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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항암하러 입원하다.
고정혁기자2009년 01월 08일 16:52 분입력   총 887025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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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담 이승섭(74)_식도암과 갑상선 아래 전이된 림프절전이

항암주사 다시 맞아보련다
2008년 1월 23일(수)
예약한 한 주일이 어느 새 후딱 지나 결국 임영혁 교수 진료를 받았다. 만 1년 2개월만의 진료다. 항암을 꺼리던 세월의 공간을 넘은 면담이었는데 그동안 뭐 하고 있다가 무슨 염치로 또 나타났냐는 식의 핀잔을 머금은 인상을 풍기지 않고 인자스런 음성으로 나를 대하는 임교수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진료 결과는 항암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으나 남은 방법이라고는 그래도 항암 주사밖에 없으니 심사숙고하여 결정하라는 언명이었다. 최종 결정은 누가 할 것이냐는 나의 질문에 그것은 당연히 당사자인 나의 몫이라고 임교수는 답했다. 그래서 “그렇다면 부작용만 있을지 몰라도 그리 각오하고 당장 항암주사 맞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입원 처방이 내려지고 원무과에 들려 입원 신청을 한 후 병원을 나왔다.

2년 여 전에 맞은 항암주사 부작용으로 가뜩이나 양 다리에 마비 증상이 있고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으니 어쩌면 이번 항암주사로 영영 회복 못할 앉은뱅이 신세가 될 지도 모르겠고 더 나아가 현기증 때문에 쓰러져 눈 감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냥 가만히 있으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는 목 부위 암 덩어리들이 갑상선, 상부식도 외벽, 첫 번째 가슴등뼈에 침윤할 것일 터인데 그렇게 되면 결과는 뻔하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죽기가 마찬가지라면 암 덩어리들 혼이라도 내주고 죽어야지 하는 생각이다.

돌아오는 길….
어쩌다 이 지경까지 몰렸을까.
천 갈래 마 갈래로 울적한 마음만이 흩날린다. 그냥 눈에 띠는 PC방에 들렀다. 사위와 딸, 손녀들 사진을 보면 울적함이 조금은 가셔질 것 같아서였다. 나의 특효약이다.

결국 항암하러 입원하다
2008년 1월 29일(화)
아침 출근하자마자 전화했나보다. 오후 4시까지 입원하라는 원무과 통지다. 입원 신청한지 닷새만의 통지니 무척 빠른 셈이다. 신축된 암 센터 덕인가보다.
삼성병원에 이어 한의원에서도 전화가 왔다. 제출한 서류를 정밀 검토할 결과 침으로는 치유될 대상이 아니니 다른 방도를 찾아보라는 것이다. 거절당했지만 K박사를 오히려 존경하고픈 마음이 일었다. 신념에 살고 소신대로 환자를 돌보는 그 양심 있는 긍지가 너무도 존경스러워서다. 제 발로 굴러들어온 손님, 적당히 치료하는 양 하면서 수입을 늘릴 수도 있는데,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소신껏 치료하고 치료 안 될 것은 처음부터 환자를 안 받는 것이다. 항암 끝나면 다시 한 번 더 들러볼 생각이다. 예후생활에서는 침도 좋은 역할을 할 것이니 그때 K박사를 다시 만나볼 생각이다.

병실 배정은 2인실로부터 시작한다. 하루 15만원과 1만원은 너무 차이나는 입원비이다. 하지만, 처음엔 2인실로, 그 후 이삼일이 지난 후에 6인실 행…, 정형화된 코스이다. 입원실 들러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나면 정신적으로도 입원환자가 되고 만다. 제일 먼저 체중, 신장을 재고 다음은 담당 간호사의 병실 첫 방문, 입원환자의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혈압, 체온 검사하고 나면 길고 긴 문진으로 이어진다. 문진 후 입원실의 여러 기능을 설명하고 환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으로 입원의례는 끝난다. 다시 혈액검사용 채혈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하고, 첫 투약분을 복용하고 가슴 엑스레이를 찍고 나면 입원 첫날의 의식은 모두 끝난다.

환자들은 입원의례를 마치면 뭐 대단한 환자라도 된 것 같은 심리에 빠져 일찌감치 침대에 얌전히 누워 첫날밤을 보낸다. 헌데 나는, 아내도 집으로 돌려보내곤 곧바로 휴게실 PC로…. 나 같은 환자는 간호사들 사이에 제일 싫은 환자다. 말 많고 틈만 나면 휴게실 PC앞에 앉아 있으니 화나는 것을 참아가며 달래야 하는 고약스런 노인환자일 게다. 주치의조차도 힘들고 꺼리는 환자일 것이다.
입원실 주치의는 거의 레지던트 1년차다. 식도암 3년차 환자에게 1년차 레지던트는 당연히 경의를 표해야 하느니….

