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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를 찾는 방법
고동탄(bourree@kakao.com)기자2018년 05월 03일 12:06 분입력   총 4800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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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은 중도보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좌파, 우파로 나누어져 있는 정치지형에 새롭게 중도보수라는 말이 등장함으로써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그 범주로 들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세상의 많은 것들을 이분법으로 나누어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둘 중의 하나는 나의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정치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될 일들은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발전하면서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그 분들을 위하여 중도보수라는 개념이 대중화되었습니다. 덕분에 이제 좌우가 아닌 가운데에 설 수 있는 자리가 생겨났습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간 위치는 우리를 편하게 만들어 줍니다. 제가 군대에 갈 때 먼저 다녀온 선배나 어르신들은 항상 줄을 설 때 중간에 서라는 충고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습니다. 중간 위치가 편하고 안전하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생활의 지혜를 나누어 준 것입니다.

그러나 살면서 위급한 상황이 되면 우리는 오직 두 가지 중에 하나만 선택하도록 강요받습니다. 전쟁 중에는 우리 편인가 적군의 편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암과 같은 큰 병에 걸렸을 때에도 병원의 치료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소위 자연요법이나 대체요법이라고 하는 치료방법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하기도 합니다. 위급한 상황일수록 하나의 선택이 목숨줄을 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예술가 셰익스피어는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나 봅니다. 살거나 죽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우리 운명에 대한 슬픔을 예술 속에서 이야기합니다.

녹록치 않은 세상살이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좋고 나쁨을 따지게 됩니다. 이때 판단은 내가 어느 편에 서 있는가에 따라서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가치관을 만들고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갖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같은 편이거나 적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을 설파하면서 같은 편이 되기를 강요하기도 합니다. 특히 큰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획일적인 이분법을 강요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고통 받습니다. 이 편이냐 저 편이냐는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가치관이 뚜렷하다면 누가 무어라 하든지 스스로의 생각과 삶의 패턴을 지키면서 살 수 있습니다. 지금은 예전과 달리 포악한 군주가 다스리는 시대는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지키면서 살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의 정신적인 면이 성장하면서 그런 사람들의 활발한 활동과 역할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확고한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활동뿐 아니라 그들의 가치관입니다.

선과 악 중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까라는 의문이 조금은 우스울지 모릅니다. 대부분 선을 좋아하며 악을 배척합니다. 그렇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선도 악도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꼭 선을 선택할 이유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악을 선택할 이유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착하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하다면 그 사회는 하나의 극단으로 결국 파국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균형 없이 질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내 속에는 착한 천사도 있지만 나쁜 악마도 같이 살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중재자 역할도 하고 간혹 뒤돌아보면서 천사가 했는지 악마가 했는지 스스로 판단할 뿐입니다. 양 극단에 있는 것들이 서로를 배척하는 순간 그것을 품고 있는 존재는 폭발하여 소멸하지만 서로 공존한다면 건강한 존재가 됩니다.

반목, 대립, 투쟁과 같은 개념은 공존을 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 극단에서 서로를 모색하고 길을 찾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정확하게 중간에 자리를 잡습니다. 처음부터 최적의 길을 찾아서 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좋은 길을 찾아 헤매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끊임없이 해야 될 일입니다.

중도라는 말은 불교적인 용어입니다. 부처님은 귀한 집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금수저입니다. 어떤 계기로 출가하여 고행을 통한 수련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도 해보고 가장 고통스러운 수행도 해보니 이런 것들이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신의 조화를 이루는 중도에 설 때야말로 삶의 문제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으며 각자의 어떤 노력을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오는 삶의 지혜입니다.

어는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생활이야말로 건강에 이르고 건강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간혹 암과 투병하면서 극단적인 치료를 실천하는 사람을 봅니다. 병원의 치료만 전적으로 믿으면서 라면이나 햄버거와 같은 정크 푸드와 탄산음료를 입에 당기는 대로 먹기도 하고, 맵고 자극적인 인스턴트나 빨갛고 조미료 범벅인 외식을 여전히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대체요법을 한다면서 몸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명현반응이라며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최근에 안아키 사건은 극단이 주는 피해를 여과 없이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암과 투병하는 일도 안타까운데 이런 식의 접근은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합니다.

중도는 어느 한쪽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 때문에 오류를 범할 수 있지만 과도한 믿음은 결국 우리를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정도껏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중간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는 표지석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뒤로월간암 2018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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