판청구는 각하되었습니다. 이후 청구서를 수정하여 두 차례 다시 제기 하였으나 역시 각하되었습니다. 매우 실망했습니다. 어쨌든 당시 헌법재판소가 심판의 의지가 없음을 확인하였기에, 새로운 헌법재판관들로 교체될 때 변호사와 함께 다시 제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국회 입법청원을 준비하는 가운데, 우선 블로그 하나에 집중하여 국민들에게 안락사를 알리기로 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다른 이들의 노력을 통해 안락사를 알게되었던 것처럼 우리 국민들이 안락사를 제대로 알러주고 싶었습니다. 인터넷과 방송에 다른 나라들의 안락사가 많이 소개되고 있었지만, 논란을 일으키는 위험한 주제 정도로 다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보다 앞서 가는 다른 나라들의 입법, 시행 사례를 소개하면서 우리가 미래에 경험하게 될 안락사의 모습들을 우리 국민들의 마음 속에 생생히 그려주고자 했습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글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알 수 없는 안개 속과 같은 일이었기에 열정과 확신을 유지하는 것은 각고의 노력없이는 되지 않았습니다. 노력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확신과 믿음 때문입니다. 반드시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저는 하루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안락사법을 제정하는 뜨거운 감동의 그 현장 속에 제가 있는 것처럼 기뻐하며, 대한민국에서 곧 이러한 날이 올 것을 기대하고, 또 확신하며, 여기저기에서 울려퍼지는 부정적인 목소리와 싸웠습니다.
될 때까지 한다!
그리고 2022년, 안규백 국회의원을 통해 대한민국 최초의 안락사 법안인, 의사조력존엄사법안이 발의되었습니다. 그 순간 2008년부터 2022년까지의 일들이 마음속에 주마등처럼 흘러갔습니다. 선친의 고통스러운 몸부림, 광화문에서 외치던 기억, 인터넷 청원을 위해 올린 호소의 글에 달린, 법을 만드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인줄 아냐는 비아냥거림의 댓글 등... 저의 노력이 보상을 받은 듯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2022년 8월 24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조력존엄사 토론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장면들, 부러워하며 지켜보던 그 장면들이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서있는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마치 꿈을 꾸는 듯 했습니다. 환희에 젖고, 감동에 젖으며 가슴 뭉클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토론회에 참석하면서 제 마음 속에는 된다, 반드시 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마음의 짐을 벗고 홀가분한 마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 일입니다. 될 때까지 해야 하며, 최선을 다하여 입법의 시간을 앞당겨야 합니다.
1906년, 미국 오하이오주 의회에 세계 최초의 안락사 법안이 발의 되게한 미국 여성이 있었습니다. 애너 소피나 홀(Anna Sophina Hall), 그녀는 어머니를 간암으로 고통스럽게 떠나보낸 후, 그 누구도 어머니와 같은 고통을 겪게하지 않으리라는 일념으로 안락사법 제정운동에 투신했습니다. 수년 동안 각계의 유명인사들에게 안락사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노력으로 법안이 발의되기에 이릅니다. 법안은 부결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100년이 지난 후 미국에 안락사 법안이 통과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그 때 더 시도했더라면, 더욱 더 밀어붙였다면, 끝까지 포기하지않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가며 계속하여 앞으로 나아갔더라면 100년을 앞당길 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기필코 우리의 때에 이루어 냅시다!
공감이 가는 성서의 한 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야훼께서 시온의 포로들을 풀어주시던 날, 꿈이든가 생시든가!
그 날 우리의 입에서는 함박 같은 웃음 터지고 흥겨운 노랫가락 입술에 흘렀도다. 그 날 이교 백성 가운데서 들려오는 말소리, "놀라워라, 야훼께서 저 사람들에게 하신 일들!"
야훼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 하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야훼여, 저 네겝 강바닥에 물길 돌아오듯이 우리의 포로들을 다시 데려오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뿌리는 자, 기뻐하며 거두어들이리라.
씨를 담아 들고 울며 나가는 자, 곡식단을 안고서 노랫소리 흥겹게 들어오리라.
시편 12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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