빠르게 끝낸 입원, 퇴원
2008년 1월 31일(목)
새로 오픈한 암센터 덕분에 입원 대기일도 적었지만 검사, 치료방침 결정, 치료, 퇴원이라는 일련의 과정이 스피디하게 이뤄져 3박 4일의 병원 생활을 마쳤다.
첫 날은 2인실에서 각종 검사를 치르고 그런대로 잘 보냈다. 둘째 날은 6인실로 이동했다. 역시 병상수를 늘린 표가 나는 게다. 금식 들어가 CT찍고 PICC 시술하라는 처방이 내려졌다. CT는 이제 13회니 그 요령은 이골이 나 있다. PICC 시술을 받으라는 처방은 어쩐지 꺼림칙한 느낌이었으나 반대할 명분도 힘도 없어 눈 딱 감고 응했다. 그런데 요놈의 PICC, 그냥 중심정맥관이라고들 부르는 듯도 한데 중심정맥관은 케미포트를 이르는 말인 듯 하고 진단서에 기록되어 있는 정식 명칭은 [경피적 말초 삽입 중심 정맥관]이라고 굉장히 길다. 그래서 우리말은 안 쓰고 그냥 PICC라고 부른다.
5-Fu같은 장시간(72시간) 점적용으로 개발된 것인데 몇 개월이고 정맥과 연결된 튜브를 팔에 꽃은 채 지내야 하기 때문에 늘 감염의 두려움이 뒤따라 다니는 놈이다. 불편도 하고.
CT 판독 결과가 예상보다는 조금 좋게 나왔지만 어쨌든 내용은 고약스럽다. 목의 암 덩어리들이 조금 더 커졌고 갑상선 하단으로의 침윤도 더 해졌고 오른쪽 폐 상단부에 또 새로운 전이성 결졀 부위가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정말 맥 풀리는 기분이다. 판독은 꽤 정밀하게 꼼꼼히 보아준 느낌이다. 고마운 일이다.
다만, CT내용과 내가 받는 고통이 많이 다르다.
목 부위 암 덩어리들이 조금 커졌다는 표현인데 그 조금이 나에겐 큰 문제다. 식도를 외부에서 눌러대는 것이며 누르기가 하루하루 힘을 다해 이젠 밥 먹기가 힘들다. 물조차 목구멍을 넘기고는 걸린다. 하루 종일 끊임없이 먹어대야 할 알약을 먹을 때면 역류 현상도 일어나 눈물, 콧물 흘려가며 깩깩거리게 되니 곤혹스럽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식도 내부에 생긴 식도암을 기적으로 치유시켰는데 그놈의 편평상피암 세포놈들, 기어코 내 식도를 작살내겠다고 벼르고 있는 것 같다. 왜 그렇게 식도에 매달려 나를 굶겨 죽이려는지 참으로 기막힌 현상이다. 암으로 죽을 때 죽더라도 먹을 수 있도록 하여준다면 어디 덧나나? 왜 하필 식도에 집착하는지….
* * * *
얌전하게 지내다 올 생각이었는데 둘째 날 밤에 결국은 주치의에게 한바탕 해대고 말았다. 5-Fu같은 약제를 주사할 목적으로 PICC시술을 했는데 저녁 때 내려온 처방 내용에는 주사 대신 경구용 젤로다를 처방하는 것으로 결정 나 있었다. 젤로다를 경구 투여하면 혈액 중에서 암세포가 만들어지는 효소를 만났을 때 후루오라실 성분으로 변하면서 암세포를 공격하는, 말하자면 표적 치료제이니까 5-Fu 주사 때보다는 부작용이 적어서 주사보다는 경구용 젤로다가 좋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젤로다를 복용한다면 도대체 PICC는 왜 시술했는가가 문제다. 물론 만들어진 PICC에 CDDP(시스플라틴) 주사액을 정맥 주사하는데 이용할 수 있겠지만 6시간용 정맥 주사를 위해서 말초삽입중심정맥관을 시술하여 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한번 격양된 상태에서 레지던트를 보게 되면 별 일 아닌 것도 사사건건 못마땅하게 느껴지니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도록 품성 관리 하나 제대로 못하는 추한 꼴의 늙은이가 되고 말았다. 연달아서 성질깨나 부리고 말았다. 내가 좀 유난스럽나보다.

