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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에서 엽서를 쓰다, 소매물도
고동탄(bourree@kakao.com)기자2023년 08월 30일 17:42 분입력   총 1449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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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철우(수필가)

통영항 여객선터미널에 앉아 시계를 본다. 출항하려면 아직 두 시간이 남아 있다. 배표도 끊었으니 이제 느긋하게 식사나 하면 된다. 소매물도가 워낙 외진 섬이라 식당도 없고 민박집에서 식사를 제공하지도 않으니 약간의 먹을거리만 준비하면 그만이다. 민박집은 따로 정하지 않았다. 편한 곳이면 편한 대로, 불편한 곳이면 또 그런대로 감수하기로 했다. 어차피 편한 곳을 찾아온 길은 아니었다.

터미널 앞은 김밥집과 낚시에 필요한 용품을 파는 가게가 대부분이다. 통영까지 와서 김밥을 먹지 않고 갈 수 없어 ‘전통 통영 김밥’이란 글씨가 선명한 집을 선택했다.

“이게 충무김밥이죠?”
“통영김밥입니다”

주인아주머니는 굳이 통영김밥이라고 정정해 준다. 90년대 시, 군 통합으로 충무시와 통영군이 합쳐져 지금의 통영시로 바뀐 것과 그러니 통영김밥으로 불러야 한다는 말이 외지인에게는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통영이 아닌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아직도 충무김밥으로 불리는데 그러면 혹시 충무김밥과 통영김밥이 다른 음식으로 오해받지는 않을까.

오후 두 시가 임박한 터미널은 북적이고 있었다. 통영에서 연안의 섬으로 출항하는 배들이 일제히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매물도(小每勿島). 경남 통영시 한산면 매죽리에 속하는 소매물도는 통영항에서 26 Km 떨어진 0.51㎢의 작은 섬이다. 대매물도, 소매물도, 등대섬을 통칭해 매물도라 하고 소매물도는 흔히 등대섬을 포함하여 부른다. 비진도와 매물도 등을 경유하여 두 시간을 달려야 한다. 보아하니 승객들은 세 종류의 사람들뿐이다. 오늘 밤 소매물도에 머물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배낭을 멘 관광객들. 낚시도구를 잔뜩 준비한 낚시꾼들. 그리고 허름한 옷을 입은 섬 주민들. 검게 그은 얼굴 속에 외지인에 대한 막연한 경계심과 동경이 스쳐 갔다.

좌석은 거의 반이나 비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시집 몇 권과 필기도구 그리고 익숙한 지도 한 장을 다시 확인했다. 수 없이 꾸려봤던 배낭이지만 여행 중엔 세면도구나 옷가지들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다. 수첩을 꺼내 돌아올 배편과 일정을 점검하고 간단한 메모를 해 두었다. 여행 중엔 메모만큼 편리한 것이 없다는 것을 나는 체험으로 알고 있다.

배는 통영항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갈매기들도 점차 사라지고 선실 창문에 말라붙어 있는 소금기 가득한 바닷물과 적당한 높이로 출렁대는 배의 요동까지 선실의 모든 것이 익숙해지자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꿈속에서 나는 갈매기였다.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작은 바위섬에 앉아 쉬기도 하고
바다에 발을 담그고 한가하게 놀기도 하고
갯지렁이나 물고기들로 배를 채우기도 했다.

‘너는 누구니?’

흰 블라우스에 청치마를 입은 여자아이가 물었다.

‘자유’
‘자유? 그게 뭔데?’

나는 말없이 잿빛 깃털을 한번 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디로 가는 건데?’
‘바람 속으로’
‘거긴 어디야?’

나는 고개를 돌려 저 수평선 너머를 가리켰다.
여자아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엄마 손을 잡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깬 건 비진도 도착을 알리는 낡은 스피커의 쇳소리 때문이었다. 모래시계처럼 생긴 섬의 가운데 잘록한 부분이 해수욕장으로 통영시 홍보 이미지를 보고 탄성을 질렀던 바로 그 섬이다.

소매물도는 여객선의 마지막 목적지였다. 예닐곱 명의 친목 모임 한 팀과 네 명의 가족 한 팀,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두 명. 부부 세 팀, 그리고 나처럼 혼자 여행하는 남자 한 명 등이 오늘 이 섬에서 함께 머물 인원이었다.

‘민박 구해요?’

오랜 바닷바람에 노출되어 검게 변한 얼굴 그러나 선한 눈매를 가진 남자가 물었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에서 물씬 바다 내가 났다.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선착장에서 바로 묵을 곳을 정하기는 싫었다. 실망한 표정이 역력한 남자는 이내 마을로 올라갔다. 오늘은 사람을 구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 뒷모습의 쓸쓸한 어깨가 마음에 걸려 다시 부르려다가 말았다.

