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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미역국 먹는 날
구효정(cancerline@daum.net)기자2023년 05월 31일 15:42 분입력   총 1476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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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 철 우(수필가)

오늘도 미역국 한 그릇을 맛있게 비워냈다. 사발에 안다미로 퍼준 미역국을 받아 들자 증진 효과라도 있는 듯 식욕이 일었다. 오랜 시간 끓여 부드러워진 미역과 적당한 양의 소고기 그리고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고, 바다의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국물은 사발을 들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신 후에야 수저를 놓게 했다. 그 순간 행복감과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온다.

내게는 미역국 먹는 날이 정해져 있다. 정확하게 두 달에 한 번. 그러니까 공복(空腹) 상태로 병원을 방문하여 혈액 검사를 받는 날이다. 혈액 검사를 마치고 진료 시간 전까지가 바로 아침 식사 시간이며, 아침 식사 시간에는 어김없이 구내식당에서 미역국을 먹는다. 이런 일정이 정해진 십수 년 전 당시에는 공복과 채혈 후에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고, 혈액에 좋다는 이유로 미역국을 선택했지만, 요즘은 맛 자체만으로도 망설임 없이 선택하는 것이 바로 미역국이다.

그러니 병원 가는 날은 곧 아침 식사로 미역국을 먹는 날이므로 나는 ‘내일 아침에 미역국 먹으러 갑니다.’라는 말로 검사 결과를 걱정하는 아내의 긴장을 풀어주곤 한다.

최근에 이곳 미역국 맛 칭찬을 하고 다니자 한 친구는 ‘열두 시간 공복 상태에서의 맛 평가를 신뢰할 수 있겠느냐’며 농을 던지기도 한다. 물론 공복이야말로 최고의 요리사이며 가장 맛있는 반찬인 것만은 틀림없다. 더구나 음식 맛이란 과거의 경험이나 추억 등을 포함해서 무의식의 영역에서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긴 하다. 그렇다고 오직 공복이란 조건에 기댈 수는 없다. 이곳 미역국 맛의 이유는 무엇일까.

미역국이라야 집에서 흔히 먹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미역과 소고기가 주요 재료인 흔한 미역국이다. 아무리 맛을 봐도 특별한 재료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맛의 비법이 화학조미료인 것 같지도 않다. 오랫동안 식이요법을 한 까닭에 화학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종일 속이 보깨 고생하는데 이곳 미역국에는 그런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손님이 오가는 곳이므로 일정 수준 이상의 재료의 신선도를 고려한다면 맛의 요인은 한 가지밖에 없을 것 같다. 국을 퍼줄 때 보이는 주방 안쪽의 커다란 솥. 그게 맛의 비밀은 아닐까. 미역국은 항상 큰솥에서 끓고 있는데, 적은 양으로 짧은 시간 끓여 내는 가정식 미역국보다 많은 양을 오래 끓이는 이곳 미역국이 더 깊은 맛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같은 재료를 사용해도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맛의 깊이. 그것은 많은 재료를 오래 끓여 내는 것이 출발점이 아닐까 싶다. 많은 양을 끓이는 것은 식사하는 사람도 많다는 의미인데, 그런 면에서 ‘같이 먹는 밥이 더 맛있다.’라던 어른들의 말씀은 단순히 심리적 요인을 떠나 맛의 깊이까지 염두에 둔 말씀이 아니었을까.

제주도 전통 음식 가운데 ‘몸국’이라는 것이 있다. 돼지고기와 뼈, 내장과 순대 등을 삶다가 해조류인 모자반을 잘게 썰어 함께 끓인 음식을 말한다. 몸국은 주로 혼례나 상례 등의 행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음식인데, 육지보다 행사 기간이 길었던 제주의 특성 때문에 며칠 동안 걸쭉하게 끓여 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당시 제주 사람들이 접하기 어려웠던 단백질과 동물성 기름을 섭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며칠 동안 이어지는 행사 중에 방문객을 접대하는 몸국 한 그릇은 영양을 보충하면서도 시원하게 속을 풀어내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몸국은 공동체에서의 나눔문화 확산에 이바지했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음식을 통해 건강을 지키고 안부를 확인하며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결속을 다지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각종 행사가 간소화되어 몸국을 맛볼 일이 많이 사라졌지만, 모자반이 칼슘이 풍부해 골다공증 예방과 당뇨병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제주도에는 몸국 전문점이 많이 생겨났다. 다만, 돼지 내장까지 넣은 걸쭉한 몸국이 아닌 돼지고기 육수만을 이용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대중화를 이뤄내고 있다.

제주도에 갈 때마다 들르는 몸국 식당이 있다. 수년 전 우연히 취재하며 알게 된 이 식당은 지금은 꽤 많이 알려진 맛집이 됐다. 제주도 출신 지인에게 이 집 몸국을 권했더니 예전의 그 맛이 아니라며 씁쓸해한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기뻐하거나 함께 슬퍼하며 같은 음식을 나눠 먹었던 시절의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떤 사회,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을까? 오랫동안 조리한, 몸에 좋은 음식을 같이 먹을 수 있는 모임은 있는 걸까? 홀로 남겨진 개인만이 등을 돌리고 앉아 식사하는 요즘이 아닐까.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란 식구(食口)의 사전적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긴다. 출근과 등교 시간에 쫓겨 아침 식사는 굶고, 점심은 일터나 학교에서 그리고 다시 저녁은 야근이나 학원을 전전하며 때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더구나 함께하는 식사도 아닌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 ‘혼밥, 혼술’과 같은 신조어까지 등장하고 있다. 사회는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하는데 그곳에서 적응해야 하는 개인은 한없이 위축되어 고독한가 보다.

그들에게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대접하고 싶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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