위 사진과 같이 몇 달이고 바늘을 묻고 살아야 한다. 위생적 관리를 위해서 소독은 2일에 한 번씩 해야 되고 닷새에 한 번씩 헤파린 용액 3cc를 주입시켜야 한다.
끊임없이 이어질 이 작업들을 집에서 아내의 도움을 받아 나 자신이 해야 한다. 참으로 귀찮은 일이고 감염이 염려되어 신경 쓰이는 작업이다. 이런 과정을 알고 있었기에 화를 아니 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간호사들은 모두가 정말 친절하고 천사 같았다. 예전의 간호원 상과는 전혀 다른 철저하게 훈련받은 친절함을 보여줘 불친절에 길들여진 환자들이 오히려 당혹스러워 할 정도다. 암센터 10층 서병동의 천사들, 그 친절을 높이 평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특히, 2005년 겨울, 본관 17층 서병동에 입원했을 때 수간호사로 늘 친절했던 노선숙과장이 이번에도 10층 서병동 수간호사로 다시 만났고 내 성질을 다 받으며 아름다운 미소로 늘 감싸주었으니 그 마음 잊지 못할 것이다. 고맙습니다. 노선숙 과장님.
이지완 간호사도 잊지 못한다. 둘째 날, 밤 깊도록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성질 부리던 늙은 환자를 낯빛 한번 흐리지 않고 고분고분 미소 지으며 밤새 나를 돌봐주던 그 친절은 참으로 대단한 직업정신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깊은 감사를 드린다. 직업의식만으로는 감당하게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타고난 성품까지 아름다운 것이리라.

단골 기본 약제인 시스플라틴(CDDP) 한 병을 정맥주사 맞고, 젤로다 2주분 투약 받고 기타 7~8 종류의 약들을 한 보따리 끌어안고 쫓겨나듯 서둘러 퇴원당하고 말았다. 아침 회진 때 하루나 이틀 더 머물며 경과를 지켜봐달라고 임영혁 교수에게 부탁했는데 “안 됩니다. 밀려있는 환자들 생각을 해야죠. 여기가 호텔인 줄 아십니까? 안됩니다.”라고 화를 내는 독설을 퍼부어대며 휑하니 가버렸다. 교수의 권위다. 안 된다 하면 되었지, 호텔 운운하는 독설까지 필요한 것인지…. ‘품성’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의료진의 현주소인가.

시간은 빨리도 흘러갔다. 월요일 오후에 입원하고 3박4일 채운 목요일 오전에 퇴원했다.
이제는 닥쳐올 부작용에 대비할 시간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인가.

10층의 병동 천사들
2008년 2월 2일(금)
일제 치하에 있을 때 그때는 간호부라는 호칭이었다. 멋 부린 별칭은 나이팅게일. 하얀 캡을 쓰고 하얀 간호복이 정장이었고 간호부의 상징이었다. 간호부를 그때도 천사라고 불렀었다. 아프고 힘없는 사람들을 돌봐주는 것이 직업이니 천사가 마땅하다. 관념적으로는 천사가 틀림없다.
그러나 내용은 좀 달랐다. 환자에게 엄격하고 더러는 퉁명스럽고, 무섭고 싸늘한 게 간호부들이었다. 의사들이 환자들을 그렇게 엄하고 싸늘하게 대하는 것이 의사의 위엄이요, 권위라고 생각해왔던 것이니 그 본을 받은 간호부들의 권위 내세우기 심리가 간호부들을 천사라는 호칭과는 사뭇 다른 성깔 있는 여인네들로 거동케 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모두가 그랬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흐름이 대중적이었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해방 후에도 간호부의 호칭은 계속되었다. 일제 때 물려받은 나쁜 관행도 그대로 계속되었고 간호부는 언제부턴가 간호원으로 바뀌었다. 그 간호원은 오늘날 간호사라는 명칭으로 바뀌어다. 명칭의 일련의 변화는 1950년대 말에 시작되었던 국가시험(아마 1957년 보건사회부 의정국 주관으로 제1회)제도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설립된 간호 전문학교가 다시 4년제 간호대학으로 격상되면서 간호원들의 질적 향상이 이루어지면서 명칭도 간호사 선생님으로 바뀌었나보다. 4년제 대학을 졸업했다면 어엿한 학사요, 의사선생, 약제사 선생, 간호사 선생 등등, 동격 호칭과 예우를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환자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는 본질적 문제는 자격이나 호칭 문제가 아니다. 환자라는 약자를 대하는 그들의 품성이 문제인 것이다.

