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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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거름으로 크고있는 씨앗하나 - 첫번째
고정혁기자2009년 01월 15일 19:17 분입력   총 878633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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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병귀 | 아들 간모세포종으로 4년 투병중

드라마나 영화도 예고편이 있고, 병이 올 경우 전조증상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하다못해 까마귀가 운다든지, 꿈자리가 뒤숭숭하다든지 아무튼 모든 일은 조짐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토록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칠 줄은 바로 전날까지도 우리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아이가 고3으로 올라가던 2005년 1월이었다. 방학이라 독서실에 다니던 아이는 새벽 2시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나는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정리하고 밤 열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담임선생님과 반 아이들과의 캠프가 있어 아이는 밤 12시쯤 조금 미리 들어왔다. 열심히 공부했으니 내일은 신나게 놀아라하고 나는 행복한 꿈나라로 여행을 시작했고 아이는 컴퓨터를 켜놓고 춤 연습을 했다.

캠프에서 돌아온 아이는 오른쪽 어깨가 아프다고 하며 바로 누워서 잠을 자지 못했다. 비스듬히 앉아서 잠을 자기에 캠프에서 무엇을 했는가 물었더니 산악자전거를 타고 축구를 했노라고 한다. 과격한 운동 후유증으로 담이 결렸는가보다 생각하고 다음날 바로 동네 재활의학과에 보냈다. 재활의학과에서도 담이 결린 것으로 생각했는지 약도 주지 않고 물리치료만 하고 돌려보냈는데 아이는 여전히 아파하며 제대로 눕지를 못했다.
다음날 다시 그 병원으로 갔더니 선생님이 바로 피검사를 해보고는 큰 병원으로 가라는 것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선생님은 인턴시절에 이런 아이를 본 적이 있어서 재활의학과에서는 거의 하지 않는 피검사를 한 것이었다. 덕분에 바로 여러 가지 치료를 하며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때 만약에 대수롭지 않게 진통제를 주어 보냈더라면 일주일이면 통증은 없어졌을 테고, 암은 더 진행되어 급기야는…. 간은 마지막까지 일을 한다고 하니 그렇게 지나쳤다면 어찌되었을까 생각하면 끔찍할 따름이다.

바로 큰 병원 응급실로 가서 엑스레이를 찍고 CT를 찍고 MRI를 찍고 조직검사까지 했다. 뭔지는 모를 이상한 기운이 감도는데 의사선생님을 붙잡고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불안했지만 입으로 말을 하면 꼭 그렇게 될 것 같아 불길한 생각이 나면 머리를 도리질하며 나쁜 생각이 나가버리기를, 사라져버리기만을 기도했다.
의사 선생님은 아이가 간염이 있었는지, 밥을 잘 먹지 않는지, 요즘 체중이 줄었는지, 잠을 잘 못 자는지, 신경질을 내는지 등을 물어보셨지만 어느 것도 아이에게 해당되는 항목은 없었다. 아이는 그때 키가 175Cm에 몸무게는 72킬로 정도였고, 반 대항 축구시합을 하면 수비수를 하면서도 상대편 골대까지 공을 몰고 갈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좋았고 모든 구기운동을 좋아했던 스포츠맨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암에 대하여 무지했는가 하면 의사 선생님이 병명을 말해줬는데도 그게 암인지조차 몰랐다. 내가 퇴근하고 병실로 돌아오니 간호를 하고 있던 남편이 “병명이 나왔는데 간암은 아니고 무슨 무슨 종이라고 하네? 암이 아니라니 얼마나 다행이야.”라고 한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의사 선생님들의 표정을 보면서 심각한 병일 것이라고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암이 아니고 ‘무슨 종’이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그러다가 그 ‘종’이라는 것이 종양의 ‘종’자 인줄을 알고 나서 얼마나 절망을 했는지 모른다. 지금에는 씁쓸하고 한심스럽지만 그때는 ‘종’자 한 글자에 나락으로 추락했다.