선착장에서 바라보니 가파른 길을 따라 스무 집 남짓한 집들이 납작 엎드려 마을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느끼는 태풍의 강도는 도심에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를 터. 그래도 대부분의 오래된 집들과는 달리 최근에 지어진 민박집들은 제법 고개를 들고 서 있다. 돌계단의 마을 길 주변에 자생하고 있는 동백나무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시기적으로 3월부터 다시 피울 동백꽃의 그 ‘처연한 붉음’을 보지 못해 아쉽기는 하지만 잎의 ‘초록’만으로도 기운이 나는 것 같다.

민박을 정하고 짐을 풀 여유도 없이 등대섬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마을 뒤편의 비탈길을 십여 분가량 올라 소매물도의 최고봉인 망태봉(157.2m)에서 수많은 통영의 섬들과 해금강을 조망해 보고, 통영 8경의 하나인 ‘소매물도에서 바라본 등대섬’의 장관을 직접 보고, 썰물 때마다 길이 열리는 등대섬으로 걸어가고 싶었으나 태풍의 피해로 등대섬으로 가는 길이 유실되어 소매물도의 장관을 우선 바다에서 보기로 하였다.

바다에서 본 소매물도는 등대섬과 함께 해식애(海蝕崖)의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늘로 솟아 오를듯한 용바위, 근엄한 부처 바위, 바다를 향해 앉은 거북바위, 절벽에 휘둘러 쳐진 병풍바위, 펼쳐진 손바닥 바위 등이 기기묘묘한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 옛날 중국 진시황 시절. 황제에게 바칠 불로초(不老草)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오백을 이끌고 제주도에 당도한 ‘서불’ 이란 자가 정방폭포 바위에 서불과차(徐市過此, 서불이 지나가다) 라는 글씨를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정작 한라산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불로초를 구하려던 충신이었는지 아니면 폭군의 압정을 피하기 위함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서불과차란 글씨가 소매물도에도 있으니 그곳이 바로 ‘글씽이굴’이다. 소형 보트로 들어간 굴은 어둡고 파도가 절벽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을씨년스럽게 울리고 있을 뿐이다. 언뜻언뜻 보이는 하얀 등대와 낮게 날며 우는 갈매기 그리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배 위에서 듣는다. 다시 듣지 못할 기암괴석의 교향시.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아름다움에 대미를 장식하는 섬’ 이란 문구가 그리 과장은 아닌 것이다.

등대섬에 닿았다. 이미 상업광고와 영화 촬영으로 유명해진 탓인지 눈에 익은 섬이다. 섬 전체에 덮여 있는 잔디가 파랗게 바뀌면 하얀 등대와 어우러져 시원한 한 폭의 그림이 될 것 같다. 등대를 향하는 나무 계단을 딛고 오르는 길에 이생진 시인의 시 <소매물도 등대>를 중얼거렸다. 나 역시 ‘그 까닭’에 등대에 가는 중이니 말이다.

소매물도 등대 계단에 앉아 엽서를 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헤어진 사람에게로.
이곳의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를 모두 담을 수 있을 것 같다. 시야 끝까지 펼쳐진 저 짙푸른 바다를 모두 담을 수 있을 것 같다.

민박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생각해 보니 통영항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한 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대충 씻고 식사 준비를 했다. 공복이 반찬이라더니 포장만 뜯고 먹을 수 있는 쌀밥과 봉지 김치가 전부인 저녁상은 근래에 드물게 맛있었다.

“이 먼 대를 뭐 하러 혼자 오노?”

민박집 주인아주머니가 안쓰러운지 곱게 눈을 흘기며 야단이다. 그러고는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래깃국 한 사발 주까?’ 한다. 가시가 잘 발라진 조그만 꽁치가 들어간 시래깃국이었다. 도심에서는 결코 맛보기 쉽지 않은. 이제 밥과 국, 반찬이 모두 갖춰졌다. 그날 저녁은 왕의 성찬도 부럽지 않았다.

소매물도에 어둠이 찾아왔다. 밤늦은 시간. 소란스럽던 관광객들의 목소리도 잦아들자 민박집 평상에 나가 앉았다. 낮에 보이던 삼여도와 욕지도는 간데없고 칠흑 같은 어둠만 남아 있다. 오늘같이 흐린 날 밤 소매물도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세 가지뿐이다. 파도 소리, 발전기 소리 그리고 바람.

여행 중에 가장 소중한 침묵의 시간이 온 것이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싸우고 화해하며 살아가는 세상 속에 천금 같은 고독의 시간. 낮의 소매물도에서 눈과 귀를 위한 교향시가 있었다면, 밤의 소매물도에선 마음을 위한 교향시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주변에 아무도 없이 홀로 세상에 던져졌다고 느껴질 때 그래서 한없이 쓸쓸하여 주저앉고 싶을 때, 밤의 소매물도는 그들에게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두 팔을 벌려 심호흡해본다. 부드러운 바람 속에 실려 온 ‘바다’가 가슴으로 한가득 밀려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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