60여 년 전 중학교 다닐 때의 일이었다. 말을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함부로 해대는 나를, 하루는 아버님이 꾸짖으셨다. 말을 할 때는 앞뒤 사정을 고려하면서 신중하게 하고 특히 듣는 사람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뭐, 그때는 그런 말씀이 듣기 싫은 잔소리 정도였고 귀담아 들을 리도 없다. 귀담아 들었다 해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삼성 암센터 10층 서병동 간호사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친절했다. 친절의 대명사로 천사라는 호칭을 사용해도 좋다면 난 그들을 천사라고 부르고 싶다. 누가 더 친절하고 누가 덜 친절하고의 현실적 차이는 있겠으나 그래도 그들은 철저한 훈련과 투철한 직업의식이 돋보이는 자각 있는 분들이었다. 서병동 전문간호사 노석숙 과장을 중심으로 똘똘 합심한 친절한 팀으로 보였다.
다만 3박 4일 동안 나를 돌봐준 간호사는 그들 중 한 부분인데 돌봐준 간호사들만을 칭찬할 수밖에 없는 나의 입장도 조금 거북스럽다. 담당이 아니었는데도 복도에서 스치면 미소를 보내고 부드럽고 예쁜 눈길을 보내준 그 많은 간호사들…. 그렇다고 고맙다고 일일이 이름이라도 적어 둡시다, 할 수도 없는 병원 입원환자 생활이었다.

수고하는 모든 분들께 고맙다는 인사말 드리면 우선은 함께 사진을 찍게 된 노과장님 사진이나 올려본다. 노과장님과 함께 사진 찍은 조인자 간호사님께는 뜻하지 않게 퇴원 익일에도 신세를 졌다. 퇴원 당시 깜빡했던 몇 가지 일들의 뒤처리를 받았던 것이다. 조인자 간호사님. 고맙습니다.

회의, 방황, 암울
2008년 2월 4일(월)
시스플라틴을 맞은 지 5일이 되었다. 젤로다 복용은 4일이 되고. 오늘 아침부터 식도 졸림 현상이 많이 완화된 것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 녹즙 마시는 데 겁겁하기는 해도 걸리지는 않고 넘어간다. 밥도 껄끄럽고 겁겁스러웠지만 엊그제보다는 넘기기가 수월해져 이대로라면 스탠드 삽입 공포에서 벗어나질 것 같다.
지금의 심정은 암으로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식도 협착이 심해져 음식을 연하(沿河) 못하니까 스탠드를 삽입한다든가 위에 직접 호스를 연결하는 관급 현상이 두려운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모습이며 비참의 극인 말기 현상이다.
내 나이 찰만큼 찼으니 언제고 어느 때고 담담한 심정으로 죽음을 수용할 마음가짐은 되어있다. 다만, 죽을 때 죽더라도 관급으로 명줄 이어가는 비참한 과정은 아니 거치고 죽고 싶은 생각뿐인 것이다. 지난 2주일 동안 내색은 안했지만 나의 머릿속을 꽉 채웠던 자욱한 안개가 협착 진행의 공포였다. 그 공포의 안개가 이젠 서서히 걷히려하고 있는 것이다. 벌써부터 마음이 행복해진다. 아니, 벌써 행복하다. 지속되던 공포에서 벗어나는 이 행복감!

젤로다 정제(500mg 3tab)를 복용하는데 오늘 처음으로 깩깩거리지 않고 넘겼다. 물론 겁겁함이 심해 무척 긴장되는 연하였지만 그래도 그 과정을 통해 식도 졸림의 힘이 약해져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힘의 약화란 배수 증식으로 자각될 만큼 급격히 커지던 암덩어리들의 증식력이 주춤거리고 있다는 증거일거다. 음식의 주춤거림이란 항암약제에 대하여 반응이 있기 시작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반가운 현상이다. 이대로 잘 밀고 나가고 잘 관리해 나간다면 암을 잠재울 수는 없더라도 더 이상의 증식은 일단 저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암 조직에게 증식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이다. 그런데 바로 이 문제가 암 치료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고 가장 어려운 문제이고 정답이 따로 없는 문제다.
지난 2년 반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한숨이 앞서 절로 나온다. 딴에는 열심히 치료 받아왔고 열심히 관리도 잘 하려고 마음 써 왔었다. 그런데 그게 마음뿐이었고 철저하지는 못했었다. 투병기를 들여다보면 누구 못지않게 모범적인 요양생활을 해온 것 같이 보이는데 실생활은 그렇지도 안 했었다. 철저한 관리만 이루어져 왔었던들 지금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거늘….