수술을 한다고 했을 때 놀라고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수술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술적합성 검사를 해서 수술여부를 결정하게 되고, 수술할 수 있는 확률도 이 병은 20%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을 알고 나니 수술에 대한 두려움보다 수술만 할 수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아들의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는 그 심정은 또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3시간으로 예정된 수술이 4시간이 넘고 4시간 30분이 되어서야 아이는 수술실을 나와 회복실로 갈 수 있었다. 내 인생 오십이 되도록 이렇게 긴 시간이 있었을까 싶게 길고도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보통의 경우 간 수술을 받고는 중환자실에 2주 정도 머문다고 했지만 젊은 나이라 그런지 회복실에서 한 시간 만에 병실로 올라왔다.

아이는 하루빨리 병원을 나간다는 일념으로 온몸에 주렁주렁 무엇을 달고 와서는 정신이 들자마자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6시간동안 자면 안 된다는 얘기를 듣고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애쓰는 모습을 보자니 참으로 애처로워 가슴이 저려왔다. 밤에 마취가 깨고 나면 밤새 극심한 통증으로 힘들어 할 것 같아 남편과 같이 밤을 새기로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날 밤 남편과 나는 잠을 잤다. 아이는 별다른 통증 없이 그대로 밤을 넘기고 다음날 폐활량 운동과 가래를 뽑아내기 위해서 기침연습과 팔 다리 운동을 했다.

이튿날, 힘겹게 몸에 달려있던 줄이 두 개나 떨어져 나갔다. 아이는 밥을 먹고 싶다고 했지만 아직 가스가 나오지 않아 밥은 먹을 수 없다고 하니 아이는 운동을 더 열심히 한다고 했다. 운동을 해서 할 수 있으면 당장이라도 할 자세다. 하지만 간 수술을 하고나서는 무리한 운동을 하면 안 된다고 하여 조심스럽게 운동을 하고 기다렸다.
그 다음날은 소변 줄을 제거하고 스스로 소변을 보는데 성공하였다. 아이는 아프다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그 큰 수술을 견디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체온이 떨어지지 않았다. 공 올리는 연습과 심호흡을 한다고는 하는데 수술부위가 아파서 제대로 못해서인지 아니면, 가래가 많이 나오지 않아서인지 열이 떨어지지 않아 걱정을 했다.

보름정도가 지나자 퇴원을 할 것 같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아이는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감고 세안하고 화장품도 바르고 멋을 내는 폼이 컨디션이 좋아지고 있었다. 외과에서는 수술이 잘 되었으니 항암치료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퇴원을 준비하는데 내과에서 왔다. 병명은 소아간암인 ‘간모세포종’이었다. 간모세포종은 보통 3세에서 5세의 아이들에게 걸리는 병인데 우리아이는 고3에 이 병에 걸린 것이다.
그때까지 아이는 자기의 병명을 모르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네 병명이 뭔 줄 아니?”라면서 “네 병명은 간모세포종이라는 것인데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더니 그동안 잘 견디던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외가에서 지내던 동생도 퇴원한다기에 병원에 왔다가 그 소리를 듣고는 온 가족이 모두 통곡을 했다.
한참을 울다가 아이가 눈물을 닦으며 하는 말이 “엄마, 울지 마세요. 육체적인 고통은 참아낼 수 있어요. 해 볼게요.”한다. “하규야! 견뎌내자. 처음에 너무 무서운 소리를 많이 들었기에 엄마는 이 상황을 감사하게 생각한단다. 엄마와 아빠는 네 치료를 위해서 온 힘을 다할 거야.” 우리는 아들의 말에 울음을 멈췄다.

내과병동으로 옮기고 나서 외출허락을 받고 집으로 왔다. 거의 한달 만에 집에서 아이는 환호를 한다. 다 나아서 오는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쏟아지는데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아이가 묻기에 네가 앞으로 그 힘들다는 항암치료를 받을 것을 생각을 하고 고통을 견뎌야 할 생각을 하니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이는 견뎌낼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데 왜 저라고 못 하겠어요 라며 담담하게 내게 말한다.
행복은 꼬리만 있고 머리는 없다고 했던가? 평범했던 일상들이 왜 이렇게 그리워지는지….

뒤로월간암 200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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