다만, 현 시점에서 나를 당혹스럽게 하며 과거의 요양 방법에 회의를 느끼게 하는 요소는 너무도 많아 아직도 현재와 앞으로 요양방침을 정할 수 없어 마음의 방황은 어디쯤에서 그쳐질 것일까, 암울한 생각이 앞을 가린다. 과거에 굳은 신념으로 믿었던 나의 맞춤형 요양방법이 빗나갔다는 현실 앞에서 과거의 요양 방법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요양 방침을 세워야 하는데 과거의 무엇이 잘못된 것이며 무엇이 잘했던 것인가를 가늠하지 못하고 있으니 앞으로의 방침을 세워 볼 엄두가 안 난다. 그저 그냥 답답하고 암울한 상태인 것이다.

종교적 신앙심에 견줄 만큼 신념으로 해온 녹즙 마시기, 쌀밥을 거부하고 15잡곡밥으로 일관해온 주식, 혈액 정화를 위하여 항산화 약제들을 꾸준히 복용해 온 그 노력, 해독 작용과 자연치유력에 보탬이 된다고 한약재를 정성껏 직접 조제하여 시간 맞춰 복용해오던 그 굳은 의지, 300보만 걸으면 통증이 일어나 더는 못 걷겠다는 다리를 쉬며 달래며 마구 걷게 했던 그 아픔의 시간들…. 그래도 남보다는 조금은 초인적 모습의 나였다고 자부해왔는데 오늘의 이 허탈한 현상 앞에서 으스러져버린 나의 처량함이 한없이 불쌍히 여겨진다.
무엇이 잘못이었을까?
무엇이 정말 잘못된 것이냔 말이다.

먹거리에 관한 혼란
2008년 2월 5일(화)
이상한 일이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2년 반 동안 끈질기게 지속되던 목 부위, 오른쪽 가슴 부위, 오른쪽 겨드랑이 통증들이 조용해진 것이다. 항암 약제에 반응을 보이고 있는 암 조직들이 새로 혈관 생성을 못하니 그만큼 정상 조직의 신경말초를 건드려 오던 일들을 못하게 되었다는 현상으로 풀이된다. 아주 미약한 통증이 겨드랑이에 간간히 남아 비치긴 하지만 통증에서 완전히 해방된 상태 같다. 지긋지긋했던 그놈의 통증들, 이제 다신 찾아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제발!, Please, Please!

아직 항암제 부작용 증상은 안 일어나고 있다. 1주일에서 열흘쯤 지나야 나타나나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몸이 전체적으로 조금 나른한 느낌이다. 특별히 식욕을 잃은 것 같지는 않아도 줄고 있다. 아침 식사로는 녹차국수 몇 가닥이 전부였다. 구운 마늘, 데친 브로콜리, 생다시마잎, 김치 등등 몇 가지 반찬이 있었으나 손도 안댔다. 별로 생각이 안 나고, 또 넘길 때의 그 곤욕이 싫어서였다.

점심은 인사동 두부마을 집에서 청국장 정식을 들어다. 식도암으로 먼저 떠나버린 단짝 친구 고 김석균 학형의 부인과 요즘 부쩍 나를 보살펴주고 있는 죽마고우 한용식 학형과 셋이서 어울렸다. 부인은 20여 년 전 유방암으로 절제 수술하였다. 본인의 관리 능력도 뛰어나서 예후가 아누 좋았고 단 한 번의 말썽도 없이 현재까지 잘 지내오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협착증이 오락가락하나보다. 아침에 젤로다 복용 시에는 겁겁하긴 했어도 넘길 때의 아픔은 없었는데 하필이면 점심 식사 때 아픔이 왔다. 밥을 대 여섯 숟갈 뜨고 청국장 몇 번 뜨고는 더는 못 먹었다. 손님을 청해 놓고 그 앞에서 내가 이렇게 아파합니다 라고 데모라도 한 꼴이 돼버렸다. 민망한지고.
항암 중에는 체력이 떨어지니까 무엇이든 잘 먹어야하며 육류도 꺼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정설같이 되어 있는데 왠지 그대로 따르고 싶지 않다. 항암 중에도 하루 빨리 나의 맞춤형 식이요법들을 짜서 실행에 옮길 생각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나의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해버린 일이 발생했다.
한의원 K박사가 짚어준 나의 체질이 마음에 걸린다. 8체질 진단법으로 나의 체질은 토양이란다. 토양에 좋고 해롭고 한 식품 재료들을 보면 평생을 몸에 좋다고 생각하며 먹어온 여러 품목들이 나에게는 해롭다 쪽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다. 평생의 식사만이 아니고 암 요양과정에서 암에 좋다는, 그래서 꾸준히 먹어온 음식들이 해롭다로 자리바꿈을 하였으니….

먹거리에 관한 한 난 지금 패닉 상태다.

뒤로월간암 200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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